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희와 작품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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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박영희와 작품세계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박영희의 생애와 성격

2. 유미주의와 박영희

3. 카프계열의 박영희

4. 카프 탈퇴와 박영희

5. 박영희의 전향

6. 박영희의 친일문학기

7. 결말

본문내용

시기가 빠를수록 좋다는 것이다. 그리고 할 바에는 먼저 해서 생색을 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조선 사람의 특권을 얻어내야 한다고 했다.
---백철, {문학자서전}, 박영사
그해 10월에 보고 ‘서인전선기행’을 수필로 엮어낸다. 게다가 1939년 10월 29일에 결성된 조선 문인 협회의 간사로 피선되며 1941년 8월 12일자로 간사장이 된다. 1941년 1월에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위원, 그 해 12월에 황도학회발기인 48명 중 하나가 되며 8명의 이사 가운데 1인으로 피선된다. 1941년 8월에 삼천리사 주최의 임전대책협의회에 참가하며 조선임전보국관의 평의원으로 선임되었다. 1942년 12월4일 동경에서 개최된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이광수 등과 함께 대표로 참석하였으며 1943년 4월 17일 결성된 조선문인보국회의 총무국장에 피선된 뒤 1945년 8월 1일, 임원개편에 따라 평론부회장에 피선된다.
㈁ 친일작품
『인문평론』 전쟁특집호에 실린 「전쟁과 조선문학」(1939. 10), {매일신보}에 실린 「국민문학의 건설」(1940. 1. 1), 「문장보국의 의의」(1940. 4. 25), 「문학운동의 전시체제」(1940. 7. 6), 「포연 속의 문학」(1940. 8. 15-20), 「신체제를 맞는 문학」(1940. 11. 6-7), 「국가이상의문학」(1941. 1. 1), 「문학의 새로운 과제」(1941. 4. 11-15), 「국민적 신문화의 제안」(1941. 7. 6), 「대동아문학자대회 출석을 앞두고」(1942. 10. 29), 그리고 {국민문학}에 실린 「임전체제하의 문학과 문학의 임전체제」(1941. 11. 일문) 등이 그것이다. 이들 글은 이미 제목에서 당시 일제가 친일단체를 통해 의도하고자 했던 바를 느낄 수 있다.
㈂ 요시무라 고도
박영희는 요시무라 고도(芳村香道)라고 누구보다도 빨리 창씨 개명하여 이를 필명으로까지 사용함으로써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 이광수와 여러모로 유사한 점을 보여 준다. 친일단체의 감투를 많이 둘러쓰고 있었다는 점이나 각종 친일행사의 단골손님이었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무엇보다 창씨 개명한 방식에서도 그러하다. 대부분 어쩔 수 없이 창씨 개명한 경우 한 자를 추가하거나 성씨를 두 자로 분리하는 방식을 취했는데, 이들은 성과 이름자를 전부 바꾸어 버렸다. 백철에 따르면, 필명에까지 창씨 개명한 이름을 사용한 이유를 박영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가 하라고 하니까 호적의 이름은 개명할 수밖에 없다 해도 글을 쓰는 데까지 '요시무라 고도'(芳村香道)라고 써야 하느냐고 했더니 회월은 한참 생각하고 나서 "그야 누가 오랫동안 쓰던 자기 필명을 버리고 싶겠소. 하지만 이름 하나 고집하다가 큰 오해를 당하면 어떻게 하겠오, 이런 판국에..." 하고 대답을 해서 우리는 다시 더 말을 계속하지 않았다.
---백철, {문학자서전}, 박영사
㈃ 해방 후
그러나 자신의 친일행각을 감출 사이도 없이 밀어닥친 해방 때문에 회월은 발 빠르게 과거의 행적을 점검해야 했다. 그의 발 빠른 행동은 초창기의 문단측면사와 현대조선문학사를 집필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나의 30년 동안의 문단생활은 현대조선역상운명과 더불어 실로 기구하였다. 일정시대의 말기에는 나는 지필을 내어던진 채 7,8년의 세월을 헛되이 보내고 말었다. 나는 이렇게 무료히 지나가는 동안자기의 길을 문학사를 초하려는 데서 발견하려고 하였다. 그리 하여 틈틈이 자료도 정리도 하여 보았으나 이것조차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형로에 내 자신이 있게 됨을 알게 될 때 나는 하는 수없이 이것조차 중지하고 말았다가 815를 당하게 되자 자유와 여가를 살리기 위하여 또 다시 펜을 잡았다. (중략) 우리는 이 새로운 출발에 앞서서 과거 40년 동안의 조선 문학을 정당히 이해하며 또 그 걸어온 자취에서 현재와 미래의 고귀한 전통을 만들기 위하야 현대조선문학사가 시급히 요청되고 있는 사실에 비추어 새로이 내게 부여된 자유와 희망가운데서 남조선현대문학사를 기초할 의욕은 더욱 굳어졌다. ---현대조선문학사
그리고 해방 후 보도연맹 사무국장이 되어 사상전향자 또는 좌익사상자들의 전향을 위해 활동하는 일도 한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속죄양의식은 일종의 자아비판 글로 나타낸 전자의 것이다. 그러나 초창기의 문단 측면사나 현대조선문학사에는 자신의 친일 행위에 대한 단 한 마디의 언급도 없다.
Ⅵ. 납북
광복이후 과거 친일경력을 가진 박영희는 민족 반역자 명단에 올라가게 되며 이러한 친일시비와 좌우익의 혼란을 피해 강원도 춘천으로 낙향, 춘천중학 국어교사를 지내며 시 산가 연작10편과 ‘우리 동네는 가난한 마을’을 지으며 소일하게 된다. 다시 서울로 돌아온 그는 최후의 역작「현대조선문학사」(1948)를 탈고, 백철과 김진구의 도움을 얻어 10회에 걸쳐 「사상계」에 연재하는 한편, 정백과 같이 보도연맹 선도위원으로 활약하며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학대, 홍익대 등에서 국문학사 강의를 맡게 된다. 1950년 6.25가 발발, 7월 초순쯤 부친에게서 피난자금 1만원을 갖고 서울을 떠났으나 노상에서 체포되어 서대문교도소로 끌려간 뒤 납북, 지금까지 생사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Ⅶ. 결론
--카프의 우두머리에서 ‘요시무라 고도’ 까지...
우리는 이번 발표를 준비하면서 친일파로만 알았던 박영희의 말할 수 없는 그 만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민족운동의 선두주자였던 그가 남보다 확실한 친일 행각을 보였던 것은 비판 받아 마땅한 일이다. 하지만 당시의 사회 분위기와 인간으로서 생존의 위협을 느껴보지 못한 우리는 그의 행동을 입장 바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도 한 명의 인간이고 한 어머니의 아들이었다. 막다른 길에 섰을 때, 그는 본능적으로 목숨을 가장 먼저 생각하게 되었고, 자신이 부양해야 하는 가족,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는 어머니께 실망시켜 드릴 수 없었다. 우리가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대로 돌아간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박영희와 같은 길을 갈 수도 있는 일이다. 문인의 길을 걷던 그에게 민족운동은 피할 수 없는 사명이었고 또한 친일은 운명이었다. 그것을 알기에 우리는 박영희를 예전보다 더 가깝게 느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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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9페이지
  • 등록일2006.01.05
  • 저작시기2006.0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31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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