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혁명의 원인과 전개에 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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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序 論

Ⅱ. 革命의 原因

1. 디아스 체제의 등장

2. 디아스 체제의 모순

3. 디아스 체제의 위기

Ⅲ. 革命의 過程

1. 1차 혁명

2. 2차 혁명

3. 혁명의 제도화

Ⅳ. 結 論

본문내용

정부를 동원하여 카르데나스 정부를 압박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석유 회사들의 요구를 거절하였고, 멕시코 대법원은 석유 회사들이 신청한 '구제 조치'를 기각하였다. 이에 석유 회사들은 카르데나스와 면담하는 자리에서 그들은 중재 위원회의 중재안 중에서 임금 인상 요구 만을 수용하는 대신, 사태의 재발 방지를 요구하였다. 결국 회담은 결렬되었고 1938년 3월 18일 카르데나스는 특별 담화를 통해 석유 국유화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카르데나스의 석유 국유화 조치는 멕시코인들의 민족주의적 감정과 석유 국유화로 파생될 이익에 대한 기대로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었다. 한편 미국계 석유 회사들은 카르데나스 정부에 압력을 가하도록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행정부에 총력 로비를 폈지만, 루스벨트 행정부는 당시 파시즘 진영이 대두하는 국제적 상황에서 카르데나스 정부에 대한 압력 행사가 자칫 멕시코를 敵으로 돌릴 수도 있다는 우려에 따라 석유 회사들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카르데나스 정부에 대한 우호 정책을 유지하였다. 카르데나스 정부는 다니엘스[Josephus Daniels] 미국 대사와 석유 국유화에 따른 보상 협상을 진행하였고 마침내 1941년 11월 카르데나스 후임으로 집권한 아빌라 카마초[Manuel Avila Camacho] 정부는 미국과 확대 협상을 개시하여 석유 문제를 비롯한 양국의 현안 문제를 일괄 타결하였다. 이로써 멕시코 혁명은 산 루이스 포토시 계획 발표 이후 31년 만에 終止符를 찍게 되었다.
Ⅳ. 結 論
카르데나스의 석유 국유화 선언을 마지막으로 멕시코 혁명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디아스 지배 체제를 지탱하였던 군부, 관료 집단, 대농장주, 교회, 외세 등은 차례로 무너져 내렸으며, 1938년 세디요[Saturnino Cedillo]의 반란을 끝으로 카우디요 체제는 종말을 고하였다. 혁명 전쟁을 거치면서 군부는 분쇄되었고, 혁명 정권이 확립되면서 디아스 시대의 관료 집단은 자연 도태되었으며 대농장제의 해체로 대농장주들의 입지는 크게 약화되었다. 舊 체제의 최후 보루였던 교회는 혁명에 굴복하였고 석유 국유화 조치로 외세는 후퇴하였으며 마지막 카우디요인 세디요의 반란을 끝으로 카우디요 체제는 소멸되었다. 이를 위해 31년 동안 100만의 멕시코人들이 피를 흘렸고 디아스가 이룩하였다고 자부하였던 조국 근대화는 파괴되었다.
마데로와 카란사는 비록 디아스의 독재에 항거하여 일어났지만 그들 자신 역시 구 체제의 기득권층이라는 출신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채 민중들의 열망을 거스르고 혁명을 정치적 문제에 국한시키고자 하였다가 결국 파멸을 제촉하였으며, 특히 카란사는 자신의 야망을 위해 혁명 세력을 분열시키고 내전까지 일으킨 책임을 지고 있다. 혁명 전쟁의 최종 승리자인 오브레곤과 카예스는 구 체제의 잔존 세력들을 一掃하는 데 노력하였으나 구 체제 자체를 타파하지 못하고 오히려 구 체제의 틀 안에서 안주하려 하였다. 그래서 혹자는 이들이 과거의 파괴에 몰두한 나머지 미래를 건설하지 못하였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결국 혁명의 완성은 카르데나스에 의해 이루어졌다. 카르데나스는 1917년 헌법에 명시된 개혁 조치를 이행함으로써 대농장제가 와해되고 채무 노예제가 폐지되었으며 농민, 노동자의 권익이 신장되었다.
그러나 멕시코 혁명은 노동자, 농민의 참여에도 불구하고 그 성격은 부르조와 혁명 내지 실패한 반제·반자본 혁명, 좌절된 혁명, 혹은 농민 전쟁 등으로 다양하게 규정되고 있다. 비록 노동자, 농민이 혁명군의 주력으로 참여하였지만 그들의 요구는 만족스럽게 수용되지 못하였으며 부르조와 계층은 혁명 이후에도 여전히 멕시코 사회의 주류집단을 형성하고 있다. 특히 혁명의 최종 승리자인 정치적 민주주의 세력은 노동자 농민의 요구를 어느 정도 수용하면서도 결국은 사파타-비야의 민중 세력에게 군사적 패배를 강요하였다. 그리고 혁명 이후 강화된 국가 권력과 '멕시코 혁명당(PRM)'과 그 後身인 '制度 혁명당(PRI)'의 조합주의적 헤게모니式 지배는 새로운 혁명의 가능성을 원천 봉쇄하였다. 비록 정치적인 自主는 달성하였지만 기타 부분, 특히 경제 부분의 대미 종속은 혁명 이전에 비해 심화되었다. 따라서 멕시코 혁명을 종합적으로 규정하자면 '미성숙한 민중의 이론 없는 혁명이라고 규정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멕시코 혁명은 멕시코 정치의 전반적인 발전과 진보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은 부인할 수 없다. 혁명을 통하여 멕시코는 안정된 정치 발전의 기반을 확립할 수 있었다. 또한 멕시코 혁명은 군부 독재와 미국의 제국주의적 간섭에 억눌렸던 다른 라틴 아메리카 민중들에게 혁명의 가능성을 일깨워 준 정신적·사상적 밑바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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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훈·김현숙.「멕시코의 좌절된 사회 혁명」. 한국 사회사 연구 10,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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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06.23
  • 저작시기20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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