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전쟁의 두 주인공
Ⅱ. 합스부르크-발로아 전쟁
■■. 전쟁의 동기(動機)
■■. 전쟁의 경위(經緯)
○ 제1차 전쟁(1521~1526)
○ 제2차 전쟁(1526~1529)
○ 제3차 전쟁(1536~1538)
○ 제4차 전쟁(1542~1544)
■■. 전쟁의 결과(結果) 및 후기(後期)
Ⅲ. 느낀 점
Ⅳ. 참고사진자료
Ⅱ. 합스부르크-발로아 전쟁
■■. 전쟁의 동기(動機)
■■. 전쟁의 경위(經緯)
○ 제1차 전쟁(1521~1526)
○ 제2차 전쟁(1526~1529)
○ 제3차 전쟁(1536~1538)
○ 제4차 전쟁(1542~1544)
■■. 전쟁의 결과(結果) 및 후기(後期)
Ⅲ. 느낀 점
Ⅳ. 참고사진자료
본문내용
하였으나, 종교개혁 운동에 대해서는 신교도를 탄압하고 종교재판소를 설치하는 등 엄하게 경계하였다. 그러나 국내정치는 20세 연상의 정부 디 안 드 푸아티에와 총신 기즈 공(公) 등에 의해 좌우되었다. 1533년 이탈리아의 명문 메디치가(家)에서 카트린 드 메디시스를 왕비로 맞았고, 그 왕자에서 프랑수와 2세, 샤를 9세, 앙리 3세가 왕위에 올랐다. 1559년 7월 신하인 몽고메리 백작과의 마상시합에서 눈에 창을 맞고, 10일 뒤에 파리에서 죽었다. 혹설로는 1559년 재판관들이 요구한 종교에 대한 양심선언에 분노하여 마상시합에서의 죽음을 재촉했다고도 한다.
가 왕위에 올랐다. 찰스 5세 역시 1556년 은퇴하여 후계자들에게 지위를 넘겼다. 찰스가 제위에 오른 지 40년이 되고, 죽은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샤토 캄브레시스 조약을 1559년 4월 1~3일에 맺었다. 이 조약에 의해 향후 수십 년간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의 관계가 바로 정립되었다. 프랑스는 이탈리아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하고 사보이와 피이드몽을 양도하였지만, 동부 지역으로부터의 수입은 계속 차지하게 되었다. 이탈리아의 서부 롬바르디는 사보이에, 파르네세스와 곤자가스의 남동부 및 시에나는 메디치 가에 편입되어 또다시 분열의 아픔을 경험하게 되었다. 스페인이 16세기 후반 월등하게 우월해지면서 이 조약을 통해 이룩된 평화가 지속될 수 있었다.
Ⅲ. 느낀 점
루터에 의해 종교 개혁이 시작되고, 진행되는 시점에서의 두 왕국의 전쟁은 어쩌면 전혀 무의미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본다. 찰스 5세가 아무리 기를 쓰고 루터와 그의 추종자들을 막으려고 시도했어도, 결국은 그들을 막지 못하고 스스로 실의에 빠져 자신의 모든 지위를 후계자들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수도원에 은거하였다. 속담 중에 '제풀에 지친다.'라는 말이 있는데 찰스 5세의 상황에 제격이다. 아무리 전쟁에서 승리하고 넓은 영토를 차지했다고 할지라도, 새롭게 불어오는 개혁의 소용돌이(a whirlpool of the New Reformation)는 막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분명 그도 개혁을 꿈꾸었다. 하지만 그가 꿈꾸었던 개혁은 옛 교회의 개혁이었다. 따라서 새로운 교회를 주창한 루터와 비교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신실하신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이 그 어떤 힘과 능력으로 막으로 해도 결단코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만약 막강한 힘을 가졌던 찰스 5세가 새로운 개혁에 눈을 떠서 루터를 도왔다면 종교개혁이 어떻게 진행됐을까 라는 생각도 해본다. 하나님의 일을 나라는 인간이 감히 예측할 수 없지만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유럽 전역으로 영토를 뻗어 나갈 때 자신이 정복했던 도시마다 그리스의 문화를 전파하여 그 여파가 '간다라 미술'이라는 형태로 우리나라에까지 미쳤던 역사적 사실만을 놓고 생각해 볼 때에는 분명 더 좋은 결과가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찰스 5세는 바로 알지 못했고, 바로 아는 방법을 새롭게 전파하려는 루터의 주장을 묵인하고 오히려 핍박함으로 영적으로 파멸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의 우리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하고, 앎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천하고 전파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분명 가르쳐주신다.
'여호와께서 그 구원을 알게 하시며 그 의를 열방의 목전에 명백히 나타내셨도다 (시 98:2)'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요일 5:13)'
Ⅳ. 참고사진자료
찰스 5세
프란시스 1세
찰스 5세가 탔던 말의 기갑 복장
합스부르크-발로아 전쟁(이탈리아 전쟁)
1500년대의 유럽 지도
가 왕위에 올랐다. 찰스 5세 역시 1556년 은퇴하여 후계자들에게 지위를 넘겼다. 찰스가 제위에 오른 지 40년이 되고, 죽은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샤토 캄브레시스 조약을 1559년 4월 1~3일에 맺었다. 이 조약에 의해 향후 수십 년간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의 관계가 바로 정립되었다. 프랑스는 이탈리아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하고 사보이와 피이드몽을 양도하였지만, 동부 지역으로부터의 수입은 계속 차지하게 되었다. 이탈리아의 서부 롬바르디는 사보이에, 파르네세스와 곤자가스의 남동부 및 시에나는 메디치 가에 편입되어 또다시 분열의 아픔을 경험하게 되었다. 스페인이 16세기 후반 월등하게 우월해지면서 이 조약을 통해 이룩된 평화가 지속될 수 있었다.
Ⅲ. 느낀 점
루터에 의해 종교 개혁이 시작되고, 진행되는 시점에서의 두 왕국의 전쟁은 어쩌면 전혀 무의미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본다. 찰스 5세가 아무리 기를 쓰고 루터와 그의 추종자들을 막으려고 시도했어도, 결국은 그들을 막지 못하고 스스로 실의에 빠져 자신의 모든 지위를 후계자들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수도원에 은거하였다. 속담 중에 '제풀에 지친다.'라는 말이 있는데 찰스 5세의 상황에 제격이다. 아무리 전쟁에서 승리하고 넓은 영토를 차지했다고 할지라도, 새롭게 불어오는 개혁의 소용돌이(a whirlpool of the New Reformation)는 막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분명 그도 개혁을 꿈꾸었다. 하지만 그가 꿈꾸었던 개혁은 옛 교회의 개혁이었다. 따라서 새로운 교회를 주창한 루터와 비교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신실하신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이 그 어떤 힘과 능력으로 막으로 해도 결단코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만약 막강한 힘을 가졌던 찰스 5세가 새로운 개혁에 눈을 떠서 루터를 도왔다면 종교개혁이 어떻게 진행됐을까 라는 생각도 해본다. 하나님의 일을 나라는 인간이 감히 예측할 수 없지만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유럽 전역으로 영토를 뻗어 나갈 때 자신이 정복했던 도시마다 그리스의 문화를 전파하여 그 여파가 '간다라 미술'이라는 형태로 우리나라에까지 미쳤던 역사적 사실만을 놓고 생각해 볼 때에는 분명 더 좋은 결과가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찰스 5세는 바로 알지 못했고, 바로 아는 방법을 새롭게 전파하려는 루터의 주장을 묵인하고 오히려 핍박함으로 영적으로 파멸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의 우리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하고, 앎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천하고 전파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분명 가르쳐주신다.
'여호와께서 그 구원을 알게 하시며 그 의를 열방의 목전에 명백히 나타내셨도다 (시 98:2)'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요일 5:13)'
Ⅳ. 참고사진자료
찰스 5세
프란시스 1세
찰스 5세가 탔던 말의 기갑 복장
합스부르크-발로아 전쟁(이탈리아 전쟁)
1500년대의 유럽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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