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직과 성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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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명직과 성결교회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들어가는 말

본문
Ⅰ. 이명직의 생애
Ⅱ. 이명직과 성결교 부흥 운동
Ⅲ. 이명직의 사중복음
1. 중생론
2. 신유론
3. 재림론
4. 성결론
Ⅳ. 성서 강해 : 1920년대 <활천>을 중심으로

나가는 말

본문내용

는 각각 전형적인 신앙인의 모습으로 보는데, 첫 번째 며느리 오르바는 육에 속한 신자의 모형이다. 그는 나오미와 함께 여호와를 섬겼을 것이나 신앙의 깊이에 들어가지 못하고, 자신의 과거를 벗어버리지 못했다. 결국 그는 자신의 고향 모압에 머물고 말았다. 하지만 룻은 영에 속한 신자의 모형으로, 현실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바라보고 시어머니와 가나안을 향해 떠났다. 룻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연합되고,.....그리스도의 신부가 된" 성결한 신자의 모형이다.
) 이명직, "로득(룻)기강의," <활천> 제35호, 1925년 10월, pp.30-31.
룻기의 핵심은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신부인 룻(성결한 신자)의 관계이다. 룻은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바로 보아스의 눈에 뜨인 것이다. 보아스는 하인에게 저 여자가 누구냐고 물었다. 여기에 대해 하인, 곧 하나님의 천사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모압과 같이 이단과 속화와 죄악이 많은 세상에서 회개하고 돌아와 일하는 자인데 곧 그 이름이 생명록에 기록된 아무로소이다 할지니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뇨?" "세상 사람의 눈에 잘 보이는 것보다 신랑되신 그리스도의 눈에 잘 보이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이 아닐가?"
) 이명직, "로득(룻)기강의," <활천> 제36호, 1925년 11월, pp.34.
이명직 목사는 룻이 다른 젊은 남자를 택하지 않고 보아스를 택한 것은 곧 룻이 육을 따는 사람이 아니라 약속을 따라 사는 영의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본다. 이런 룻에게 보아스는 "나중에 베풀 은혜가 처음 베푸는 은혜보다 크리로다"고 축복하였다. 여기서 나중에 베풀 은혜는 재림 예수가 베풀 은혜이다. "곧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공중과 천년시대에 당신의 신부에게 베푸실 은혜가 '처음에 베푼 은혜', 곧 현금에 우리 심령상으로 받은 은혜보다 클지니 현금은 언약이요, 소망이로되 장래의 은혜는 언약을 사실로 성취하는 때니라."
) 이명직, "로득(룻)기강의," <활천> 제38호, 1926년 1월, pp.28.
이것은 이명직의 전천년설적인 종말론에 의해 성서를 해석하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명직은 룻기에서 밭을 교회라고 이해하고 있으며, 밭에서 일하는 것을 주의 사역을 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룻이 신랑되신 그리스도의 눈에 뜨인 것은 주의 일터에서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며, 보아스(그리스도)는 이 밭에서 룻에게 풍성한 은혜를 약속하였다. 또한 보아스(그리스도)는 룻에게 다른 밭에 가서 일하지 말라고 말했는데(2:8), 이것은 그리스도의 세계가 아닌 이방의 세계를 지칭하는 말이라고 해석한다. 즉 복음을 버리고, 철학이나 문학이나 과학에 의지하지 말고, 오직 성서에 근거해서 일하라는 것이다.
) 이명직, "로득(룻)기강의," <활천> 제35호, 1925년 10월, pp.33, 35.
그러나 이명직은 룻기 강해에서 성서와 동양사상을 조화시켜 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것은 룻기 강해의 제목을 모압 여자 효부절녀(孝婦節女)라고 붙인데서 잘 나타난다. 이명직은 가능한 곳마다 롯을 효부로서 설명하고 있다. "룻은 비록 가난하나 어디까지든지 시어머니께 순종하여 오직 명령에 순종하였으니 윤리도덕이 쇠퇴한 이땅에 많은 교훈을 우리에게 보이도다."
) 이명직, "로득(룻)기강의," <활천> 제35호, 1925년 10월, pp.34.
하지만 이명직 목사는 룻기를 통해서 동양사상의 잘못된 것도 지적, 비판한다. 즉 나오미의 행동은 조선의 악습과 대비되는 행동이다.
전일 우리 조선에서는 아들없는 청상과부를 강압적으로 골방에 가두어 두고 수절을 시킴으로 그런 가정에서는 쌓인 불평과 맺힌 원한이 많았으며, 불상사도 많이 일어나게 되었도다. 이러한 사정을 두루 살핀 나오미는 그들을 완전히 해방하야 그 자유를 무리하게 박탈하지 아니하였도다.
) 이명직, "로득(룻)기강의," <활천> 제34호, 1925년 9월, pp.25.
나가는 말
이명직의 생애를 통해서 우리는 성결 교회의 여명기 곧 제1기 동양선교회 복음 전도관 시대부터 기독교 대한 성결교회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는 증인으로서가 아니라 주도적 역할을 담당해온 역사적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제 1,2차 성령의 체험으로 뜨겁게 무장된 신앙인으로서 반세기 이상을 성역에 헌신하였을 뿐만 아니라 성결교단의 산실이요 요람인 신학교가 오늘이 있기까지 그 기초를 공고히 하였다는 공로는 결코 비견할 수 없는 그의 인생의 값어치라 할 것이다. 곧 이명직은 한국 성결교회를 이룩한 기수요, 사부이며, 한국 교회의 지도자라고 할 수 있겠다.
참고 : 서울 신학 대학교 역사
) 서울 신학 대학교 홈 페이지 http://www.stui.net/
1. 성서학원시대 : 선교의 씨앗이 뿌려지다 1911. 3. 13~1930
1911. 3. 13 "성서학원 개교(서울 무교동에서) 제1대 원장 존 토마스씨 취임"
1919. 4. 제 2 대 원장 헤슬렙씨 취임
1920. 4. 제 3 대 원장 어네스트 길보른씨 취임
1921. 4. 충정로로 교사 신축 이전
1926. 4. 제 4 대 원장 웃스씨 취임
1929. 제 5 대 원장대리 이명직 목사 취임
1930 제 5 대 원장 이명직 목사 취임
2. 경성신학교시대 : 고난과 역경을 딛고… 1940.5.31~1953.4
1940. 5. 31. "경성신학교로 개칭(구제 전문학교령에 의한 4년제)
제1대 교장에 이명직 목사 취임"
1943. 12. 29. 일제의 탄압으로 교단 해체 및 폐교당함
1945. 11. 20. "조국 광복으로 개교, 서울신학교로 개칭제2대 교장에 이건목사취임"
1950. 6. 28. "6. 25동란으로 임시 휴교
제 2 대 교장에 이 건 목사 및 교수 다수 납북당함"
1950. 12. "부산으로 이전 하여 개교 제 3 대 교장에 이명직 목사 취임"
1953. 4. 서울로 환도하여 개교
3. 서울 신학 대학 시대 : 진리와 성결의 요람 1959. 2. 26~2002. 7. 6.
1959. 2. 26. "서울신학대학으로 인가(신학과 정원 200명)
제 1 대 학장에 이명직 박사 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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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10.17
  • 저작시기2005.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16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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