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니발과 스키피오의 리더쉽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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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니발과 스키피오의 리더쉽 비교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한니발과 스키피오의 전투-그들은 뛰어난 장군이었다.

2.스키피오와 한니발의 지도력

3.적극․긍정(승부사)형VS 소극․긍정(장인형)

4.바버의 이론의 응용-시대의 바람과 지도자의 유형의 일치 여부

5.한니발과 스키피오의 마지막-그들은 버림받았다.

6.한니발과 스키피오가 가지지 못한 것-그것은 행운이었다

본문내용

아 등지로 옮겨가며 로마에 대한 반로마 책동을 계속한다. 그러나 후에 로마가 더욱 힘을 불려 소아시아 지역에까지 그 세력권을 넓혀, 로마 군에 넘겨질 상황에 처하자 반지 속에 지니고 다니던 독으로 자살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승리자였던 스키피오도 한니발이 죽던 해에 52세의 나이로(당시 한니발은 64세) 세상을 떠났다. 그는 국내정치의 패배자가 되어 그의 별장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생을 마감하였다. 왜 로마는 로마를 카르타고의 위협으로부터 구해준 스키피오를 버렸을까?
스키피오가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그가 24세의 젊은 나이에 스페인 전선의 군지휘자가 되면서이다. 스페인 전선은 코르넬리우스 형제에 의해서 비교적 안정이 유지되고 있었는데, 기원전 211년 스페인 원주민 부족의 배신으로 이들이 전사하자 혼란에 빠졌고 이를 틈타 카르타고는 신속히 세력을 회복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 파견된 새로운 지휘관이 이를 수습하지 못하자 코르넬리우스 가문의 스키피오가 지휘권을 요청하게 된 것이다. 당시 로마에서 군 지휘권은 고위직으로서 자격이 없었으나 열렬한 민중의 호응으로 귀족들의 반대를 꺾고 군 지휘관이 된다.
스키피오는 그간의 전쟁 경력을 활용하여 스페인 전선을 안정시켰고 스페인인들로 부터 강력한 지지를 이끌어 냈다. 하지만, 그의 능력과 대중으로부터의 지지는 기존 귀족 세력들을 불안하게 하였으며, 정치적 경쟁을 격화시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선전은 계속되었다. 4년 후 스페인으로부터 돌아온 그는 민중의 지지로 최고 행정관인 집정관이 되었고, 이어지는 자마 전투의 승리로 그의 주가는 최고를 달렸다.
스키피오는 아프리카에서 로마로 돌아와 화려한 개선 식을 거행하고 '아프리카누스'라는 영예로운 별칭을 얻었다. 그리고 기원전 199년에는 원로원 명부에 가장 먼저 이름이 기재되는 "프린켑스 "
라틴어로는 ‘제1인자’를 뜻하고 ‘원수(元首)’로 번역된다. 본래는 로마인이든 외국인이든 권위와 실력이 탁월한 정치 지도자를 가리킨 말이었다.
가 되는 등 생애의 전성기를 얻었다.
역사비평, 1998 봄 계간지, 한니발과 스키피오, 신미숙
그러나 보수파의 정치공격은 계속
이어졌다. 특히 카토
투스쿨룸에서 출생. 대(大)카토라고도 한다.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전공을 세워 시칠리아에서 재무관, 사르데냐에서 법무관을 지내다가 BC 195년에는 콘술이 되어 에스파냐를 통치하였다. 스키피오 일족과 대립하면서도 정계에서 기반을 닦아, BC 184년 켄소르로서 로마의 도덕적 ·사회적 ·경제적 재건을 기도하였고, 그 후에도 국수주의 및 보수주의의 입장에 서서 속주정치(屬州政治) ·대외정책에 논진(論陣)을 펴며 정계에서 활약하였다. 웅변가로서도 알려져, 헬레니즘화 풍조에 반대하여 고(古)로마적인 실질강건성(實質剛健性)의 회복을 역설하였고, 또한 중소 토지소유자를 옹호하였다. 한편 반(反)카르타고정책을 계속 채택하여 제3차 포에니전쟁 전야(前夜)에는 주전론을 주창한 것도 유명하다.
는 수 차례에 걸쳐 스키피오를 기소하거나 기소를 사주하였다. 이러한 비난은 처음에는 그의 민중들로부터의 인기로 극복이 가능하였으나, 기원전 187년 스키피오 동생의 배상금 유용 문제로 인하여 곤란에 빠진다. 당시 자마 전투의 승전후 배상금의 일부를 그의 동생이 유용했다는 것이다. 돈은 군단 유지비로 들어갔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은 돈의 사용 성격이었다. 그것이 전리품이라면 지휘관의 재량에 따라 사용될 수 있었고, 만일 공식적 배상금이라면 원로원의 승인이 필요하였다. 동생은 자마 전의 승리자로서 공헌한 일들을 열거한 후 유일한 증거였던 회계장부를 찢어 버렸고-이는 자기의 무죄에 대한 강한 확신의 표현이었을 것이다.-이는 정쟁에서의 패배로 이어졌다.
얼마 후 스키피오는 시리아 왕과의 내통 혐의로 기소되었고, 이를 마지막으로 정치생명이 끊어진 채 별장에 유배와 같은 은둔에 처해졌다. 그렇게 불명예스럽게 현실정치에서 밀려난 그는 "감사할 줄 모르는 조국에서 내 장례를 치르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한니발과 스키피오가 가지지 못한 것-그것은 행운이었다
한니발과 스키피오는 카르타고와 로마의 명문 가문에서 태어나, 가족으로부터 전쟁에 대한 것을 배웠다. 한니발은 아버지로부터 거의 모든 것을 수학하였으며, 스키피오는 그의 집안 코르넬리우스 가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그리고 그들의 군사적인 감각이나 능력을 당시 상황에 비추어 봤을 때, 적정하였으며 또한 매우 뛰어 났다. 하지만 이들은 마지막에는 인정받지 못하는 죽음을 맞이했다.
생각건대,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행운이 아니었던가 한다. 한니발은 점차 로마로부터 견제 당해 축소되고 있는 카르타고에서 태어나 그들의 정치체제인, 과두정으로부터 견제를 받아 그의 능력을 100%로 발휘할 수 없었다. 영웅이라면, 그들조차 끌어들일 능력이 있었어야 하지 않겠는냐는 비판이 존재할 수 있겠지만, 이 부분은 그의 상황-대부분을 세 외 세력과의 전투로 보내야 했던-을 고려해 볼 때 불가능했다. 만일, 한니발이 국내 정치에 신경 쓰면서 전쟁터를 그의 고국 근처로 삼았다면, 카르타고의 멸망은 좀더 앞당겨지지 않았을까? 결국 그의 선택은 옳았다. 그리고 그를 버린 카르타고는 그 대가로 멸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억측일까.
스키피오의 경우, 끊임없는 보수 세력의 비난으로 명예를 훼손당할 위험에 처하지만 그의 지지기반인 민중들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카르타고를 복속 시킨 후 시간이 지날수록 옛날의 영광은 줄어들지만, 보수 세력은 줄지 않는다. 결국 그의 동생에 대한 의혹으로 정치 생명을 잃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의 동생이 조금 더 대처를 잘했더라면 그는 명예롭게 죽을 수 있지 않았을까? 이보다는 카르타고가 로마에게 계속 위험 세력이었다면 그의 능력을 필요로 하는 로마는 결코 그를 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한니발과 스키피오의 리더쉽 비교
한니발과 스키피오의 전투-그들은 뛰어난 장군이었다.
스키피오와 한니발의 지도력
적극·긍정(승부사)형VS 소극·긍정(장인형)
바버의 이론의 응용-시대의 바람과 지도자의 유형의 일치 여부
한니발과 스키피오의 마지막-그들은 버림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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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09.04
  • 저작시기20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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