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나희덕 시인의 약력
2. 나희덕 시인의 시집들 살펴보기
3. 구체적인 작품 감상
4. 시에서 노래로……
5. 그의 작품에 대한 생각들
6. 참고 자료, 마무리
2. 나희덕 시인의 시집들 살펴보기
3. 구체적인 작품 감상
4. 시에서 노래로……
5. 그의 작품에 대한 생각들
6. 참고 자료, 마무리
본문내용
등 뒤에서 나는 영문도 알 수 없는 울음을 밤새 그치지 못했다.
그 낯선 여자의 아픈 삶을 속속들이 알지도 못하면서 나는 왜 그녀의 슬픔이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던 것일까. 흔히 시인을 곡비(哭婢)에 비유하지만, 그 날의 경험이 내게는 우는 자로서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일조의 통과의례 같은 것이었다.
이제 생각해보니 내 시의 팔 할은 슬픔이나 연민의 공명(共鳴)에서 시작된 게 아닌가 싶다. 내 안의 슬픔이 다른 슬픔과 만나 서로 스미고 어루만질 때 흘러나오는 언어, 또는 존재와 존재가 서로 삐걱거리고 뒤척이며 내는 소리들, 시는 그런 다양한 울음소리를 받아 적은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니 시인이 가장 귀 기울여야 하는 것은 만물이 내는 울음소리의 섬세한 리듬과 결일 것이다.
* “실핏줄처럼 뻗은 고통의 물줄기… 바라건대 강물 하나 만들어내길……”
어느 기자가 마더 테레사에게 “수녀님은 무어라고 기도하십니까?”라고 물었다고 한다. 그 질문에 테레사 수녀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저는 듣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의아해 하는 기자가 그녀에게 다시 물었다. “그러면 수녀님이 들을 때, 하나님은 무어라고 말씀하십니까?” 이 질문에도 역시 그녀는 “그분도 들으십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기도든 시든 고백과 발언의 양식임이 분명하지만 말하기 못지않게 듣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이야기이다.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 하나의 답을 내어 놓아야 한다면, 먼저 세상의 모든 소리들을 잘 듣기 위해서라고 대답하고 싶다. 특히 살아 있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를 나는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듣고 싶다.
사물과 자연을 통해 누군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아니 사물 자체가 말하거나 울고 있는 것을 잘 듣고 있으면 그 속에는 이미 시가 흐르고 있다. 그 소리들을 받아 적어서 한 편의 시로 완성하고 문예지에 발표하고 시집으로 묶는 행위는 어찌 보면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시인이 가장 충실하게 살아있는 순간은 만물의 울음소리를 자신의 음으로 가장 온전하게 실어낼 수 있는 때이다. 마음속의 건천(乾川)이 소리를 내기 시작할 때, 죽은 것처럼 보이던 존재가 되살아나고 보이지 않던 것도 보이기 시작한다.
몇 해 전, 그리 크지 않은 폭포를 찾아 강원도 산길을 올라간 적이 있다. 어느새 인가도 사라져 버리고 가파른 산길에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이 길로 올라가다 보면 폭포가 나온다고 했는데, 물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길을 잘못 든 것은 아닐까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마침 바위에 앉아 있는 한 노인이 보였고, 나는 노인에게 다가가 그 폭포에 대해 여쭈어 보았다. 노인은 더 올라가도 폭포를 볼 수 없을 거라고 말했다. 몇 해 전에 물줄기가 시름시름 새기 시작해서 이제는 마른 절벽밖에는 남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이 숨어버렸다니... 나는 오히려 그 소리도 형체도 보이지 않게 된 폭포를 보겠다는 일념으로 지친 걸음을 재촉해 올라갔다. 얼마쯤 올라갔을까. 물이 거의 마르다시피 한 계곡에 홀연히 서있는 절벽을 보았다. 절벽에는 아직 풀포기들이 드문드문 자라고 있었다. 풀포기들은 마치 절벽 속으로 사라진 물줄기를 따라 들어간 푸른 발자국들처럼 보였다. 물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나는 오래도록 그 절벽 앞에 앉아 물소리를 들었다. 더 어두운 곳에 닿아 측량할 수 없는 높이로 곤두서 있는 물소리를, 더 깊이 울리게 된 물소리를.
시가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이란 그 마른 폭포와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러면서 정지용의 시를 곱씹곤 한다. “안으로 열(熱)하고 겉으로 서늘옵기란 일종의 생리를 압복시키는 노릇이기에 심히 어렵다. 그러나 시의 위의(威儀)는 겉으로 서늘옵기를 바라서 마지않는다.” 이 말처럼, 눈물을 다스리는 힘없이는 슬픔을 제대로 노래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울음을 터뜨리려는 힘과 울지 않으려는 힘의 팽팽한 긴장, 겉으로는 서늘한 듯하면서 안으로는 뜨거운 슬픔의 샘에서 길러 올려진 진폭과 파동을 지닌 언어, 시의 의의란 바로 그런 내면의 싸움을 통과한 언어에 의해 얻어질 수 있는 것이리라.
여기에 비추어 볼 때 그 동안 내가 써온 시가 얼마나 진정성을 지닐 수 있을까 자문해본다. 뒤돌아보면 수많은 슬픔의 물줄기가 실핏줄처럼 뻗은 채 도란거리고 있다. 저 젖은 길들을 과연 내 발로 걸어오기는 온 것인가 싶기도 하다. 바라건대, 저 실핏줄들이 모여 언젠가는 슬픔의 강물 하나 만들어낼 수 있기를. 넓게 흐를수록 더 깊이 숨어서 우는 건천이 되기를……
그 낯선 여자의 아픈 삶을 속속들이 알지도 못하면서 나는 왜 그녀의 슬픔이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던 것일까. 흔히 시인을 곡비(哭婢)에 비유하지만, 그 날의 경험이 내게는 우는 자로서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일조의 통과의례 같은 것이었다.
이제 생각해보니 내 시의 팔 할은 슬픔이나 연민의 공명(共鳴)에서 시작된 게 아닌가 싶다. 내 안의 슬픔이 다른 슬픔과 만나 서로 스미고 어루만질 때 흘러나오는 언어, 또는 존재와 존재가 서로 삐걱거리고 뒤척이며 내는 소리들, 시는 그런 다양한 울음소리를 받아 적은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니 시인이 가장 귀 기울여야 하는 것은 만물이 내는 울음소리의 섬세한 리듬과 결일 것이다.
* “실핏줄처럼 뻗은 고통의 물줄기… 바라건대 강물 하나 만들어내길……”
어느 기자가 마더 테레사에게 “수녀님은 무어라고 기도하십니까?”라고 물었다고 한다. 그 질문에 테레사 수녀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저는 듣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의아해 하는 기자가 그녀에게 다시 물었다. “그러면 수녀님이 들을 때, 하나님은 무어라고 말씀하십니까?” 이 질문에도 역시 그녀는 “그분도 들으십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기도든 시든 고백과 발언의 양식임이 분명하지만 말하기 못지않게 듣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이야기이다.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 하나의 답을 내어 놓아야 한다면, 먼저 세상의 모든 소리들을 잘 듣기 위해서라고 대답하고 싶다. 특히 살아 있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를 나는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듣고 싶다.
사물과 자연을 통해 누군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아니 사물 자체가 말하거나 울고 있는 것을 잘 듣고 있으면 그 속에는 이미 시가 흐르고 있다. 그 소리들을 받아 적어서 한 편의 시로 완성하고 문예지에 발표하고 시집으로 묶는 행위는 어찌 보면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시인이 가장 충실하게 살아있는 순간은 만물의 울음소리를 자신의 음으로 가장 온전하게 실어낼 수 있는 때이다. 마음속의 건천(乾川)이 소리를 내기 시작할 때, 죽은 것처럼 보이던 존재가 되살아나고 보이지 않던 것도 보이기 시작한다.
몇 해 전, 그리 크지 않은 폭포를 찾아 강원도 산길을 올라간 적이 있다. 어느새 인가도 사라져 버리고 가파른 산길에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이 길로 올라가다 보면 폭포가 나온다고 했는데, 물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길을 잘못 든 것은 아닐까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마침 바위에 앉아 있는 한 노인이 보였고, 나는 노인에게 다가가 그 폭포에 대해 여쭈어 보았다. 노인은 더 올라가도 폭포를 볼 수 없을 거라고 말했다. 몇 해 전에 물줄기가 시름시름 새기 시작해서 이제는 마른 절벽밖에는 남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이 숨어버렸다니... 나는 오히려 그 소리도 형체도 보이지 않게 된 폭포를 보겠다는 일념으로 지친 걸음을 재촉해 올라갔다. 얼마쯤 올라갔을까. 물이 거의 마르다시피 한 계곡에 홀연히 서있는 절벽을 보았다. 절벽에는 아직 풀포기들이 드문드문 자라고 있었다. 풀포기들은 마치 절벽 속으로 사라진 물줄기를 따라 들어간 푸른 발자국들처럼 보였다. 물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나는 오래도록 그 절벽 앞에 앉아 물소리를 들었다. 더 어두운 곳에 닿아 측량할 수 없는 높이로 곤두서 있는 물소리를, 더 깊이 울리게 된 물소리를.
시가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이란 그 마른 폭포와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러면서 정지용의 시를 곱씹곤 한다. “안으로 열(熱)하고 겉으로 서늘옵기란 일종의 생리를 압복시키는 노릇이기에 심히 어렵다. 그러나 시의 위의(威儀)는 겉으로 서늘옵기를 바라서 마지않는다.” 이 말처럼, 눈물을 다스리는 힘없이는 슬픔을 제대로 노래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울음을 터뜨리려는 힘과 울지 않으려는 힘의 팽팽한 긴장, 겉으로는 서늘한 듯하면서 안으로는 뜨거운 슬픔의 샘에서 길러 올려진 진폭과 파동을 지닌 언어, 시의 의의란 바로 그런 내면의 싸움을 통과한 언어에 의해 얻어질 수 있는 것이리라.
여기에 비추어 볼 때 그 동안 내가 써온 시가 얼마나 진정성을 지닐 수 있을까 자문해본다. 뒤돌아보면 수많은 슬픔의 물줄기가 실핏줄처럼 뻗은 채 도란거리고 있다. 저 젖은 길들을 과연 내 발로 걸어오기는 온 것인가 싶기도 하다. 바라건대, 저 실핏줄들이 모여 언젠가는 슬픔의 강물 하나 만들어낼 수 있기를. 넓게 흐를수록 더 깊이 숨어서 우는 건천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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