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공화국에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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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제 1절 서론-

-제2절 신군부의 등장과 광주민중항쟁-

-제3절 신군부의 정권장악과 야권의 대응-

-제4절 폭압통치하의 민주화운동-

본문내용

인 지지를 얻고 있었다. 그 와중에 전정권의 대탄압으로 이한열군의 희생을 가져온 또 다른 사건이 발생하였다. 최루탄을 맞아 의식불명으로 있다가 사망한것이다. 개헌 공방이 더욱 고조될 때 민정당은 4·13 조치에 따른 후속조처로 현행 헌법에 의한 대통령 선거의 기본전략을 이행하였다. 그리고 태통령 후보로 노태우 민정당 대표를 선출하였다. 그러나 6월 10일 집권여당의 대통령 후보자 선출과 때를 같이 하여 야당인 통일 민주당과 재야 등 국민운동본부는 전국 주요도시에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과 호헌철폐에 대한 규탄대회‘를 강행하였다. 이들은 항쟁을 계속 하고 정부여당은 탄압정책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6월 18일을 최루탄 추방운동시기로 설정하였다. 또한 민주당은 6·10대회를 통해 민심이 현정권을 떠났다고 평가하면서 범국민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할 것을 결정하였다. 미국의 유력지들도 한국의 반정부시위를 톱기사로 보도했다. 그리고 6월 18일에는 전국 16개 지역에서 150만명이 참여한 가운데 일제히 최루탄 추방을 위한 범국민 투쟁시위가 있었다 시위는 계속되어 대중투쟁의 승리 가능성을 불러 일으켰다. 그 와중에 정부 여당은 경찰력 만으로 항쟁을 막을수 없다 하여 군부개입을 생각한다. 하지만 6월 29일 노태우 민정당 대표는 8개항의 특별선언을 발표하였다. 7월1일 전대통령은 노대표의 8개항을 전폭 수용하는 특별담화를 발표하여 6월항쟁의 민주화 결실을 인정했다. 여권이 6·29선언을 한 대표적 이유는 6·10이후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범국민적 민주화 운동에 군부개입을 통해 제압할 자신감이 서지 않았으니, 이는 제 2의 광주항쟁을 우려한 것과 미국의 평화적 해결촉구가 부담이 되었기 때문이다. 6·29 개헌으로 개헌 공방에 진력했던 여야간의 대립은 화해쪽으로 전향되었다. 정부는 7월 9일 김대중을 포함한 2,335명의 시국 사범을 사면 및 복권 시켰고 김대중은 7년만에 정치인으로서 역할을 할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대통령 직선제에 대한 개헌안이 국회에서 통과 됐고 93%의 찬성을 얻어 헌법으로 확정되었다. 6·29 직후의 민주화 운동은 노동자 계급의 대투쟁에서 비롯된다. 6월 민중 항쟁을 계기로 7,8월 노동자의 대투쟁으로 발현되게 되었다. 노동자 측의 투쟁과 정부의 경찰투입으로 노종자 대투쟁은 본격화 되었다. 당시 강력한 공권력 개입과 언론의 정부측 편파보도로 9월 10일 전후로 노동자 투쟁의 열기가 급속히 냉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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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11.16
  • 저작시기2005.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2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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