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전쟁의 정의
2. 한반도 전쟁의 내막
3. 한국전 발발원인 - 국외적 측면에서
4. 한국전 발발원인 - 국내적 측면에서
5. 한국전의 성격과 결과
6. 한반도 분단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2. 한반도 전쟁의 내막
3. 한국전 발발원인 - 국외적 측면에서
4. 한국전 발발원인 - 국내적 측면에서
5. 한국전의 성격과 결과
6. 한반도 분단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본문내용
사건이 제주 민중의 4.3 항쟁과 10월 여순 봉기 등이다. 통계에 의하면 유격투쟁과 관련하여 목숨을 잃은 사람의 수가 4.3 항쟁 이후부터 6.25 이전까지 10만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처럼 분단과 통일을 둘러싼 모순과 갈등이 남한 민중의 무장 유격 투쟁으로 폭발하는 가운데, 남북 양 정권은 공공연하게 상대방에 대한 무력 정복의 의사를 드러냈다. 1948년 8월 15일, 이승만은 남한 정부수립석상에서 다음과 같이 "무력북진통일론"을 표명하였다.
"1. 대한민국 정부는 그 헌법의 규정에 따라 전한반도 내에 대한 주권을 가진 유일한 합법정부이다.
2. 선거가 보류된 북한에서 조속히 민주적 선거를 실시하여 북한 동포를 위하여 국회에 공석으로 남겨둔 100석의 의석을 채워야 한다.
3. 북한 수복은 북한 동포들의 자발적 의사가 계속적으로 봉쇄되는 경우에는 대한민국은 무력에 의해서라도 북한에 대한 주권을 회복할 권한이 있다."
북한 역시 무력북진통일론에 비견될 만한 것으로 '민주기지론'을 내세웠다. 민주기지론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남과 북에 조성된 정세와 상황이 판이한 조건에서 우선 북한 내부의 개혁과 혁명을 공고히 하고 이를 바탕으로 전국적인 개혁과 혁명, 민족의 통일을 달성한다는 것이었다.
5.한국전쟁의 성격과 결과
625전쟁 기간 중 한국 정부의 요청과 유엔헌장에 따라 미국을 비롯한 16개국의 전투부대와 5개국의 의료지원부대가 한국을 지원하여 참전하였다. 반면 중공군과 소련 공군 및 당시 동구권 국가의 의료지원부대가 북한을 지원하였다. 따라서 625전쟁은 내전으로 시작되어 20여 개국의 전투부대가 격돌하는 국제전으로 그 성격이 바뀌었다. 이와 같은 6 25전쟁의 결과와 성격은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625전쟁은 분명 제2차 세계대전 후 냉전구조 하에서 치러진 내전과 국제전의 양면성을 지녔으며, 무기 체계 면에서는 핵무기가 사용되지 않은 재래식 전쟁이었고, 지역적으로는 한반도에 국한된 국지전이었다. 또한 내전 관점에서는 총력전이었고 국제전 관점에서는 제한전쟁이었다. 이 전쟁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3년간의 전쟁에도 불구하고 38도선이 휴전선으로 바뀌어 약간 변형된 전쟁 직전의 상황으로 돌아갔다는 점이다.
둘째, 625전쟁은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싸움이었다. 공산주의와 자유 민주주의라는 이데올로기 싸움에서 자유 민주주의가 승리하였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하여 싸웠으며 인민봉기는 일어나지 않았고 미군을 위시한 유엔군도 한국을 지원하였다. 결과적으로, 유엔군과 한국군은 공산주의 침략을 격퇴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것이다.
셋째, 625전쟁은 역사상 유래가 없는 국가와 민족의 파괴와 시련의 과정이었다. 유엔군과 한국군은 약 50여만 명의 피해를 입었으며 공산군의 사상자는 150~200만 명에 이르렀다. 전쟁기간 중 남한에서만도 약 250만 명에 달하는 피난민이 발생하였고, 수백만의 북한 동포들이 공산주의 치하에서의 삶을 거부하고 죽음을 무릅쓴 탈출을 하여 천만 이산가족이 발생하였다.
마지막으로, 625전쟁은 종전이 아닌 휴전으로 마무리 되었으며 그 상태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당시 쌍방은 정전회담에서일단 교전행위를 중단하는 휴전을 하고 3개월 이내에 정치회담을 개최하여 휴전체제를 평화 제체로 전환하기로 하였으나, 지금까지도 그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한국전쟁에 대한 전통적인 연구에서는 전쟁 이전에 있었던 북한의 남한 내 전복 활동과 38선 무력 충돌을 전적으로 무시해 왔다. 한국전을 미.소 대결 차원에서만 다루었을 뿐 한반도 자체의 문제는 별로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한국전쟁의 한반도 내부 요인을 고찰한 연구가 있다고 해도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설득력 없는 음모론이나 권력 투쟁론에 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한국전쟁은 결코 한반도 자체 상황과 동떨어져서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요컨대 한국전쟁은 한반도 상황과 국제 정세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일어난 것이다.
6. 한반도 분단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1945년 해방 직후의 분단과 1948년 8~9월의 분단을 각각 나눠 생각하기로 한다.
우선, 1945년의 분단의 경우이다. 첫째, 그 근원적 책임은 일본 제국주의에게 있다. 일본 제국주의가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들었기 때문에 전시 연합국 회의들은 戰後 일제의 식민지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다루는 과정에서 자연히 한반도의 운명을 다루게 된 것이고, 그 연장선 위에서 한반도는 분단된 것이다.
둘째, 미국과 소련에게 있다. 전시 연합국 회의들은 戰後의 국제질서를 미국과 소력이 공동으로 ‘지배’하는 얄타체제를 만들어 냈다. 한반도 역시 얄타체제의 예외가 아니어서, 미국과 소련이 공동으로 ‘지배’한다는 원칙에 암묵적으로 합의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일제의 항복 직후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에 분단선을 설정한다는 데 쉽게 동의했던 것이다. 미국과 소련은 그러므로 한반도의 분단에 함께 책임을 지고 있는 셈이다.
셋째, 우리 겨레에도 부분적인 책임이 있다. 우리 겨레가 근대화에 성공하고 단결된 채 외세에 효과적으로 대응했더라면 우선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비록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했다고 해도, 뒤늦게나마 단결해 단일 망명정부를 세워 연합국과 손잡고 싸웠더라면, 분단이라는 최악의 길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어서, 1948년의 분단의 경우이다. 첫째, 미국과 소련의 공동책임이다. 한반도를 분할 점령했던 두 나라는 각자의 이해관계에 지나치게 묶여 한반도의 통일을 위해 어떠한 전진도 이룩하지 못했다. 세계적 수준에서 싸운 두 나라는 한반도에서도 뜨겁고 거세게 싸운 것이며, 그리하여 1945년의 ‘잠정적’ 분단을 굳혀버리고 만 것이다. 둘째, 우리 겨레의 책임으로, 1945년 분단의 아픔을 맛보고서도 좌. 우익과 남. 북한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끈질기게 싸운 것이다. 그 싸움은 미. 소의 대결이 더욱 깊어지는 데 일조하게 되었다. 만일 이 시기에 좌. 우익과 남. 북한이 이념적. 지역적 반목을 극복하고 공동의 목표를 설정한 채 한 덩어리가 되어 점령자들과 슬기롭게 협상해 나갔다면 우리 겨레의 운명을 훨씬 개선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분단과 통일을 둘러싼 모순과 갈등이 남한 민중의 무장 유격 투쟁으로 폭발하는 가운데, 남북 양 정권은 공공연하게 상대방에 대한 무력 정복의 의사를 드러냈다. 1948년 8월 15일, 이승만은 남한 정부수립석상에서 다음과 같이 "무력북진통일론"을 표명하였다.
"1. 대한민국 정부는 그 헌법의 규정에 따라 전한반도 내에 대한 주권을 가진 유일한 합법정부이다.
2. 선거가 보류된 북한에서 조속히 민주적 선거를 실시하여 북한 동포를 위하여 국회에 공석으로 남겨둔 100석의 의석을 채워야 한다.
3. 북한 수복은 북한 동포들의 자발적 의사가 계속적으로 봉쇄되는 경우에는 대한민국은 무력에 의해서라도 북한에 대한 주권을 회복할 권한이 있다."
북한 역시 무력북진통일론에 비견될 만한 것으로 '민주기지론'을 내세웠다. 민주기지론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남과 북에 조성된 정세와 상황이 판이한 조건에서 우선 북한 내부의 개혁과 혁명을 공고히 하고 이를 바탕으로 전국적인 개혁과 혁명, 민족의 통일을 달성한다는 것이었다.
5.한국전쟁의 성격과 결과
625전쟁 기간 중 한국 정부의 요청과 유엔헌장에 따라 미국을 비롯한 16개국의 전투부대와 5개국의 의료지원부대가 한국을 지원하여 참전하였다. 반면 중공군과 소련 공군 및 당시 동구권 국가의 의료지원부대가 북한을 지원하였다. 따라서 625전쟁은 내전으로 시작되어 20여 개국의 전투부대가 격돌하는 국제전으로 그 성격이 바뀌었다. 이와 같은 6 25전쟁의 결과와 성격은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625전쟁은 분명 제2차 세계대전 후 냉전구조 하에서 치러진 내전과 국제전의 양면성을 지녔으며, 무기 체계 면에서는 핵무기가 사용되지 않은 재래식 전쟁이었고, 지역적으로는 한반도에 국한된 국지전이었다. 또한 내전 관점에서는 총력전이었고 국제전 관점에서는 제한전쟁이었다. 이 전쟁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3년간의 전쟁에도 불구하고 38도선이 휴전선으로 바뀌어 약간 변형된 전쟁 직전의 상황으로 돌아갔다는 점이다.
둘째, 625전쟁은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싸움이었다. 공산주의와 자유 민주주의라는 이데올로기 싸움에서 자유 민주주의가 승리하였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하여 싸웠으며 인민봉기는 일어나지 않았고 미군을 위시한 유엔군도 한국을 지원하였다. 결과적으로, 유엔군과 한국군은 공산주의 침략을 격퇴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것이다.
셋째, 625전쟁은 역사상 유래가 없는 국가와 민족의 파괴와 시련의 과정이었다. 유엔군과 한국군은 약 50여만 명의 피해를 입었으며 공산군의 사상자는 150~200만 명에 이르렀다. 전쟁기간 중 남한에서만도 약 250만 명에 달하는 피난민이 발생하였고, 수백만의 북한 동포들이 공산주의 치하에서의 삶을 거부하고 죽음을 무릅쓴 탈출을 하여 천만 이산가족이 발생하였다.
마지막으로, 625전쟁은 종전이 아닌 휴전으로 마무리 되었으며 그 상태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당시 쌍방은 정전회담에서일단 교전행위를 중단하는 휴전을 하고 3개월 이내에 정치회담을 개최하여 휴전체제를 평화 제체로 전환하기로 하였으나, 지금까지도 그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한국전쟁에 대한 전통적인 연구에서는 전쟁 이전에 있었던 북한의 남한 내 전복 활동과 38선 무력 충돌을 전적으로 무시해 왔다. 한국전을 미.소 대결 차원에서만 다루었을 뿐 한반도 자체의 문제는 별로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한국전쟁의 한반도 내부 요인을 고찰한 연구가 있다고 해도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설득력 없는 음모론이나 권력 투쟁론에 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한국전쟁은 결코 한반도 자체 상황과 동떨어져서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요컨대 한국전쟁은 한반도 상황과 국제 정세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일어난 것이다.
6. 한반도 분단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1945년 해방 직후의 분단과 1948년 8~9월의 분단을 각각 나눠 생각하기로 한다.
우선, 1945년의 분단의 경우이다. 첫째, 그 근원적 책임은 일본 제국주의에게 있다. 일본 제국주의가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들었기 때문에 전시 연합국 회의들은 戰後 일제의 식민지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다루는 과정에서 자연히 한반도의 운명을 다루게 된 것이고, 그 연장선 위에서 한반도는 분단된 것이다.
둘째, 미국과 소련에게 있다. 전시 연합국 회의들은 戰後의 국제질서를 미국과 소력이 공동으로 ‘지배’하는 얄타체제를 만들어 냈다. 한반도 역시 얄타체제의 예외가 아니어서, 미국과 소련이 공동으로 ‘지배’한다는 원칙에 암묵적으로 합의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일제의 항복 직후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에 분단선을 설정한다는 데 쉽게 동의했던 것이다. 미국과 소련은 그러므로 한반도의 분단에 함께 책임을 지고 있는 셈이다.
셋째, 우리 겨레에도 부분적인 책임이 있다. 우리 겨레가 근대화에 성공하고 단결된 채 외세에 효과적으로 대응했더라면 우선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비록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했다고 해도, 뒤늦게나마 단결해 단일 망명정부를 세워 연합국과 손잡고 싸웠더라면, 분단이라는 최악의 길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어서, 1948년의 분단의 경우이다. 첫째, 미국과 소련의 공동책임이다. 한반도를 분할 점령했던 두 나라는 각자의 이해관계에 지나치게 묶여 한반도의 통일을 위해 어떠한 전진도 이룩하지 못했다. 세계적 수준에서 싸운 두 나라는 한반도에서도 뜨겁고 거세게 싸운 것이며, 그리하여 1945년의 ‘잠정적’ 분단을 굳혀버리고 만 것이다. 둘째, 우리 겨레의 책임으로, 1945년 분단의 아픔을 맛보고서도 좌. 우익과 남. 북한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끈질기게 싸운 것이다. 그 싸움은 미. 소의 대결이 더욱 깊어지는 데 일조하게 되었다. 만일 이 시기에 좌. 우익과 남. 북한이 이념적. 지역적 반목을 극복하고 공동의 목표를 설정한 채 한 덩어리가 되어 점령자들과 슬기롭게 협상해 나갔다면 우리 겨레의 운명을 훨씬 개선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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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상에 태어나길 참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