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을 위한 인간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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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기독교인을 위한 인간학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제 1장. 인간과 실재성
별도 연구:주관-객관과 주관-주관의 관계성

제 2장.인간의 실재성과 "너"

제 3장.실재성 이해의 열쇠로서 "너"에 대한 연구
별도 연구: 부버의 "나와 너"
별도 연구: 에브너의 "너"와 생명의 언어와의 관계

제 4장. 결론-"상대"의 실재성과 언어의 관계성

본문내용

. 인간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에게 자신을 드러내어 말을 거는 행위이다. 기도란 말하자면 "상대"를 구하는 나의 "말"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상대"가 나에게 말해주기를 바라면서 내가 "상대"에게 말을 거는 행위이다. 자신이 스스로 주격이 될 수 없음을 스스로 발견하면서 "상대"가 나에게서 주격으로 임하기를 구하는 말이 기도인 것이다. 따라서 기도에는 어떤 형태이든지 자신을 "상대"에게 포기하는 결단이 들어있다.
그런데 내가 "상대"를 만나지 못하는 것은 주관주의로 나아가며, 이데올로기로 향하기 때문이다. 주관주의란 "상대"가 주격으로 서야하는 자리에 내가 스스로 주격으로 서는 것 즉 "상대"를 향해 내가 나 자신을 폐쇄하고 자기의 말로 확고하게 세우는 행위를 말하며, 이데올로기란 주관주의가 절대화된 형태인데 이것은 "상대"를 부정하고 나 자신을 절대적인 "말"로 확고하게 세우는 행위에서 기인되는 말이다.
나와 "상대"가 "나와 너"의 관계로 만날 때 "상대"는 "말 걸면서 듣는 주관"이 되고 나는 "응답하면서 말 거는 주관"이 된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계시와 신앙의 관계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은 계시하는 자로서 자신을 드러내시고 인간은 하나님으로 인해 자신이 드러난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은 빛이시고 인간은 빛으로 인해 자신을 발견하는 존재인 것이다. 계시란 빛이고 신앙이란 계시가 임하는 하나의 장소인 것이다. 기도란 이런 관계를 반영하는 언어로서 주관성의 언어인 셈이다.
설교란 자기를 선포하는 하나님의 선포를 인간의 말로 바꾸어서 말하는 것을 뜻한다. 객관화 될 수 없는 하나님의 자기선포를 설교자가 객관화 시켜 의사소통의 수단을 통해 전달하는 것이다. 설교를 통해 계산될 수 없고 사유될 수 없는 생명이 계산되고 사유될 수 있는 것으로 전달되는 것이다. 설교란 인간이 결코 사유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자기선포가 하나의 사유될 수 있는 문장의 형태로 전달되는 것을 의미한다. 설교는 인위적인 많은 문장을 가지고 바로 그 유일한 "말"을 드러내는 과제를 가지고 있다. 설교자는 세계 안세서 하나님의 자기선포를 매개하기 때문에 그가 나타내는 문장은 세상적 문장이다. 하나님의 자기선포는 순수하지만 불가피하게 세계를 반영하는 문장을 통해 나타난다. 그러니까 설교자가 가지는 세상에 의해 하나님의 자기가 선포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순수한 자기선포는 말하자면 순수하지 못한 세상의 문장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선포는 절대적이지만 설교는 절대적이지 않다. 그것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으며 사람에 따라 다양하게 발휘될 수 있다.
설교는 세상적인 문장을 가지고 하나님이 자신을 선포하시고 듣는 자들이 신앙으로 "나를 향한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관계를 의미한다. 설교에서 말씀과 실존이 인격적으로 관계하기 때문에 인간의 객관성을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가지는 객관성이 왜곡될 수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객관주의이며 이를 잘 나타내는 것은 학문이다. 학문이란 합리적인 논리로 내가 "상대"를 파악하는 주관이 되는 장소이다. 학문하는 자아는 "상대"를 결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다. 항상 자신이 판단하는 주관으로서 "상대"를 보는 것일 뿐이다. 학문은 "상대"를 '내가 보는 하나의 어떤 것'으로 만들어서 거기에 있는 생명을 떼내어 객관적인 시스템화 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전형적으로 인간은 스스로 인식하는 주관이 되며 이는 데카르트가 말하는 "사유하는 나(Cogito)를 가리킨다.
사유는 우선 언어와 관계하여 일어난다. 우리가 무엇을 사유할 때 반드시 언어를 가지고 사유하게 된다. 인간의 사유가 가능한 것은 그가 언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유는 언어 속에서 일어나고 또한 언어와 함께 특정의 것을 생각하게 한다. 언어 속에서의 사유는 우리로 하여금 항상 특정의 "어떤 것"을 사유하게 하는 정신으로 만든다. 인간이 사유한다는 것은 "어떤 것"을 사유한다는 뜻이고 "어떤 것"을 사유한다는 말은 인간이 언어를 가지고 생명을 "어떤 것"으로 만드는 행위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인간은 사유함으로 언어로 묘사될 수 없는 존재를 항상 "어떤 것"으로 사유하는 행위이며 그 행위를 반드시 모국어나 외국어라고 하는 특정의 언어로 행한다는 것이다. 사유란 인간이 '보는 자'로서 주격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를 통하여 "상대"는 본질적으로 생명으로 실재하는데 그것이 목적격으로 놓여 지면서 그 생명은 하나의 "어떤 것"이 된다.
"상대"는 나의 실재를 비추어주고 드러내며 밝혀주는 빛이다. "상대"는 독백하는 주체가 아니며 항상 나에게 자신을 계시하길 원한다. 그러나 나는 "상대"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스스로 일어나게 하는 존재가 될 수 있지만 동시에 방해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 "상대"는 항상 나에게 말을 거는 주체이다. 이것을 우리는 "하나님"이라 부른다. 하나님은 나에게 항상 말 거는 생명이다. "상대"의 실재성 문제에 대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지적은 "상대"가 나의 소유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자유를 원한다. 그러나 자유는 나 혼자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와의 관계에서 생겨난다.
바울은 우리에게 말한다. "상대"의 실재성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속해야 한다고 말이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전 3:23)"는 말은 그리스도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말해준다. 예수께서 인격적으로 하나님에게 속하면서 세상에 의해 매이지 않음 같이 우리가 하나님에게 속하면서 비로소 세상으로부터 자유를 실현할 수 있다. 즉 하나님에게로의 자유는 곧 세상으로부터 자유를 실현할 수 있다. 하나님에게 속할 때 비로소 내가 나 자신을 소유하려는 데서 오는 모든 고통과 생의 무의미에게 자유로울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에게 속하지 않으면 반드시 세상에 매이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참된 "상대"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런 자유를 발견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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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3.31
  • 저작시기2003.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4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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