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왕국 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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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잃어버린 왕국 가야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들어가기

Ⅱ.가야(伽倻)
Ⅱ-ⅰ.철기
Ⅱ-ⅱ.장신구
Ⅱ-ⅲ.농기구
Ⅱ-ⅳ.무기
Ⅱ-ⅴ.갑주(甲冑)와 마구

Ⅲ.나가기

본문내용

는 기승용 마구로 보아 그들은 기마전단(騎馬戰團)이었을 것이다.
한편 5세기대가 되면 가야의 갑주에는 일대 변혁이 나타난다. 무엇보다 큰 변화는 4세기대 철제 갑옷의 주류를 이루었던 종장판단갑이 현저하게 줄고 그 대신 4세기대에는 특정 지배자층의 전유물이었던 괘갑이 급속히 확산되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갑주의 획기적인 변화는 5세기 초에 고구려가 가야 지역에서 행한 대규모 군사 작전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말하자면 이러한 긴장에 의해 우수한 기능의 괘갑이 급격히 보급됨에 따라, 효용성이 떨어진 단갑의 제작은 필요하지 않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가야에 기마용 마구(騎馬用馬具)가 본격적으로 보급되는 것은 4세기대의 일이다. 이는 부산 복천동 69호분, 38호분 등 4세기 전반대의 고분을 비롯하여 김해 대성동 고분군의 4세기대 고분들에서 기마용 재갈, 발걸이, 말띠드리개(杏葉) 등이 꽤 발견되고 있는 점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기마 습속의 존재는 갑주 문화와 결부될 경우 매우 강력한 기마전단(騎馬戰團)이 존재하였음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본격적인 원거리 전쟁 수행, 즉 정복전쟁이 가능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문헌 기록에 의한 이해와 달리, 기마 전단의 보유 여부로 볼 때, 4세기대의 가야 사회가 신라 사회보다 한 단계 앞선 실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5세기 전엽 금관가야의 쇠퇴에 따라 가야 사회가 재편되자, 5세기 후반대에는 가야의 마구와 신라의 마구가 뚜렷한 차이를 보이게 된다. 그리하여 신라는 고구려 문화의 적극적 수용에 의해 중국 동북 지방, 즉 고구려와 신라「라인」이라고 할 만한 마구 문화를 형성하는데 비해, 가야는 백제와의 문화적 접촉과 일본열도로의 지속적인 파급에 의해 백제와 가야 및 일본열도로 이어지는 마구 문화를 꽃피게 된다.
Ⅲ.나가기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가야는 농경문화와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삼국에 뒤지지 않는 문화를 꽃피웠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까지 가야에 대해 구체적으로 잘 알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고문헌 자료에 의한 가야의 언급도 지극히 부족하며, 설사 있더라 신라에 대한 설명에 부차적으로 나오는 것이 고작이다. 하지만 우리는 구체적인 유물의 발굴과 해석으로 인하여 가야는 통일 신라 시대 이전을 사국시대로 불리어도 좋을 만큼의 국가체계를 가지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가야가 중앙집권의 통합된 국가 체제가 아닌 연맹 국가 단계에 머문 사실은 아쉬운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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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6페이지
  • 등록일2005.09.07
  • 저작시기2005.09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1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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