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선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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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국의 선왕들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목차
Ⅰ.堯舜시대
ⅰ.요(堯)
ⅱ.순(舜)

Ⅱ.夏나라
ⅰ.우(禹)
ⅱ. 이계(履癸), 걸왕(桀王)

Ⅲ. 商(殷)나라
ⅰ.설
ⅱ.설에서부터 탕(湯)까지의 계보
ⅲ.성탕(成湯)
ⅳ.신제(辛帝), 주제(紂帝)

Ⅳ. 周나라
ⅰ.주(周)의 시조 후직(后稷)
ⅱ.후직에서부터 고공단보까지의 계보
ⅲ.고공단보(古公亶父)
ⅳ.문왕(文王), 서백 창(西伯 昌)
ⅴ.무왕 발(武王 發)

Ⅵ. 주공

본문내용

말하였다. 이에 문왕이 남긴 뜻을 받들어 융거(戎車) 300대와 용사 3000명, 갑사(甲士) 45000명을 이끌고동으로 가서 주(紂)를 정벌했다. 11년 12월 무오일에 군사들이 모두 맹진을 넘었고 제후들이 전부 모였다. 그들은 게으름 피우지 말고 열심히 싸우자고 다짐하였다. 무왕은 곧 태서(太誓)를 지어 많은 병사들에게 고하였다. "지금 은나라의 왕 주는 단지 자기 부인(달기)의 말만 듣고 스스로 천명을 끊었으며, 삼정을 훼손하게 하고 그의 왕부모제를 멀리하였고, 마침내 선조의 음악을 저버리고 음란한 노래를 만들어 올바른 소리를 어지럽혀 자기 부인만 기쁘게 하였소. 이에 이 사람 발은 삼가 천벌을 집해하려고 하오. 그대들이여, 노력합시다! 두 번 세 번 다시 행하지 않도록!"
2월 갑자일의 동틀 무렵, 무왕은 아침 일찍 상나라 교외의 목야에 이르러 맹세하였다. 무왕은 왼손에 황색 도끼를 쥐고 오른손에 흰색의 모를 들고 지휘하며 말하였다. "멀리서도 와주었소, 서토(西土)의 사람들이여! 자 나의 제후들이여! 사도, 사마, 사공, 아려, 사씨, 천부장, 백부장, 그리고 용, 촉, 강, 모, 미, 노, 팽, 복의 사람들이여! 그대들의 창을 높이 들고 방패를 줄마추고 창을 치켜드시오! 선서하겠소."라고 하며 선서하였다.
선서가 끝나자 집결한 제후들은 전거(戰車)가 4000대였고, 그들은 교외의 넓은 들에 도열하였다.
주(紂)는 무왕이 왔다는 소리를 듣고, 70만 명의 군사를 파견하여 무왕에 대항하게 했다. 무왕은 사상보에게 100명의 용사를 이끌고 치사(도발)하게 하고 대졸을 주의 대오로 돌격하게 했다. 주의 군대가 비록 수는 많았지만 모두 싸울 마음이 없었다. 그들은 무왕이 빨리 쳐들어오기를 바라고 있었으므로 주의 군사들은 도병(창을 거꾸로 하는 것)하여 싸우면서 무왕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무왕이 돌격하자 주의 병사는 모두 무너지고, 그들은 주를 배반했다. 주는 성으로 다시 도망쳐들어가서 녹대에 올라 보석이 박힌 옷을 뒤집어 쓰고 불 속에 뛰어들어 타죽었다. 무왕이 커다란 백기를 들고 제후들을 지휘하니 제후들이 모두 무왕에게 절하였고, 무왕이 제후들에게 읍(揖)하자 제후들이 모두 그를 따랐다. 무왕이 상나라의 도성에 이르자, 상나라의 백성들은 모두 교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무왕은 군신들로 하여금 상의 백성들에게 "하늘이 행복을 내려주었도다"라고 말하게 하였다. 상나라의 사람들이 모두 재배하며 머리를 땅에 조아리자, 무왕 역시 답례했다. 무왕은 드디어 성으로 들어가서 주가 죽은 장소에 이르렀다. 그는 직접 주의 시신을 향해서 화살 세발을 쏜 후, 마차에서 내려서 경검으로 시신을 치고 황색 도낄로 주의 머리를 베어 커다란 백기에 매달았다. 다시 주의 애첩인 두 여자를 찾아가니, 두 여자는 모두 이미 목을 매어 자살한 뒤였다. 무왕은 또 화살 세 발을 쏴 검으로 치고 흑색 도끼로 목을 베어 작은 백기에 매달았다. 그리고는 무왕은 성을 나와서 다시 군대로 돌아갔다.
Ⅵ. 주공
BC 12세기에 활동한 중국의 정치가.
성은 희(姬), 이름은 단(旦). 주(周 : BC 1111경~255) 초기에 국가의 기반을 다졌다. 공자는 그를 후세의 중국 황제들과 대신들이 모범으로 삼아야 할 인물로 격찬했다.
주공은 주를 창건한 무왕(武王)의 동생으로 무왕의 권력 강화를 도왔다. 무왕이 죽자 직접 왕권을 장악하라는 주변의 유혹을 뿌리치고 대신 무왕의 어린 아들 성왕(成王)을 보좌하는 길을 택했다. 그후 성왕에게 통치기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주공이 섭정직에 오르자마자 그의 세 동생 관(管)·채(蔡)·곽()과 몰락한 은(殷)의 후계자 무경(武庚)이 이끄는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 그는 반란을 진압했으며 또한 몇 차례의 정벌에 나서 황허 강[黃河] 유역의 화베이[華北] 평원 대부분을 주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그리고 지금의 허난 성[河南省] 뤄양[洛陽] 근처에 제국의 동쪽 지역을 관할하기 위한 동도(東都)를 세웠다.
그는 은이 통치하던 지역에 대한 은의 지배를 완전히 뿌리뽑고, 정복한 지역에 새로운 행정단위를 설치하여 믿을 만한 주의 관리들이 이 지역을 다스리게 했다. 7년 동안 섭정한 후 스스로 자신의 지위에서 물러날 때쯤에는 주의 정치·사회 제도가 중국 북부 전역에 걸쳐 확고히 수립되었다. 그가 확립한 행정조직은 후대 중국 왕조들의 모범이 되었다. 공자는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주공을 대단히 숭배하여 한때는 "오랫동안 주공을 꿈에서 보지 못한 것을 보니 정말로 내가 허약해지고 늙은 것 같다"라고 했다. 중국 고전의 하나인 〈주례 周禮〉의 저자가 주공인 것으로 잘못 여겨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독선기신
다른 사람은 어떻든 자신이 힘든 것만 생각하여 오로지 자신 한 몸의 안일만을 위해 사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맹자(孟子)》 〈진심장구상(盡心章句上)〉 '맹자위송구천장(孟子謂宋句踐章)'에 나온다.
맹자가 세객(說客) 송구천(宋句踐)에게, 유세할 때는 남이 알아주거나 알아주지 않거나 항상 의연해야 한다고 말하자 송구천이 어떻게 해야 의연할 수 있는지 물었다. 다음은 그에 대한 맹자의 대답이다.
"덕을 존중하고 의(義)를 즐기면 자연히 의연해질 수 있소. 그런 까닭에 선비는 곤궁해져도 의를 잃지 않고, 잘 되어도 도(道)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오. 곤궁해도 의를 잃지 않는 까닭에 선비는 자기 자신을 유지할 수 있고, 잘 되어도 도를 벗어나지 않는 까닭에 백성들이 실망하지 않는 것이오. 옛 사람들은 뜻을 얻으면 백성들에게 은택을 더하였고, 뜻을 얻지 못하면 자신의 몸을 닦아 세상에 드러냈소. 곤궁해지면 홀로 자신의 몸을 선하게 하고, 잘 되면 겸하여 천하를 선하게 하였소(窮則獨善其身 達則兼善天下)."
독선기신은 위의 '궁즉독선기신'에서 따온 것이다. 원래는, 곤궁할 때에는 홀로 선을 행하면서 자신을 수양한다는 긍정적인 의미였으나, 뒤에 자신 한 몸의 편안함만을 꾀한다는 부정적 의미로 바뀌었다. 자신의 것만 중히 여기고 남의 것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뜻의 속담 '내 돈 서 푼은 알아도 남의 돈 칠 푼은 모른다', '남의 염병이 내 고뿔(감기)만 못하다'도 이와 비슷한 말이다.

키워드

선왕,   중국,   역사,   요순,   하나라,   은나라,   주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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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1.07
  • 저작시기20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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