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환의 항일유적과 함께 하는 러시아 기행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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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박환의 항일유적과 함께 하는 러시아 기행 1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감동의 시베리아 첫 기행 : 하바로브스크, 이르크츠크

2. 항일 운동의 성지 : 블라디보스톡, 우수리스크

3. 연해주 지역 항일 전적지를 찾아

4. 모스크바에서 만난 항일운동가의 후손들

5. 연해주 지역의 항일유적의 현 주소

감상후기

본문내용

투쟁에 투쟁을 거듭했던 것이다. 나라만 잃지 않았다면 왜 그 먼 곳들을 갔을까?
국내도 물론 3ㆍ1운동을 비롯하여 비폭력적 독립운동이 이루어졌었다. 하지만 국외의 무장 게릴라 투쟁이야 말로 일본의 야욕에 더 적절한 대응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미 일본은 조선의 합병으로 식민지를 끝내려는 것이 아니라 조선을 발판을 삼아 중국대륙과 러시아의 시베리아 대평원을 원했는지 모른다. 더욱더 세계정복을 마음에 품었을지 모른다. 이런 상식 이하의 태도를 갖고 있는 일본에게 어떻게 비폭력 독립운동으로 과연 독립을 성취할 수 있었을까? 의문이다. 물론 일본군에 대항하는 우리 독립투사는 정신력 하나만 우세했지 수적으로나 금전적으로나 전체적인 전력이 크게 뒤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정신력 하나만으로 각지의 전투에서 승리로 이끌면서 독립에 대한 의지를 분명히 보여줬다. 또한 주요 인사들에 대한 암살을 통해서도 의지를 보여줬다. 이런 독립투사들 덕분에 독립의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그 먼 타향에서 갖은 고생과 역경을 견뎌 내면서 나라의 주권을 찾겠다는 일념하나만으로 싸워 준 덕분이다. 하지만 나를 화나게 하는 것은 광복 후이다 프랑스는 1차 세계대전시 독일에게 2년간 점령당했었다. 우리의 일제치하 36년에 비하면 너무나도 짧은 시간일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는 해방 후 그 2년간 독일을 도운 친독인사 공식적으로 약2000명을 처형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가? 친일파을 처단하지는 못할망정 친일파 그들이 국가의 주요 직책을 맡는 것이 아닌가? 물론 그 덕분에 독립 운동가들은 자연스레 대우를 받기는커녕 탄압과 박해를 받는 것이 아닌가?
이번 기행문을 읽으면서도 그렇게 나라를 위해 타국에서 목숨 바쳐 투쟁했지만 광복 후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먼 이국에서 쓸쓸히 살다가 가는 독립투사와 그의 가족과 후손들 또한 그들이 조국 광복에 대해 쏟은 열정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게 대접 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또한 분단이라는 역사의 슬픔으로 인해서 국외 특히 가장 활발히 독립운동이 벌어진 연해주, 만주, 북간도 등지의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자료가 극히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우리를 있게 만든 우리의 선조의 발자취를 찾는 것은 후손의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그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현재 여기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적으로 아니 국민 모두가 하나가 되어 우리의 독립운동사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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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6페이지
  • 등록일2005.10.07
  • 저작시기2005.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150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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