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의 혁명 4.19에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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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배경

2, 전개과정

본문내용

다.
한편 그동안 국가권력의 지배 속에서 아무런 저항의 움직임도 보이지 못하던 사회 제영역에서 민주화와 개혁을 추진하는 '운동'이 진행되었다. 학생들은 학원의 민주화, 부패척결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노동계에서는 어용 대한노총을 탈퇴하여 자주적인 노조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이 대구를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따라서 대한노총의 기능은 사실상 정지되었다. 국가기구 내부에서는 경찰의 중립화, 정치에 예속된 사법기구의 혁신을 주창하였다. 군대 내에서는 이승만 정권의 수족 노릇을 해온 부패한 군 지도부의 퇴진을 요구하는 정군운동이 시작되었다. 이와 더불어 이승만 집권기간에 벌어진 각종 비리나 의혹사건을 규명하려는 움직임도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거창양민학살사건의 규명을 위한 움직임, 산청함양남원화순구례 등지의 양민학살 폭로, 당시 거창군 신원면 면장이었던 박영보의 생화장사건(5월 11일) 등이 그것들이다.
3) 제3단계 : 729총선에서 516 이전까지
① 민주화 운동 : 장면 정권이 이른바 2대 악법(반공임시특례법데모규제법)을 제정에 대한 반대 투쟁
②자주화 운동 : 한미경제협정 반대운동. 이른바 28한미경제협정의 체결사실이 알려지자, 이것이 한국의 자주성을 상당히 훼손시킨 불평등한 조약이라는 것을 느낀 학생세력은 '전국한미경제협정 반대투쟁위원회'를 결성한 후 성토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운동은 물론 민통련 등 진보적 학생조직을 중심으로 이루어 진 것이었다.
③통일운동 : 통일운동은 1960년 중반 이후의 통일논의와 민족통일연맹(민통련)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 등의 조직결성을 토대로 1961년 4월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통일논의는 1960년 중반 이후 기성학자, 정치가들에 의해 많이 제기되었지만, 이것을 운동의 차원으로 실질적으로 추진한 세력은 학생들이었고 민자통 등 재야민주화운동세력은 이를 이념적으로 지원하는 역할을 하였다. 방학기간중 충분한 내부토론을 거친 학생운동 지도부는 개학과 더불어 학생들에게 여론조사를 실시하여, 통일운동의 가능성을 타진한 이후 419 기념행사를 개최하면서 통일운동을 추진할 것을 공식적으로 천명하였다. 5월 3일 서울대 민통련 대의원대회에서 남북학생회담을 제의하는 결의문이 채택되었고, 5월 5일에는 민족통일 전국학생연맹 준비회의가 개최된 자리에서 재차 결의문과 공동선언문이 채택되었으며, 5월 13일에는 민자통 주최의 대규모 '남북학생회담환영 통일촉진궐기대회'가 개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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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11.15
  • 저작시기2005.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2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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