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확인된다. 율법이 하나님의 뜻을 절반만을 가르치지 않는 듯이 건조무미한 초보만을 따르는 사람들은 사도가 주장하는 것과 같은 율법의 목적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혹자는 "의의 본질은 하나님을 경건하게 공경하는 것보다 사람들과 결백하게 사는 데 있느냐?"고 물을 것이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을 진실로 경외하지 않고는 모든 점에서 사랑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사랑은 경건의 증거도 된다. 그뿐만 아니라, 주께서는 우리에게서 어떤 유익을 얻으실 수 없다는 것을 아시며, 또 선지자들을 통해서 그 점을 증언하시므로, 우리가 다할 의무를 자기에게 국한하시지않고 우리가 이웃에 대해서 선행을 하도록 훈련하신다(참조, 시 15 : 2- 3).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성도의 완성은 사랑에 있다고 하는 것은 근거가 있다(엡 3 : 19, 1 : 5, 골 3 :14). 다른 곳에서 그는 사랑을 "율법의 완성"이라고 부르며(롬 13 : 10),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고 첨가한다(롬 13 : 8). 또,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말씀에 이루었나니"고 한다(갈 5 : 14). 바울은 그리스도 자신이 가르치신 것을 가르칠 따름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고 하신다(마 7 : 12). 율법과 선지자들이 믿음을, 또 하나님께 대한 합당한 경배에 속한 것을 첫 자리에 두고 사랑을 그보다 낮은 자리에 보내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주께서 말씀하시는 뜻은 사람에 대해 바르고 공정하게 행하라고 율법이 우리에게 명령하는 목적은, 만일 우리에게 하나님께 대한 경건한 두려움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것을 바르고 공정한 행위로 증거하는 훈련을 우리가 얻게 하려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이웃에 대한 사랑
그러므로 우리가 확고하게 할 입장은 이것이다. 즉, 우리의 생활은 모든 점에서 형제들을 위한 결실이 가장 많을 때에, 하나님의 뜻과 율법의 계명에 가장 잘 합치하리라는 것이다. 자기 육신의 이익을 위해서 해야할 일이나 해서는 안 될 일에 관해서는 율법 전체의 어디를 찾아보아도 한마디도 정한 것이 없다. 사람은 원래 너무도 이기적 경향이 강하게 태어났으므로-그리고 아무리 진리에서 벗어나더라도 이기심만은 여전히 가지고 있는 것이므로-이미 너무 많은 이기심을 조장하거나 자극할 법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따라서 분명히 우리는 계명을 지키려면 자기를 사랑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해야 하며, 가장 착하고 거룩한 생활을 하려면 할 수 있는 대로 자신을 위해 애쓰지 말아야 한다. 자기만을 위해서 살며 노력하며 자기의 이익만을 생각하며 구하는 사람은 분명히 가장 비열하고 악한 생활을 하는 것이다.
참으로 주께서는 우리의 마음에 이웃을 사랑하려는 경향이 얼마나 깊이 박혀야 하는가를 표현하시기 위해서(레 19 : 18) 우리의 이기심으로 이웃에 대한 사랑을 측정하셨다. 이기심같이 강렬한 감정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표현법의 힘을 잘 생각해야 한다. 어떤 궤변가들이 미련하게 공상하듯이, 주께서는 이기심에 첫 자리를 주시며 사랑을 둘째 자리에 두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신에 대해서 자연히 느끼는 감정을 다른 사람들에게 옮기시는 것이다. 따라서 사도는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 한다(고전 13 : 5). 이 궤변가들이 쓰는 논법은 털끝만큼도 고려할 가치가 없다. 즉, 측정되는 것은 언제든지 측정하는 표준보다 낮다고 그들은 말한다. 참으로, 주께서는 우리의 이기심에 관한 표준을 정하시고, 타인에 대한 사랑을 거기 예속시키신 것이 아니라, 본성이 부패한 우리 안에 일반적으로 있는 사랑의 감정을 이제는 다른 사람에게 확대해야 된다는 것을 알리신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유익을 구할 때에 못지 않은 성의와 열심과 주의를 다해서 언제든지 이웃에게 유익을 주려는 자세를 가지라는 뜻이다.
죄는 모두 치명적인 죄이다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 같이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고 하신다(마 5 : 19). 율법에 대한 범행을 감히 가볍게 보아서 사형에 해당하지 않는 듯이 말하는 자들은 이런 무리들이 아닌가? 그들은 율법의 명령뿐 아니라, 누가 명령하시는가를 생각해야 마땅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율법에 대해서는 경미한 범행일지라도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한 것이다. 그들은 무슨 일에서든지 하나님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것을 사소한 일로 생각하는가? 율법에서 하나님이 자기의 뜻을 계시하셨다면, 율법에 위반되는 일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가 미약해서 사형이 즉시 따르지 않으리라고 공상하는가? 또 하나님께서는 이 점을 분명히 선언하셨다. 그들이 미련한 궤변으로 명백한 진리를 흐리게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생각을 한다면, 하나님의 선언은 이것이다.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겔 18 : 4,20). 방금 인용한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는 구절도 같은 뜻이다(롬 6 : 23). 그들은 부정할 수 없어서 죄라고 인정하면서도, 그것은 대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지금까지 자기의 어리석은 생각에 너무 오래 빠져 있었으므로 적어도 한 번만은 현명해야 하리라. 그러나 만일 잠꼬대를 고집한다면, 우리는 그들과 작별하겠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죄는 모두 죽을죄라고 생각해야 한다. 죄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반역이며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하기 때문이다. 죄는 율법 위반이며, 여기에 대해서는 예외 없이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 성도의 죄는 용서를 받을 수 있으나 그것은 그들의 성도로서의 본성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로 용서를 받는 것이다.
결론
십계명의 준수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다. 모든 계명은 사랑으로 압축된다. 따라서 우리가 계명을 준수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말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이웃을 사랑하게 된다. 우리는 계명을 지키기에 노력하여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복을 누리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
그러나 혹자는 "의의 본질은 하나님을 경건하게 공경하는 것보다 사람들과 결백하게 사는 데 있느냐?"고 물을 것이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을 진실로 경외하지 않고는 모든 점에서 사랑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사랑은 경건의 증거도 된다. 그뿐만 아니라, 주께서는 우리에게서 어떤 유익을 얻으실 수 없다는 것을 아시며, 또 선지자들을 통해서 그 점을 증언하시므로, 우리가 다할 의무를 자기에게 국한하시지않고 우리가 이웃에 대해서 선행을 하도록 훈련하신다(참조, 시 15 : 2- 3).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성도의 완성은 사랑에 있다고 하는 것은 근거가 있다(엡 3 : 19, 1 : 5, 골 3 :14). 다른 곳에서 그는 사랑을 "율법의 완성"이라고 부르며(롬 13 : 10),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고 첨가한다(롬 13 : 8). 또,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말씀에 이루었나니"고 한다(갈 5 : 14). 바울은 그리스도 자신이 가르치신 것을 가르칠 따름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고 하신다(마 7 : 12). 율법과 선지자들이 믿음을, 또 하나님께 대한 합당한 경배에 속한 것을 첫 자리에 두고 사랑을 그보다 낮은 자리에 보내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주께서 말씀하시는 뜻은 사람에 대해 바르고 공정하게 행하라고 율법이 우리에게 명령하는 목적은, 만일 우리에게 하나님께 대한 경건한 두려움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것을 바르고 공정한 행위로 증거하는 훈련을 우리가 얻게 하려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이웃에 대한 사랑
그러므로 우리가 확고하게 할 입장은 이것이다. 즉, 우리의 생활은 모든 점에서 형제들을 위한 결실이 가장 많을 때에, 하나님의 뜻과 율법의 계명에 가장 잘 합치하리라는 것이다. 자기 육신의 이익을 위해서 해야할 일이나 해서는 안 될 일에 관해서는 율법 전체의 어디를 찾아보아도 한마디도 정한 것이 없다. 사람은 원래 너무도 이기적 경향이 강하게 태어났으므로-그리고 아무리 진리에서 벗어나더라도 이기심만은 여전히 가지고 있는 것이므로-이미 너무 많은 이기심을 조장하거나 자극할 법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따라서 분명히 우리는 계명을 지키려면 자기를 사랑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해야 하며, 가장 착하고 거룩한 생활을 하려면 할 수 있는 대로 자신을 위해 애쓰지 말아야 한다. 자기만을 위해서 살며 노력하며 자기의 이익만을 생각하며 구하는 사람은 분명히 가장 비열하고 악한 생활을 하는 것이다.
참으로 주께서는 우리의 마음에 이웃을 사랑하려는 경향이 얼마나 깊이 박혀야 하는가를 표현하시기 위해서(레 19 : 18) 우리의 이기심으로 이웃에 대한 사랑을 측정하셨다. 이기심같이 강렬한 감정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표현법의 힘을 잘 생각해야 한다. 어떤 궤변가들이 미련하게 공상하듯이, 주께서는 이기심에 첫 자리를 주시며 사랑을 둘째 자리에 두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신에 대해서 자연히 느끼는 감정을 다른 사람들에게 옮기시는 것이다. 따라서 사도는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 한다(고전 13 : 5). 이 궤변가들이 쓰는 논법은 털끝만큼도 고려할 가치가 없다. 즉, 측정되는 것은 언제든지 측정하는 표준보다 낮다고 그들은 말한다. 참으로, 주께서는 우리의 이기심에 관한 표준을 정하시고, 타인에 대한 사랑을 거기 예속시키신 것이 아니라, 본성이 부패한 우리 안에 일반적으로 있는 사랑의 감정을 이제는 다른 사람에게 확대해야 된다는 것을 알리신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유익을 구할 때에 못지 않은 성의와 열심과 주의를 다해서 언제든지 이웃에게 유익을 주려는 자세를 가지라는 뜻이다.
죄는 모두 치명적인 죄이다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 같이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고 하신다(마 5 : 19). 율법에 대한 범행을 감히 가볍게 보아서 사형에 해당하지 않는 듯이 말하는 자들은 이런 무리들이 아닌가? 그들은 율법의 명령뿐 아니라, 누가 명령하시는가를 생각해야 마땅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율법에 대해서는 경미한 범행일지라도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한 것이다. 그들은 무슨 일에서든지 하나님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것을 사소한 일로 생각하는가? 율법에서 하나님이 자기의 뜻을 계시하셨다면, 율법에 위반되는 일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가 미약해서 사형이 즉시 따르지 않으리라고 공상하는가? 또 하나님께서는 이 점을 분명히 선언하셨다. 그들이 미련한 궤변으로 명백한 진리를 흐리게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생각을 한다면, 하나님의 선언은 이것이다.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겔 18 : 4,20). 방금 인용한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는 구절도 같은 뜻이다(롬 6 : 23). 그들은 부정할 수 없어서 죄라고 인정하면서도, 그것은 대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지금까지 자기의 어리석은 생각에 너무 오래 빠져 있었으므로 적어도 한 번만은 현명해야 하리라. 그러나 만일 잠꼬대를 고집한다면, 우리는 그들과 작별하겠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죄는 모두 죽을죄라고 생각해야 한다. 죄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반역이며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하기 때문이다. 죄는 율법 위반이며, 여기에 대해서는 예외 없이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 성도의 죄는 용서를 받을 수 있으나 그것은 그들의 성도로서의 본성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로 용서를 받는 것이다.
결론
십계명의 준수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다. 모든 계명은 사랑으로 압축된다. 따라서 우리가 계명을 준수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말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이웃을 사랑하게 된다. 우리는 계명을 지키기에 노력하여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복을 누리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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