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시인소개
2. 김춘수 시인의 시세계
3. '무의미시'의 자아 인식과 시간 인식
4. 주체 파멸과 주체 현존의 변증법
5. 명상의 시간성과 영원성에의 지향
2. 김춘수 시인의 시세계
3. '무의미시'의 자아 인식과 시간 인식
4. 주체 파멸과 주체 현존의 변증법
5. 명상의 시간성과 영원성에의 지향
본문내용
열하는 근대적 시간의식에 대해 정면으로 대립된다. 여기서 근대적인 시간의식이란, 시간을 동질적인 시간 단위의 끝없는 연쇄로 간주하는 양화(量化)된 시간 개념 뿐만 아니라, 미래의 시간 속에 유토피아를 설정한 후 역사란 미래의 유토피아를 향해 직선적으로 진보하는 것이라고 믿는 목적론적 역사관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무의미시의 반복적 리듬은 시간의 연쇄를 부정할 뿐만 아니라, 미래를 향해 스스로를 용도 폐기하는 현재라는 시간 관념도 모두 부정한다. 왜냐하면 반복적 리듬은 모든 시간 영역에 속하는 것들을 현재화하고, 그것들 사이에 내재하는 차이와 이질성을 제거하여 서로 뒤섞이게 하기 때문이다.
한편 <처용단장> 제2부의 부제는 '듣는 소리'가 아니라 '들리는 소리'로 되어 있다. 무의미시에서 듣는 행위의 주체성(혹은 주체의 능동성)은 완전하게 거세되어 있는 것이다. 시인은 반복적인 음성 이미지를 통해 영혼의 소리를 듣고자 했다. 즉 시인은 낯선 타자(영매)의 주술을 통해 순간적으로 현현(에피파니)하는 영원(절대)의 시간을 포착하고자 했다. 때문에 무의미시에서 시인이 바라는 영원의 세계는 언어로 재현되지 못 한다. 그것은 소리의 빛깔로, 도취와 명상의 순간 속에서 잠시 나타났다 사라질 뿐이다.
가령 <리듬1>을 보면, 이 작품은 '자작나무 꽃' → '바다' → '눈물' → '새'의 이미지로 전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각각의 이미지 사이에는 어떤 연속성도 없다. 단지 시인의 자유연상에 의해 각각의 이미지들이 자유롭게 병치되어 있다. 물론 <리듬>1의 이미지는 <처용단장> 제1부에 나타난 중심 모티브들을 변용한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 시는 유년의 기억 속에서 길어올린 이미지들을 자유롭게 병치시킨 것이다. 하지만 그 이미지들의 기원은 철저하게 은폐되어 있으며, 각각의 이미지는 어떠한 순차적 질서도 형성하지 않는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각각의 이미지는 순서가 뒤바뀌어도, 혹은 일부가 삭제되거나 변형되어도 상관이 없다. 애초에 의미를 지향하지 않는 까닭에, 의미 연관을 읽어내려는 어떠한 독해 의도도 허용되지 않는다. 단지 끊임없이 이미지의 소멸과정만 반복될 뿐이다. 한편 <하늘수박>이란 시의 경우 시적 대상이 '하늘수박'→'올리브', '바람'→'눈', '한여름'→'내년 가을' 등으로 묘사 대상이 이동하면서, 하나의 시어(이미지)가 다른 시어(이미지)에 의해 부정된다. 그럴 때 이 시를 읽고 남게 되는 것은 "우찌 살꼬 바보야"라는 말의 반복뿐이다. 결국 이 시에서 모든 시적 진술은 언롱, 즉 무의미한 말장난의 차원으로 전이되는 것이다.
시니피앙의 자유로운 유희는 언롱(무의미한 말장난)의 형태로 표현되거나, 음향적 효과의 추구로 나타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유연상'의 방법이다. 자유연상이란 서로 연결될 수 없는 상이한 이미지를 동일한 작품 속에 병치시키는 방법이다. 이러한 병치의 방법은 연속성(Sukzession)과 통일성 대신에 일시성과 동시성의 질서를 낳는다. 즉 시의 통사적인 질서가 공간화되어, 이미지의 자유로운 출렁임 속에 일종의 율동감을 느끼는 것, 즉 언어의 의미 측면보다는 소리 측면이 극단적으로 추구되는 것이다.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무의미시에서 대상의 이미지는 동시적인 사건들로 제시된다. 모든 비동시적인 사건과 사물이 동시적인 질서로 병치되는 것이다. 이때 사물과 사물, 대상과 대상 사이 개입될 수 있는 연속성은 완전히 사라지며, 모든 의식과 이미지 그리고 언어들은 '순간'의 시간 속에서 재구축된다. 작품 전체를 통어하는 초월적 시니피에가 부재하는 상황에서, 각각의 사물과 이미지 언어들은 현재의 시간축 위에 서로 대등하게 동시적으로 배열되는 것이다. 따라서 시간의 진행을 따라 전개되는 언어의 통사적 기능, 즉 의미 형성적 기능은 철저하게 부정될 수밖에 없다. 이런 이미지 제시방법으로 인해, 무의미시는 철저하게 무시간성 혹은 영원한 현재의 시간성을 지니게 된다. 무의미시의 시간은 과거와 미래를 향한 모든 통로를 잃어버린 것이다. 경험적 시간의 직선적인 진행은 급격하게 단절되고, 시간의 흐름 자체가 철저하게 무화되는 것이다. 실제로 무의미시에서 지나간 과거와 현재 사이의 구분은 완전하게 사라진다. 과거적 자아는 현재적 자아의 순간적인 지속을 가능하게 하지만, 그 지속은 일시적인 것에 그칠 뿐이다.
결국 무의미시의 시간 의식이 지닌 이런 모든 특성은 명상의 시간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명상의 시간성은 자아와 대상의 지양을 가능하게 하는, 시간 손실의 근본적인 동인이다. 무의미시에서 자아는 대상(경험영역)에서 분리된 채, 일종의 방심상태(자유)에서 순수 자아로 침잠하여, 순수 자아의 자동기술법으로 시를 써간다. 이 명상 혹은 도취가 창출해내는 독특한 심미적 상상력의 시공간에서는 "어떤 보편적인 이념이 지각되는 것이 아니라 독특한 삶의 흔적만이 지각된다. 무의미시에서 독특한 삶의 흔적은 유년 체험의 교묘한 병치로 짜여지는데, 이때 시인의 경험은 체험의 원천을 간직하지 못한 채 파편화된 이미지로 해체된다. 관조자와 관조가 서로 뒤섞이고, 주체의 개체성과 의지가 망각되는 지점에서, 영원의 시간성이 현현하기를 시인은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무의미 시의 어느 곳에서도 영원은 언어의 옷을 입지 못한다. 순간의 시간을 통해 현현하게 될 절대(영원, 비재)의 세계는 언어로 표현(재현)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의미시가 침묵의 수사학과 관련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명상의 시간성은 절대가 현현하는 순간의 시간성을 가리키는 까닭에, 거기에는 절대 세계에 대한 주체의 초월 욕망이 결부되어 있다. 이 초월의 욕망은 경험적 세계에 대한 부정 의식을 담고 있다. 김춘수는 무의미 시론에서 때로는 '순수'라는 말로, 때로는 '도덕적인 긴장'이라는 말로 이 부정 의식을 표현하고 있다. 언뜻 보기에 상호 모순되는 이 두 말이, 무의미시론에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끊임없는 말의 유희가 합목적적 노동행위에서 벗어난 것이고, 이는 도구적 이성이 지배하는 경험 세계(근대 세계)에 대해 근본적인 저항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처용단장> 제2부의 부제는 '듣는 소리'가 아니라 '들리는 소리'로 되어 있다. 무의미시에서 듣는 행위의 주체성(혹은 주체의 능동성)은 완전하게 거세되어 있는 것이다. 시인은 반복적인 음성 이미지를 통해 영혼의 소리를 듣고자 했다. 즉 시인은 낯선 타자(영매)의 주술을 통해 순간적으로 현현(에피파니)하는 영원(절대)의 시간을 포착하고자 했다. 때문에 무의미시에서 시인이 바라는 영원의 세계는 언어로 재현되지 못 한다. 그것은 소리의 빛깔로, 도취와 명상의 순간 속에서 잠시 나타났다 사라질 뿐이다.
가령 <리듬1>을 보면, 이 작품은 '자작나무 꽃' → '바다' → '눈물' → '새'의 이미지로 전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각각의 이미지 사이에는 어떤 연속성도 없다. 단지 시인의 자유연상에 의해 각각의 이미지들이 자유롭게 병치되어 있다. 물론 <리듬>1의 이미지는 <처용단장> 제1부에 나타난 중심 모티브들을 변용한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 시는 유년의 기억 속에서 길어올린 이미지들을 자유롭게 병치시킨 것이다. 하지만 그 이미지들의 기원은 철저하게 은폐되어 있으며, 각각의 이미지는 어떠한 순차적 질서도 형성하지 않는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각각의 이미지는 순서가 뒤바뀌어도, 혹은 일부가 삭제되거나 변형되어도 상관이 없다. 애초에 의미를 지향하지 않는 까닭에, 의미 연관을 읽어내려는 어떠한 독해 의도도 허용되지 않는다. 단지 끊임없이 이미지의 소멸과정만 반복될 뿐이다. 한편 <하늘수박>이란 시의 경우 시적 대상이 '하늘수박'→'올리브', '바람'→'눈', '한여름'→'내년 가을' 등으로 묘사 대상이 이동하면서, 하나의 시어(이미지)가 다른 시어(이미지)에 의해 부정된다. 그럴 때 이 시를 읽고 남게 되는 것은 "우찌 살꼬 바보야"라는 말의 반복뿐이다. 결국 이 시에서 모든 시적 진술은 언롱, 즉 무의미한 말장난의 차원으로 전이되는 것이다.
시니피앙의 자유로운 유희는 언롱(무의미한 말장난)의 형태로 표현되거나, 음향적 효과의 추구로 나타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유연상'의 방법이다. 자유연상이란 서로 연결될 수 없는 상이한 이미지를 동일한 작품 속에 병치시키는 방법이다. 이러한 병치의 방법은 연속성(Sukzession)과 통일성 대신에 일시성과 동시성의 질서를 낳는다. 즉 시의 통사적인 질서가 공간화되어, 이미지의 자유로운 출렁임 속에 일종의 율동감을 느끼는 것, 즉 언어의 의미 측면보다는 소리 측면이 극단적으로 추구되는 것이다.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무의미시에서 대상의 이미지는 동시적인 사건들로 제시된다. 모든 비동시적인 사건과 사물이 동시적인 질서로 병치되는 것이다. 이때 사물과 사물, 대상과 대상 사이 개입될 수 있는 연속성은 완전히 사라지며, 모든 의식과 이미지 그리고 언어들은 '순간'의 시간 속에서 재구축된다. 작품 전체를 통어하는 초월적 시니피에가 부재하는 상황에서, 각각의 사물과 이미지 언어들은 현재의 시간축 위에 서로 대등하게 동시적으로 배열되는 것이다. 따라서 시간의 진행을 따라 전개되는 언어의 통사적 기능, 즉 의미 형성적 기능은 철저하게 부정될 수밖에 없다. 이런 이미지 제시방법으로 인해, 무의미시는 철저하게 무시간성 혹은 영원한 현재의 시간성을 지니게 된다. 무의미시의 시간은 과거와 미래를 향한 모든 통로를 잃어버린 것이다. 경험적 시간의 직선적인 진행은 급격하게 단절되고, 시간의 흐름 자체가 철저하게 무화되는 것이다. 실제로 무의미시에서 지나간 과거와 현재 사이의 구분은 완전하게 사라진다. 과거적 자아는 현재적 자아의 순간적인 지속을 가능하게 하지만, 그 지속은 일시적인 것에 그칠 뿐이다.
결국 무의미시의 시간 의식이 지닌 이런 모든 특성은 명상의 시간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명상의 시간성은 자아와 대상의 지양을 가능하게 하는, 시간 손실의 근본적인 동인이다. 무의미시에서 자아는 대상(경험영역)에서 분리된 채, 일종의 방심상태(자유)에서 순수 자아로 침잠하여, 순수 자아의 자동기술법으로 시를 써간다. 이 명상 혹은 도취가 창출해내는 독특한 심미적 상상력의 시공간에서는 "어떤 보편적인 이념이 지각되는 것이 아니라 독특한 삶의 흔적만이 지각된다. 무의미시에서 독특한 삶의 흔적은 유년 체험의 교묘한 병치로 짜여지는데, 이때 시인의 경험은 체험의 원천을 간직하지 못한 채 파편화된 이미지로 해체된다. 관조자와 관조가 서로 뒤섞이고, 주체의 개체성과 의지가 망각되는 지점에서, 영원의 시간성이 현현하기를 시인은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무의미 시의 어느 곳에서도 영원은 언어의 옷을 입지 못한다. 순간의 시간을 통해 현현하게 될 절대(영원, 비재)의 세계는 언어로 표현(재현)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의미시가 침묵의 수사학과 관련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명상의 시간성은 절대가 현현하는 순간의 시간성을 가리키는 까닭에, 거기에는 절대 세계에 대한 주체의 초월 욕망이 결부되어 있다. 이 초월의 욕망은 경험적 세계에 대한 부정 의식을 담고 있다. 김춘수는 무의미 시론에서 때로는 '순수'라는 말로, 때로는 '도덕적인 긴장'이라는 말로 이 부정 의식을 표현하고 있다. 언뜻 보기에 상호 모순되는 이 두 말이, 무의미시론에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끊임없는 말의 유희가 합목적적 노동행위에서 벗어난 것이고, 이는 도구적 이성이 지배하는 경험 세계(근대 세계)에 대해 근본적인 저항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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