목차
Ⅰ. 서 론
Ⅱ.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배경
1. 동학농민혁명은 왜, 어떻게 일어났나?
2. 동학의 창도와 공인운동
Ⅲ. 3월봉기. 고부에서 전주성까지
1.고부농민봉기
Ⅳ. 집강소. 무르익는 혁명의 희망
1. 일본의 내정간섭과 갑오개혁
2. 집강소의 설치
Ⅴ. 9월 재봉기. 일본군에 가로막힌 꿈
1. 재봉기 결정과 준비
2. 전국 각지의 봉기와 전투
Ⅵ. 결 론
Ⅱ.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배경
1. 동학농민혁명은 왜, 어떻게 일어났나?
2. 동학의 창도와 공인운동
Ⅲ. 3월봉기. 고부에서 전주성까지
1.고부농민봉기
Ⅳ. 집강소. 무르익는 혁명의 희망
1. 일본의 내정간섭과 갑오개혁
2. 집강소의 설치
Ⅴ. 9월 재봉기. 일본군에 가로막힌 꿈
1. 재봉기 결정과 준비
2. 전국 각지의 봉기와 전투
Ⅵ. 결 론
본문내용
삼남에서 의병을 불러오는 방안 등을 모색하였다. 그러던 중 그는 일본의 권고 등으로 농민군에게 '해산하라'는 효유문을 내리는 때를 이용하여, 8월 25일경 전라도의 농민군 등에게 밀지를 비밀리에 내려 보냈다. 삼남 각처의 양반과 보부상뿐 아니라 농민군까지 다같이 창의(倡義)하여, 일본군을 치고 나라를 구하라는 것이다. 밀지는 전라도의 일부 유림에게도 전달되었으나, 유림들은 농민군과 행동을 같이 할 수 없다며 호응하지 않았다. 아무튼 이로써 대원군은 농민군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대원군의 밀지는 7일 남원의 김개남에게 전달되었고, 전봉준도 삼례로 나와 밀지를 전달받았다. 이후 전봉준은 손화중 등에게 지시를 내리는 한편, 본격적으로 재봉기 채비를 갖추어 갔다. 이처럼 전봉준이 재봉기를 결정지은 계기 역시 대원군과의 연합이 구체화된 데서 찾을 수 있다. 9월 재봉기의 근본적인 배경은 말할 것도 없이 일본의 내정간섭 심화였고, 제1의 일본군 축출이었다. 전봉준과 김개남은 8일경 재봉기를 서둘러 확정짓고 준비에 들어갔다. 이렇게 각지에서 무장한 농민군은 전봉준과 김개남 휘하로 모여들었다. 전라도의 농민군 10만 여명은 3월 봉기 때와 비슷하게 전봉준과 김개남의 세력으로 형성되었다.
2. 전국 각지의 봉기와 전투
9월초 전라도에서 농민군이 대대적으로 재봉기하고, 이어 충청도에서 농민군이 총봉기하였다. 이들 봉기를 앞뒤로 경상, 강원, 경기, 황해도에게도 농민들이 봉기하였다. 9월 재봉기 때는 전라도와 충청도 지역의 농민군이 힘을 합쳐 북상 길에 올랐고, 이와 별도의 조직을 이룬 가운데 경상, 강원, 경기, 황해도의 농민군이 봉기하였다. 사실상 조선 전역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난 것이다. 봉기한 농민들은 일본군과 맞서 싸우며 반일(反日)항쟁을 전개하는 한편, 지역에 따라서는 매우 강력한 사회개혁 운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한마디로 9월 재봉기 당시에는 조선 전역은 항일구국 운동과 사회개혁 운동의 물줄기로 일렁이고 있었다.
Ⅵ.결론
1894년 농민전쟁에서 농민군은 주객관적인 요인들로 인하여 패배하고 말았으나 역사 속에서도 패배한 것은 아니었으며 한국근대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 첫째, 1894년 농민전쟁은 중세사회의 낡은 체제를 무너뜨리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둘째는 조선 후기 이래 진행되어온 반봉건 농민항쟁의 총결산이자 근대 민중항쟁의 출발점으로서의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고, 셋째는 외세의 침략에 대한 극복을 위해 투쟁하였던 반침략 반외세 투쟁의 선구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수많은 농민들의 참여와 희생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는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만 농민전쟁의 패배원인은 다음과 같다. 첫째, 외세의 간섭을 들 수 있다. 1차 봉기 때는 외세의 개입에 의해 중동에서 중단되었으며, 그 목적 자체가 외세의 축출이었지만 끝내는 그 외세에 의해 진압당하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둘째는 개화파가 농민군을 적대세력으로 간주하여 진압에 나선 것이었으며, 셋째는 농민군축의 주체적인 측면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즉, 농민군축의 이념상의 미숙성, 통일적인 지휘체계와 조직력의 미흡, 농민군의 전략 전술상의 미숙함, 무기의 열세 등이 그것이다. 그 밖에도 국제정세에 대한 인식에도 일정한 한계가 있었음을 지적할 수 있다. 이와 같이 1894년의 농민전쟁은 봉건적인 중세사회를 마무리 짓기 위한 총결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새로운 사회를 모색하고 준비하는 과정이었다.1894년 동학농민혁명은 이후 일본에 의한 보호국화가 강제되었을 때 이에 저항하여 전국 각지에서 봉기한 의병들의 반일투쟁으로 면면히 이어지면서 반일의병전쟁의 선구로서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2. 전국 각지의 봉기와 전투
9월초 전라도에서 농민군이 대대적으로 재봉기하고, 이어 충청도에서 농민군이 총봉기하였다. 이들 봉기를 앞뒤로 경상, 강원, 경기, 황해도에게도 농민들이 봉기하였다. 9월 재봉기 때는 전라도와 충청도 지역의 농민군이 힘을 합쳐 북상 길에 올랐고, 이와 별도의 조직을 이룬 가운데 경상, 강원, 경기, 황해도의 농민군이 봉기하였다. 사실상 조선 전역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난 것이다. 봉기한 농민들은 일본군과 맞서 싸우며 반일(反日)항쟁을 전개하는 한편, 지역에 따라서는 매우 강력한 사회개혁 운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한마디로 9월 재봉기 당시에는 조선 전역은 항일구국 운동과 사회개혁 운동의 물줄기로 일렁이고 있었다.
Ⅵ.결론
1894년 농민전쟁에서 농민군은 주객관적인 요인들로 인하여 패배하고 말았으나 역사 속에서도 패배한 것은 아니었으며 한국근대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 첫째, 1894년 농민전쟁은 중세사회의 낡은 체제를 무너뜨리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둘째는 조선 후기 이래 진행되어온 반봉건 농민항쟁의 총결산이자 근대 민중항쟁의 출발점으로서의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고, 셋째는 외세의 침략에 대한 극복을 위해 투쟁하였던 반침략 반외세 투쟁의 선구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수많은 농민들의 참여와 희생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는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만 농민전쟁의 패배원인은 다음과 같다. 첫째, 외세의 간섭을 들 수 있다. 1차 봉기 때는 외세의 개입에 의해 중동에서 중단되었으며, 그 목적 자체가 외세의 축출이었지만 끝내는 그 외세에 의해 진압당하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둘째는 개화파가 농민군을 적대세력으로 간주하여 진압에 나선 것이었으며, 셋째는 농민군축의 주체적인 측면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즉, 농민군축의 이념상의 미숙성, 통일적인 지휘체계와 조직력의 미흡, 농민군의 전략 전술상의 미숙함, 무기의 열세 등이 그것이다. 그 밖에도 국제정세에 대한 인식에도 일정한 한계가 있었음을 지적할 수 있다. 이와 같이 1894년의 농민전쟁은 봉건적인 중세사회를 마무리 짓기 위한 총결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새로운 사회를 모색하고 준비하는 과정이었다.1894년 동학농민혁명은 이후 일본에 의한 보호국화가 강제되었을 때 이에 저항하여 전국 각지에서 봉기한 의병들의 반일투쟁으로 면면히 이어지면서 반일의병전쟁의 선구로서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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