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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페인 자신은 초월적인 존재를 믿고 이신론자(理神論者)로서 단지 기존 종교에 반대할 뿐이라고 밝혔으나, 이 책으로 인해 정통파 사이에서 무신론자라는 평을 받았다. 최후의 중요한 소책자 〈토지 분배의 정의 Agrarian Justice〉(1797)에서 재산 소유의 불평등을 공격해 기득권층에 더 많은 적을 만들었다.
페인은 1802년 9월 1일까지 프랑스에 머무르다가 미국으로 향했다. 그는 곧 미국을 위해 애쓴 자신의 노력은 모두 잊혀졌고 자신은 단지 세계 최고의 이단자로 여겨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습관적 음주로 건강은 더욱 악화되고 가난에 시달렸지만 그는 계속해서 특권과 종교적 미신을 공격했다. 그는 1809년 뉴욕 시에서 죽었으며, 혁명적인 글을 쓴 대가로 뉴욕 주정부에서 하사한 뉴로셸 농장에 묻혔다. 10년 후 정치 저널리스트 윌리엄 코벳이 그의 유해를 잉글랜드로 가져갔다. 코벳은 인류에 대한 페인의 지대한 공로에 걸맞는 장례식을 치르려 했으나 계획은 실패하고 유골은 분실되어 다시 찾지 못했다.
그에 대한 후대의 평가
페인이 죽자 미국 신문 대부분이 〈뉴욕 시티즌 New York Citizen〉에 실린 사망기사를 옮겨 실었다. 그 내용의 일부인 "그는 약간의 선행과 많은 해악을 끼치면서 오래 살았다"라는 평가가 사후 100여 년 동안 역사의 심판을 기다리며 남아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 견해가 바뀌어 1937년 1월 30일자 런던의 〈타임즈 The Times〉는 그를 가리켜 '영국의 볼테르'라고 했고, 1952년 5월 18일 뉴욕대학교 영예의 전당에 그의 흉상이 놓였다.
P. S. Foner 글
페인은 1802년 9월 1일까지 프랑스에 머무르다가 미국으로 향했다. 그는 곧 미국을 위해 애쓴 자신의 노력은 모두 잊혀졌고 자신은 단지 세계 최고의 이단자로 여겨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습관적 음주로 건강은 더욱 악화되고 가난에 시달렸지만 그는 계속해서 특권과 종교적 미신을 공격했다. 그는 1809년 뉴욕 시에서 죽었으며, 혁명적인 글을 쓴 대가로 뉴욕 주정부에서 하사한 뉴로셸 농장에 묻혔다. 10년 후 정치 저널리스트 윌리엄 코벳이 그의 유해를 잉글랜드로 가져갔다. 코벳은 인류에 대한 페인의 지대한 공로에 걸맞는 장례식을 치르려 했으나 계획은 실패하고 유골은 분실되어 다시 찾지 못했다.
그에 대한 후대의 평가
페인이 죽자 미국 신문 대부분이 〈뉴욕 시티즌 New York Citizen〉에 실린 사망기사를 옮겨 실었다. 그 내용의 일부인 "그는 약간의 선행과 많은 해악을 끼치면서 오래 살았다"라는 평가가 사후 100여 년 동안 역사의 심판을 기다리며 남아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 견해가 바뀌어 1937년 1월 30일자 런던의 〈타임즈 The Times〉는 그를 가리켜 '영국의 볼테르'라고 했고, 1952년 5월 18일 뉴욕대학교 영예의 전당에 그의 흉상이 놓였다.
P. S. Foner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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