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후궁제도의 작위
2. 출신에 따른 후궁의 분류
1) 정식후궁
2) 궁관 출신의 후궁
3) 노비, 기생 출신의 후궁
3. 후궁의 삶과 죽음
※내명부
4. 조선시대 여인들과 권력
1) 장희빈
2) 장록수
3) 폐비 윤씨
5. 중국의 후궁
2. 출신에 따른 후궁의 분류
1) 정식후궁
2) 궁관 출신의 후궁
3) 노비, 기생 출신의 후궁
3. 후궁의 삶과 죽음
※내명부
4. 조선시대 여인들과 권력
1) 장희빈
2) 장록수
3) 폐비 윤씨
5. 중국의 후궁
본문내용
세했다.
그 때문에 성종은 일부 중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윤씨를 폐비시키고 말았다. 사가로 폐출된 윤씨의 수난은 단순히 서인으로 전락한 것에 그치지 않았다. 폐출 된 지 3년이 지난 1482년 왕자 연산군을 세자에 책봉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자 조정 대신들 간에는 폐비 윤씨에 대한 동정론이 대두되었는데, 이것은 오히려 윤씨의 명줄을 재촉하는 결과를 낳았다.
폐비 윤씨가 왕위를 이을 세자의 어머니이기에 결코 사가에 방치해서는 안된 다는 윤씨의 동정론에 위기를 느낀 인수대비는 몇몇의 후궁들과 모의를 하여 그녀를 더욱 위기상황으로 몰아넣었다. 윤씨의 동정론이 대두되자 성종은 내시와 궁녀들을 시켜 그녀의 동정을 살펴오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들 나인들과 내시들은 인수대비의 명에 따라 왕에게 폐비 윤씨가 전혀 반성의 빛을 보이지 않는다고 허위 보고를 하였다. 성종은 이 말을 듣고 대신들에게 폐비 윤씨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게 하여 사약을 내리기로 결정하고 그녀를 사사하였다. 사사한 이후 폐비 윤씨의 묘에는 묘비도 세우지 않았다. 하지만 성종은 세자의 앞날을 고려해 '윤씨지묘'라는 묘비명을 내렸다. 그리고 장단도호부사로 하여금 절기마다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성종은 자신이 죽은 뒤 100년까지는 폐비 문제에 관해 논하지 말라는 유명을 남겼다. 그러나 연산군은 이를 어기고 결국 갑자사화를 일으키고 말았다.
5. 중국의 후궁
한국에서는 특히 임금의 첩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원래 중국 천자(황제)가 거처하는 궁중의 전전 뒤에 있는 깊숙한 부분이라는 뜻으로, 이슬람세계의 하렘(금단의 장소)과 유사하다.
중국 천자의 궁성은 외조와 내정으로 확연히 구분되어 있는데, 외조는 천자가 주권자로서 백관을 접견하고 정치를 주제하며 의식을 행하는 장소로 되어 있다. 반면 내정은 천자가 한 집안의 주인으로서 황후 이하의 부녀와 미성년의 아이들 및 환관(宦官) 등과 함께 개인적인 가정생활을 보내는 장소이다. 이 내정이 후궁으로, 그 구성인원은 여자가 다수를 점하므로 이 궁중의 여자들도 후궁이라 지칭하게 되었다.
청나라 때의 베이징 궁성에서는 건청문이 내정과 외조와의 경계를 이루어, 환관이 이 밖으로 나가거나, 관료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금하였다.
중국은 고래로 일부다처제로 내려와, 처첩의 수는 신분이 높은 자일수록 많음은 유교에서도 공인되어 있었다. 주공이 제정하였다고 전하는 《주례(周禮)》에 따르면, 천자는 1명의 후(后) 외에 3부인, 9빈, 27세부, 81여어 등 모두 121명의 처첩을 둘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후세의 천자인 경우는 이에 그치지 않고 백낙천이 당나라 현종을 노래한 《장한가(長恨歌)》에서 후궁가려삼천인이라 읊은 바와 같이 많은 여인을 후궁에 두었다. 《진서(陳書)》에 총경후궁이라 한 것처럼 천자의 총애는 정처인 후(后)보다는 첩인 3부인(三夫人:貴妃 ·貴嬪 ·貴人) 이하의 여인들에게 기울어져, 후궁이라는 말은 거처하는 장소나, 후(后)를 포함한 천자가 거느렸던 모든 여인을 뜻하기보다는, 천자 또는 임금의 첩을 지칭하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천자가 궁중에 처첩을 많이 두는 것은 그 후사를 얻음을 명목으로 하였으나, 실제로는 천자가 여색에 빠져서 건강을 해쳐 정치를 혼란에 빠뜨리고, 한 왕조의 말기에는 천자가 후계자를 얻지 못하고 일찍 죽는 것과 같은 역효과를 빚기도 하였다. 후궁에서의 연락 때문에 정치를 망친 천자의 예는 적지 않으나, 그 가운데에서도 한의 성제, 진의 후주, 수의 양제가 꼽히는데, 후궁 양귀비에게 빠져 안녹산의 난을 만나 황제 자리를 빼앗긴 당나라 현종의 예는 특히 유명하다.
참고 자료 - http://www.naver.com/
그 때문에 성종은 일부 중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윤씨를 폐비시키고 말았다. 사가로 폐출된 윤씨의 수난은 단순히 서인으로 전락한 것에 그치지 않았다. 폐출 된 지 3년이 지난 1482년 왕자 연산군을 세자에 책봉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자 조정 대신들 간에는 폐비 윤씨에 대한 동정론이 대두되었는데, 이것은 오히려 윤씨의 명줄을 재촉하는 결과를 낳았다.
폐비 윤씨가 왕위를 이을 세자의 어머니이기에 결코 사가에 방치해서는 안된 다는 윤씨의 동정론에 위기를 느낀 인수대비는 몇몇의 후궁들과 모의를 하여 그녀를 더욱 위기상황으로 몰아넣었다. 윤씨의 동정론이 대두되자 성종은 내시와 궁녀들을 시켜 그녀의 동정을 살펴오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들 나인들과 내시들은 인수대비의 명에 따라 왕에게 폐비 윤씨가 전혀 반성의 빛을 보이지 않는다고 허위 보고를 하였다. 성종은 이 말을 듣고 대신들에게 폐비 윤씨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게 하여 사약을 내리기로 결정하고 그녀를 사사하였다. 사사한 이후 폐비 윤씨의 묘에는 묘비도 세우지 않았다. 하지만 성종은 세자의 앞날을 고려해 '윤씨지묘'라는 묘비명을 내렸다. 그리고 장단도호부사로 하여금 절기마다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성종은 자신이 죽은 뒤 100년까지는 폐비 문제에 관해 논하지 말라는 유명을 남겼다. 그러나 연산군은 이를 어기고 결국 갑자사화를 일으키고 말았다.
5. 중국의 후궁
한국에서는 특히 임금의 첩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원래 중국 천자(황제)가 거처하는 궁중의 전전 뒤에 있는 깊숙한 부분이라는 뜻으로, 이슬람세계의 하렘(금단의 장소)과 유사하다.
중국 천자의 궁성은 외조와 내정으로 확연히 구분되어 있는데, 외조는 천자가 주권자로서 백관을 접견하고 정치를 주제하며 의식을 행하는 장소로 되어 있다. 반면 내정은 천자가 한 집안의 주인으로서 황후 이하의 부녀와 미성년의 아이들 및 환관(宦官) 등과 함께 개인적인 가정생활을 보내는 장소이다. 이 내정이 후궁으로, 그 구성인원은 여자가 다수를 점하므로 이 궁중의 여자들도 후궁이라 지칭하게 되었다.
청나라 때의 베이징 궁성에서는 건청문이 내정과 외조와의 경계를 이루어, 환관이 이 밖으로 나가거나, 관료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금하였다.
중국은 고래로 일부다처제로 내려와, 처첩의 수는 신분이 높은 자일수록 많음은 유교에서도 공인되어 있었다. 주공이 제정하였다고 전하는 《주례(周禮)》에 따르면, 천자는 1명의 후(后) 외에 3부인, 9빈, 27세부, 81여어 등 모두 121명의 처첩을 둘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후세의 천자인 경우는 이에 그치지 않고 백낙천이 당나라 현종을 노래한 《장한가(長恨歌)》에서 후궁가려삼천인이라 읊은 바와 같이 많은 여인을 후궁에 두었다. 《진서(陳書)》에 총경후궁이라 한 것처럼 천자의 총애는 정처인 후(后)보다는 첩인 3부인(三夫人:貴妃 ·貴嬪 ·貴人) 이하의 여인들에게 기울어져, 후궁이라는 말은 거처하는 장소나, 후(后)를 포함한 천자가 거느렸던 모든 여인을 뜻하기보다는, 천자 또는 임금의 첩을 지칭하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천자가 궁중에 처첩을 많이 두는 것은 그 후사를 얻음을 명목으로 하였으나, 실제로는 천자가 여색에 빠져서 건강을 해쳐 정치를 혼란에 빠뜨리고, 한 왕조의 말기에는 천자가 후계자를 얻지 못하고 일찍 죽는 것과 같은 역효과를 빚기도 하였다. 후궁에서의 연락 때문에 정치를 망친 천자의 예는 적지 않으나, 그 가운데에서도 한의 성제, 진의 후주, 수의 양제가 꼽히는데, 후궁 양귀비에게 빠져 안녹산의 난을 만나 황제 자리를 빼앗긴 당나라 현종의 예는 특히 유명하다.
참고 자료 - http://www.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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