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유년 시절에서 결혼에 이르기까지(1893∼1915)
2. 중국의 'first lady' 시절 (1915∼1925)
3. 망명의 시절 (1925∼1931)
4. 장개석 통치하의 상해 (1931∼1937)
5. 항일전과 내전
6. 인민 공화국 (1949∼1966)
7. 문화혁명과 만년 (1966∼1981)
2. 중국의 'first lady' 시절 (1915∼1925)
3. 망명의 시절 (1925∼1931)
4. 장개석 통치하의 상해 (1931∼1937)
5. 항일전과 내전
6. 인민 공화국 (1949∼1966)
7. 문화혁명과 만년 (1966∼1981)
본문내용
973년 주은래의 건강상태가 몹시 악화되자 등소평이 복권하여 1975년까지 일상업무를 책임졌으나 곧 다시 추방되었고 중국 인민들은 마침내 힘을 모아 반발하였다. 1976년 4월 천안문 광장에서 대규모의 자발적 시위가 그것이었는데 이 시위들은 주은래가 상징이고 등소평이 그 대표자인 정치 노선을 인민들이 선택하였음을 노골적으로 표시한 것이었다.
시위는 포악하게 진압되었지만 1976년 9월 모택동이 사망함으로써 문화혁명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간단하게 끝나고 말았다.
만약 경령이 조금만 덜 헌신적이었어도 그녀는 편안한 망명생활을 할 수 있었을 테지만 그녀는 자신이 선택한 깊은 소용돌이 속에서 항상 투쟁해야만 했고 정치적 임무수행 때문에 가족들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많은 것들을 희생하였다.
경령은 캐나다의 빅토리아 대학으로부터 명예 법학 박사 학위를 받기 위해 1981년 5월 8일 마지막으로 공식석상에 그 모습을 나타내었고 얼마 후 20년 동안 앓아왔던 병이 악화되어 1981년 5월 29일 북경에서 88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녀는 남편 손문의 능묘에 묻히기를 원하지 않았는데 이는 경령이 손문의 미망인이 아니라 독립된 투사였음을 세상사람들에게 말해 주는 것이었다.
그녀가 남긴 유산은 자신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전심전력으로 헌신하였다는 것이고 이것은 그 자체로 폐쇄된 헌신이 아니라 온기와 희망을 퍼뜨리는 그런 헌신이었다.
孫文 부인으로서의 특수한 지위를 발판으로 1920년대 국민혁명의 무대에 진출했던 이상주의자 송경령은 孫文의 혁명생애의 최후에 도달했던 민족주의적 사회혁명으로서의 국민혁명의 성과를 수호하고자 했다. 그러기 위하여 그녀는 蔣介石 國民政府와의 외로운 투쟁 속에서 孫文思想의 기본을 잃지 않았고 그런 그녀는 역사상의 독자적 지위를 획득한 혁명정치가가 되었다.
송경령은 단지 孫文의 미망인으로서가 아닌 홀로 자립한 혁명정치가이며 사회활동가이며 여성해방운동의 제창자이며 세계평화운동가이며 아울러 애국주의자였음을 알 수 있다. 그녀는 도덕심이 높으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원칙과 가치에 대해서는 흔들리지 않는 신념으로 단호하고 용기있게 밀고 나갔다. 반면에 감성적이며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섬세한 성품도 간직하고 있었다. 또한 송경령은 많은 글을 썼는데. 그녀의 문장은 절도가 있고 간결하고도 논쟁적이었으며 90세 가까이 살면서 그녀는 중국과 중국민족을 사랑하고 대중편에 선 많은 글을 펴냈다. 중국에서는 송경령에 대해 "애국주의,국제주의,민주주의,공산주위의 위대한 戰士"라고 체제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좀더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사회주의를 지향한 이상주의였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송경령은 그녀가 살던 시대의 과제에 따라 민족주의, 민주·박애주의를 구체적으로 실현하고자했던 이상주의자로서 그녀가 사회주의의 길을 걸었던 것은 진정 대중편에 선, 다함께 잘사는 사회, 자유·평등·박애의 사회를 추구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인민을 위한 진정한 사회주의"가 존재할 수 있다면 송경령은 바로 그것을 지향하는 사회주의자였다고 생각된다.
시위는 포악하게 진압되었지만 1976년 9월 모택동이 사망함으로써 문화혁명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간단하게 끝나고 말았다.
만약 경령이 조금만 덜 헌신적이었어도 그녀는 편안한 망명생활을 할 수 있었을 테지만 그녀는 자신이 선택한 깊은 소용돌이 속에서 항상 투쟁해야만 했고 정치적 임무수행 때문에 가족들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많은 것들을 희생하였다.
경령은 캐나다의 빅토리아 대학으로부터 명예 법학 박사 학위를 받기 위해 1981년 5월 8일 마지막으로 공식석상에 그 모습을 나타내었고 얼마 후 20년 동안 앓아왔던 병이 악화되어 1981년 5월 29일 북경에서 88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녀는 남편 손문의 능묘에 묻히기를 원하지 않았는데 이는 경령이 손문의 미망인이 아니라 독립된 투사였음을 세상사람들에게 말해 주는 것이었다.
그녀가 남긴 유산은 자신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전심전력으로 헌신하였다는 것이고 이것은 그 자체로 폐쇄된 헌신이 아니라 온기와 희망을 퍼뜨리는 그런 헌신이었다.
孫文 부인으로서의 특수한 지위를 발판으로 1920년대 국민혁명의 무대에 진출했던 이상주의자 송경령은 孫文의 혁명생애의 최후에 도달했던 민족주의적 사회혁명으로서의 국민혁명의 성과를 수호하고자 했다. 그러기 위하여 그녀는 蔣介石 國民政府와의 외로운 투쟁 속에서 孫文思想의 기본을 잃지 않았고 그런 그녀는 역사상의 독자적 지위를 획득한 혁명정치가가 되었다.
송경령은 단지 孫文의 미망인으로서가 아닌 홀로 자립한 혁명정치가이며 사회활동가이며 여성해방운동의 제창자이며 세계평화운동가이며 아울러 애국주의자였음을 알 수 있다. 그녀는 도덕심이 높으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원칙과 가치에 대해서는 흔들리지 않는 신념으로 단호하고 용기있게 밀고 나갔다. 반면에 감성적이며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섬세한 성품도 간직하고 있었다. 또한 송경령은 많은 글을 썼는데. 그녀의 문장은 절도가 있고 간결하고도 논쟁적이었으며 90세 가까이 살면서 그녀는 중국과 중국민족을 사랑하고 대중편에 선 많은 글을 펴냈다. 중국에서는 송경령에 대해 "애국주의,국제주의,민주주의,공산주위의 위대한 戰士"라고 체제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좀더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사회주의를 지향한 이상주의였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송경령은 그녀가 살던 시대의 과제에 따라 민족주의, 민주·박애주의를 구체적으로 실현하고자했던 이상주의자로서 그녀가 사회주의의 길을 걸었던 것은 진정 대중편에 선, 다함께 잘사는 사회, 자유·평등·박애의 사회를 추구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인민을 위한 진정한 사회주의"가 존재할 수 있다면 송경령은 바로 그것을 지향하는 사회주의자였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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