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안톤 체홉 소개..
2. 18.19 세기 러시아 문학의 시대적 배경
3. 체홉과 사실주의
2. 18.19 세기 러시아 문학의 시대적 배경
3. 체홉과 사실주의
본문내용
거기에서 인간은 한순간도 떠날 수 없다. 이와 같이 체홉 주인공들의 존재는 다분히 유물론적이다. 그들의 유물론은 확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사실적인 생활에 의해 예정되어 있다. 체홉은 하찮으며 소박한 이야기들을 하려고 노력했다. 체홉은 끊임없이 진실을 찾았다. 그의 유물론적이고 무신론적인 지각과 현실에 대한 이해는 독특하다. 인생에 대해서 자연과학과 의학의 방법론에 의한 유물론적인 이해는 체홉의 창작에 넓게 퍼져 있다. 그는 일상생활을 묘사했다. 그것은 곧 예술적인 창작물이 된 것이다. 체홉은 일반화된 것에서 떨어져 나와, 그 안에 든 거짓과 불확실성을 바라본다. 그의 창작방법은 이미 일반화된 것을 싫어한다. 등장인물 각자의 삶은 작가 자신에게 비밀로 되어 있고, 관찰자이자 서술자인 작가뿐만 아니라 바로 주인공들은 그 비밀을 풀려고 노력한다.
체홉은 <발작>( , 1888), <명명일>( , 1888), <검은 수도사>( , 1894) 같은 단편들에서 자기 주인공들의 여러 가지 생리학적이고 정신생리학적인 상황들을 임상진료를 하듯 정확한 묘사를 하는데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의사가 환자의 몸을 진찰하듯이 작가 체홉은 다각도로 철저하게, 그리고 객관적으로 삶을 조사하고, 그 주변사회의 '질병이야기'에 몰두하였다. 따라서 과학적이고 현대적인 인생관에 대한 깊은 사색 후에 그는 자연스럽게 사회문제로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체홉은 1890년에 러시아 강제수용소를 조사하기 위해 사할린으로 떠난다. 사할린으로의 여행은 오래전부터 체홉을 괴롭혀 왔던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문제의 해결을 위한 탐구와 관련되어 있었다. 체홉은 자신의 눈으로 직접 모든 것을 목격하면서, 의술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에 대한 자신의 의무를 다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사할린 여행은 체홉이 현실 속으로 발을 들여놓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전까지의 현실은 단지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1880년대에 체홉은 똘스또이의 창작을 신중하게 뒤따르면서 어느 정도 그의 철학적 영향을 받았다. 똘스또이의 견해는 1886년의 많은 체홉 단편들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1890년대에 새롭게 발달된 사회적, 정치적 조건들 속에서 체홉은 사할린을 여행하고 난 후에 결정적으로 똘스또이의 철학에서 벗어난다. 1894년의 편지에서 체홉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똘스또이의 도덕은 이젠 나를 감동시키지 못합니다. 나에게는 농부의 피가 흐르고 있으므로, 농부의 덕행으로는 나를 놀라게 하지 못할 겁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진보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똘스또이주의에 대한 이런 극복은 이미 중편 <6호실>에서 어렴풋이 보이며 18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에 러시아에서 똘스또이의 무저항주의와 복종을 주장하는 철학은 국가의 감옥제도와 억압, 박해 속에서 자신의 행복을 찾으려는 민중들에게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6호실>은 그런 체제에 맞서 투쟁해야 한다는 불가피성을 증명했고, 참기 어려운 현실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도록 부추겼다. 이후에 특히 중편 <나의 인생>과 1896년에 쓰여진 단편 <다락이 있는 집>에서 분명하게 보인다. 체홉은 똘스또이사상과 '작은 선'이론 일상생활에서라도 우선 자기 주변의 타인에게 작은 선행을 베풀면서 어두운 러시아 사회를 구하자는 이론이 근거 없는 것임을 폭로하고, 개인적인 자기 완성도, '순수문화계몽사업'도 삶을 본질적으로 개조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체홉은 <살인>, <농부들>, 그리고 나중에 발표한 중편 <골짜기에서> 등을 통해 개혁중인 농촌에 대해 무자비하게 그 실상을 보여주었다. 인민주의자들은 농민생활을 이상화했다. 그들은 자본주의가 아직은 러시아 농촌을 오염시키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노력했다. 반면에 체홉은 농촌이 계급적으로 분화되고 있으며, 농민계층 대다수가 가난해지고 변질되었을 뿐 아니라 부농들의 탐욕적인 부유함도 알고 있었다. 체홉은 농민과 농촌생활을 전혀 과장 없이 사실 그대로 묘사했다. 사실 체홉은 사회적, 시민적 주제에 강한 관심을 보여 주었던 '대문학'의 전통하고는 전혀 무관한데서 나온 작가이다. 똘스또이주의에 공명했던 시기를 빼면 동시대의 지배적 조류에 합류한 적이 없었다. 때문에 체홉은 주의와 원칙을 지니지 않은 작가로서 비난을 받았지만 이것은 체홉이 농노출신의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인쩨리겐찌야의 전통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그는 인쩨리겐찌야처럼 농민을 이상화하기엔 너무나 농민을 잘 알고 있었던것처럼 보인다.
체홉은 <발작>( , 1888), <명명일>( , 1888), <검은 수도사>( , 1894) 같은 단편들에서 자기 주인공들의 여러 가지 생리학적이고 정신생리학적인 상황들을 임상진료를 하듯 정확한 묘사를 하는데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의사가 환자의 몸을 진찰하듯이 작가 체홉은 다각도로 철저하게, 그리고 객관적으로 삶을 조사하고, 그 주변사회의 '질병이야기'에 몰두하였다. 따라서 과학적이고 현대적인 인생관에 대한 깊은 사색 후에 그는 자연스럽게 사회문제로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체홉은 1890년에 러시아 강제수용소를 조사하기 위해 사할린으로 떠난다. 사할린으로의 여행은 오래전부터 체홉을 괴롭혀 왔던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문제의 해결을 위한 탐구와 관련되어 있었다. 체홉은 자신의 눈으로 직접 모든 것을 목격하면서, 의술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에 대한 자신의 의무를 다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사할린 여행은 체홉이 현실 속으로 발을 들여놓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전까지의 현실은 단지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1880년대에 체홉은 똘스또이의 창작을 신중하게 뒤따르면서 어느 정도 그의 철학적 영향을 받았다. 똘스또이의 견해는 1886년의 많은 체홉 단편들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1890년대에 새롭게 발달된 사회적, 정치적 조건들 속에서 체홉은 사할린을 여행하고 난 후에 결정적으로 똘스또이의 철학에서 벗어난다. 1894년의 편지에서 체홉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똘스또이의 도덕은 이젠 나를 감동시키지 못합니다. 나에게는 농부의 피가 흐르고 있으므로, 농부의 덕행으로는 나를 놀라게 하지 못할 겁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진보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똘스또이주의에 대한 이런 극복은 이미 중편 <6호실>에서 어렴풋이 보이며 18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에 러시아에서 똘스또이의 무저항주의와 복종을 주장하는 철학은 국가의 감옥제도와 억압, 박해 속에서 자신의 행복을 찾으려는 민중들에게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6호실>은 그런 체제에 맞서 투쟁해야 한다는 불가피성을 증명했고, 참기 어려운 현실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도록 부추겼다. 이후에 특히 중편 <나의 인생>과 1896년에 쓰여진 단편 <다락이 있는 집>에서 분명하게 보인다. 체홉은 똘스또이사상과 '작은 선'이론 일상생활에서라도 우선 자기 주변의 타인에게 작은 선행을 베풀면서 어두운 러시아 사회를 구하자는 이론이 근거 없는 것임을 폭로하고, 개인적인 자기 완성도, '순수문화계몽사업'도 삶을 본질적으로 개조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체홉은 <살인>, <농부들>, 그리고 나중에 발표한 중편 <골짜기에서> 등을 통해 개혁중인 농촌에 대해 무자비하게 그 실상을 보여주었다. 인민주의자들은 농민생활을 이상화했다. 그들은 자본주의가 아직은 러시아 농촌을 오염시키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노력했다. 반면에 체홉은 농촌이 계급적으로 분화되고 있으며, 농민계층 대다수가 가난해지고 변질되었을 뿐 아니라 부농들의 탐욕적인 부유함도 알고 있었다. 체홉은 농민과 농촌생활을 전혀 과장 없이 사실 그대로 묘사했다. 사실 체홉은 사회적, 시민적 주제에 강한 관심을 보여 주었던 '대문학'의 전통하고는 전혀 무관한데서 나온 작가이다. 똘스또이주의에 공명했던 시기를 빼면 동시대의 지배적 조류에 합류한 적이 없었다. 때문에 체홉은 주의와 원칙을 지니지 않은 작가로서 비난을 받았지만 이것은 체홉이 농노출신의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인쩨리겐찌야의 전통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그는 인쩨리겐찌야처럼 농민을 이상화하기엔 너무나 농민을 잘 알고 있었던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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