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을 빛낸 사람들 20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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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Darwin, Charles Robert /1809-1882
Newton, Isaac /1642-1727
Dalton, John /1766-1844
Lavoisier, Antoine Laurent /1743-1794
Linne, Carl von /1707-1778
Maxwell, James Clerk /1831-1879
Mendel, Gregor /1822-1884
Gauss, Karl Friedrich / 1777-1855
Mendeleev, Dmitri /1834-1907
Bohr, Niels /1885-1962
Boyle, Robert /1627-1691
Boltzman, Ludwig /1844-1906
Archimedes /B.C. 287-212
Einstein, Albert /1879-1955
Eukleides /B.C. 259년경 활동
Kepler, Johannes /1571-1630
Copernicus, Nicholas /1473-1543
Hippocrates /B.C. 460-370년경
Heisenberg, Werner /1901-1976
Pythagoras /B.C. 560-480년경
Faraday, Michael /1791-1867

본문내용

하였으며, 생전에 이미 높은 명성을 누렸다는 정도가 알려져 있을 뿐이다. 히포크라테스는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한데, 이 말은 원래 "우리 의사들의 인생은 짧지만 우리 집단의 의술은 계속된다"는 뜻이었다. 지금은 히포크라테스 학파만 유명하지만 당시에는 다른 의사 집단들도 명성을 떨치고 있었고, 그들이 더 환영받는 경우도 있었다. 다른 의사들이 질병의 즉각적인 치료를 중시한 것과 달리 히포크라테스 학파의 의사들은 자연과 조화롭게 살면서 병에 걸리지 않는 것을 강조하여 질병과 환경의 관계를 연구하였으며, 병의 진행을 정확히 기록하고 예측하는 일을 중시했기 때문이었다. "당신은 모레 새벽 쯤에 생사의 고비를 맞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의사보다는 "당신의 병은 고칠 수 있다"고 장담하는 의사가 환자에게 환영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히포크라테스 학파의 선배 의사가 남긴 기록은 후배들에게 좋은 참고자료가 되었고, 후대에는 좋은 의서는 무조건 히포크라테스 학파가 남긴 것이라는 믿음까지 생기게 되었다. 그 결과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히포크라테스 전집>에는 다른 집단의 의사들이 남긴 문헌들도 많이 섞여 있다.
Heisenberg, Werner /1901-1976
독일 뮌헨 대학 문헌학 교수의 아들로 태어난 하이젠베르크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고전문학과 그리스 철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1920년 뮌헨 대학에 진학한 그는 대학자 좀머펠트를 만나 물리학에 일생을 걸게 된다. 이 대학에서 그가 만난 볼프강 파울리 역시 이후 대물리학자로 성장하였고, 이들의 우정은 일생 동안 계속되었다.
1925년 하이젠베르크는 현대 물리학의 결정적인 전환점을 제공한 '행렬역학'을 만들었다. 행렬역학이라 불리는 이유는 입자를 기술하는 데 행렬수학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는 전자 궤도와 같이 추상적인 개념을 폐기하고 스펙트럼에 나타나는 진동수처럼 측정가능한 양을 방정식에 포함시키자고 주장했다. 1926년 슈뢰딩거(Erwin Schrodinger)는 하이젠베르크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파동역학을 만들었다. 이들 두 사람의 독립적인 노력으로 양자역학은 비로소 그 모습을 세상에 드러냈다. 1927년 하이젠베르크는 전자의 운동량은 에너지와 마찬가지로 불확정한 것이며, 운동량과 위치의 곱은 일정한 상수(h/2 )보다 작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유명한 '불확정성 원리'이다. 이 원리는 결정론적 인과율, 대상에 대한 객관적인 관찰 가능성 등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의 전환을 가져왔다.
1932년 31살의 나이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하이젠베르크는 나치 치하에서도 독일을 떠나지 않고 남아 독일 우라늄 연구를 주도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이 과학 실험실의 영역에서 벗어나 군사 무기로 개발되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Pythagoras /B.C. 560-480년경
"만물은 수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 피타고라스는 사실 베일에 싸인 인물이다. 기원전 560년경 에게해의 사모스섬에서 태어난 것으로 전해지며, 일설에는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의 시조인 탈레스의 제자였다고도 한다. 그는 이후 '피타고라스 학파'라 일컬어진 추종자들을 데리고 '만물은 수'라는 철학을 바탕으로 수론과 기하학, 음악, 천문학 등을 연구하였으며, 종교적 신념을 가지고 이탈리아 남부의 여러 도시에서 정치적인 활동을 하였다.
피타고라스가 우리에게 더욱 잘 알려진 것은 피타고라스 정리와 무리수(√2)를 발견했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들을 그가 직접 발견했다고 보기는 어렵고 이전부터 알려져 있었던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우주의 근본물질이 물이라고 본 탈레스나 원자라고 한 데모크리토스와는 달리, 피타고라스는 '수'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을 숫자로 풀어보려 했다. 예컨대 2는 여성, 3은 남성, 이들의 합인 5는 결혼을 뜻한다고 보았다. 뿐만 아니라 음계의 한 옥타브(8음계), 5음계, 4음계의 간격들이 모두 간단한 숫자적 비례들로 표시될 수 있다고 보았다. 직각삼각형의 3:4:5의 비율, 천체가 일정한 거리의 비율로 운동한다는 사실 등은 그에게 있어서는 수야말로 사물의 본질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수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어디까지나 추상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피타고라스는 수학 특히 수론의 창시자로서 이후 수학의 발전에 주춧돌을 놓았다.
Faraday, Michael /1791-1867
영국 뉴윙턴 지방에서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난 패러데이는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버지를 따라 런던으로 이사하여 열네 살 때부터 서점의 제본공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이 자리는 패러데이뿐만 아니라 인류 과학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한가한 시간을 이용해 미래의 대과학자 패러데이가 온갖 종류의 책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당시 마셀 부인이 쓴 <화학에 관한 대화>나 <대영백과사전>의 전기화학 부분을 즐겨 읽었던 그는 간단한 화학 실험이나 전기 장치를 만들어보기도 했다. 그는 스물 한 살이던 1821년, 당대 최고의 과학자였던 데이비의 공개 강연을 듣고 과학 연구에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했으며, 이후 데이비에게 발탁되어 연구조수로 활약하게 된다.
1831년은 패러데이의 가장 중요한 업적으로 꼽히는 전자기 유도 현상이 발견이 발견된 해였다. 전류가 자기장을 생성하여 나침반을 움직이게 한다는 사실은 1820년 덴마크의 물리학자 외르스테드에 의하여 이미 밝혀져 있었다. 패러데이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자석을 움직여주면 전류가 흐른다는 사실을 알아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발전기의 원리이다.
1834년에는 전기분해 실험을 통해 전기화학의 가장 기본적인 법칙인 '패러데이 법칙'을 발견했다. 전해질 용액에 전류를 흘려줄 때 전극에서 생성되는 물질의 양은 화학 당량의 정수배가 되는데 1당량은 흘려준 전기량과 관련있다는 것이다. 전기량을 표시하는 단위 패럿(farat)은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틴달 선생, 나는 끝까지 평범한 패러데이로 남겠습니다." 이것은 1857년 영국 과학자들의 최고의 영광인 왕립학회 회장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사양하면서 결코 평범하지 않았던 위대한 과학자 패러데이가 남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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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06.17
  • 저작시기20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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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302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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