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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그리고 나침반을 갖다대면 거의 정확히 남북으로 향하고 있어 천불천탑의 이 천 번째 부처님이 일어나면 곤륜산의 정기를 이 민족이 받아 새로운 세상이 열리고 지상 최대의 나라가 된다는 전설이 전해진다고 한다. 운주사의 와불은 비로자나부처님이고 옆에 입상은 석가모니불이다. 그리고 이 두 분을 지키는 듯 아래 서있는 노사나불(머슴부처, 시위불, 상좌불)도 옆에서 떼어내 세운 것이 분명하다. 그러기에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한 삼불 신앙의 형태로서 떼어서 어딘가에 세우려 했던 것인데 과연 어디다 ‘세우려 했을까?’ 에 대한 의문과 더불어 역사의 기록에서 이런 대단위 불사가 사라진 까닭을 생각해 보면 매우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세 곳의 답사를 마치고 마지막 불회사로 가는 길엔 조금씩 피곤이 밀려왔다. 세 곳과는 다르게 내리자 마자 절의 입구는 보이지 않았다. 절을 향해 난 길을 딸라 걸어야 했고 빗줄기가 제법 내리기 시작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불회사에 대한 창건 에 관해서는 두 가지 기록이 전하는데, 384년(침류왕 1)에 인도승 마라난타가 창건하고 681년(신문왕 1)에 왕명으로 중창되었다고도 하고, 367년(근초고왕 22)에 희연이 창건하고 713년에 연기가 중창했다고도 한다. 그 뒤 신라 말에 도선국사가 중건하였고, 1403년에 원진국사가 중창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절의 이름이 불호사로 기록되어 있어 창건 때는 불호사였다가 1808년경에 불회사로 이름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
불회사 대웅전(보물 1310)은 앞면 3칸, 옆면 3칸에 팔작지붕이며, 그 안에는 비로자나불, 석가모니불 등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석가모니불은 종이로 만들어 졌는데 이는 매우 드문 예라고 한다. 명부전은 1402년에 건립하여 200여 년 전에 중수하였으며, 칠성각에는 칠성탱화, 산신탱화와 원진국사의 영정이 있고 그 밖에 당간지주 2기와 원진국사 부도가 있다.
교수님에 의하면 불회사 앞산 온갖 면이 단풍으로 물들여 지고 그 가운데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장관을 이룬다고 하셨다. 우리가 찾은 시기가 약간은 빨라 그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다행히 절 내부 핀 빨간 단풍만 해도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집으로 가는 길 직전엔 교수님의 배려에 허기를 달랠 수 있었다. 오늘 답사는 여행하는 맘으로 시작 해 가벼운 맘으로 즐겁게 보고 느끼며 마칠 수 있었다. 호남에 사는 호남인의 한 사람으로서 또 배움에 뜻을 둔 사람으로서 적어도 이 지역의 명소에 대해서는 알고 있어야 된다는 나름대로의 의무감이 있던 나였고 오늘의 답사는 그 중의 하나를 해결했다는 마음의 안식을 준다.
※답사중 궁금한 점.
1. 쌍봉사 대웅전은 불에 타 다시 재건했다. 목조건축물은 불에 타기 쉽고 더욱이 화마에 의해 소실 됐다는 점을 감안 한다면 다른 재료를 쓸 수도 있을텐데 다시 목탑으로 한 이유는?
2. 쌍봉사에는 부도와 부도비를 제외한 석질 재료의 탑을 찾아 볼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3. 보림사의 삼층 석탑은 비슷한 형상을 하고 있으면서도 상륜부의 보륜수가 5개 3개로 다른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4. 석등은 석탑 주변에 세워져 있는데 목적이 있는 것인가?
5. 용은 불교에서 동물로 신성시 되었는데 보림사 창건설화에서는 용이 잡귀로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6. 운주사의 석탑과 불상은 기존의 양식에서 벗어나 있는데 왜 그곳만의 독특한 양식으로 만들어 졌을까?
7. 절 내에 있는 탑의 대부분 대웅전의 앞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8. 절의 많이 세우는 것은 민중에게 보다 폭 넓은 종교의 전파를 위해서 인가
사상적 통일이나 국왕국가의 선포를 알리는 정치적 목적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세 곳의 답사를 마치고 마지막 불회사로 가는 길엔 조금씩 피곤이 밀려왔다. 세 곳과는 다르게 내리자 마자 절의 입구는 보이지 않았다. 절을 향해 난 길을 딸라 걸어야 했고 빗줄기가 제법 내리기 시작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불회사에 대한 창건 에 관해서는 두 가지 기록이 전하는데, 384년(침류왕 1)에 인도승 마라난타가 창건하고 681년(신문왕 1)에 왕명으로 중창되었다고도 하고, 367년(근초고왕 22)에 희연이 창건하고 713년에 연기가 중창했다고도 한다. 그 뒤 신라 말에 도선국사가 중건하였고, 1403년에 원진국사가 중창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절의 이름이 불호사로 기록되어 있어 창건 때는 불호사였다가 1808년경에 불회사로 이름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
불회사 대웅전(보물 1310)은 앞면 3칸, 옆면 3칸에 팔작지붕이며, 그 안에는 비로자나불, 석가모니불 등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석가모니불은 종이로 만들어 졌는데 이는 매우 드문 예라고 한다. 명부전은 1402년에 건립하여 200여 년 전에 중수하였으며, 칠성각에는 칠성탱화, 산신탱화와 원진국사의 영정이 있고 그 밖에 당간지주 2기와 원진국사 부도가 있다.
교수님에 의하면 불회사 앞산 온갖 면이 단풍으로 물들여 지고 그 가운데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장관을 이룬다고 하셨다. 우리가 찾은 시기가 약간은 빨라 그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다행히 절 내부 핀 빨간 단풍만 해도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집으로 가는 길 직전엔 교수님의 배려에 허기를 달랠 수 있었다. 오늘 답사는 여행하는 맘으로 시작 해 가벼운 맘으로 즐겁게 보고 느끼며 마칠 수 있었다. 호남에 사는 호남인의 한 사람으로서 또 배움에 뜻을 둔 사람으로서 적어도 이 지역의 명소에 대해서는 알고 있어야 된다는 나름대로의 의무감이 있던 나였고 오늘의 답사는 그 중의 하나를 해결했다는 마음의 안식을 준다.
※답사중 궁금한 점.
1. 쌍봉사 대웅전은 불에 타 다시 재건했다. 목조건축물은 불에 타기 쉽고 더욱이 화마에 의해 소실 됐다는 점을 감안 한다면 다른 재료를 쓸 수도 있을텐데 다시 목탑으로 한 이유는?
2. 쌍봉사에는 부도와 부도비를 제외한 석질 재료의 탑을 찾아 볼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3. 보림사의 삼층 석탑은 비슷한 형상을 하고 있으면서도 상륜부의 보륜수가 5개 3개로 다른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4. 석등은 석탑 주변에 세워져 있는데 목적이 있는 것인가?
5. 용은 불교에서 동물로 신성시 되었는데 보림사 창건설화에서는 용이 잡귀로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6. 운주사의 석탑과 불상은 기존의 양식에서 벗어나 있는데 왜 그곳만의 독특한 양식으로 만들어 졌을까?
7. 절 내에 있는 탑의 대부분 대웅전의 앞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8. 절의 많이 세우는 것은 민중에게 보다 폭 넓은 종교의 전파를 위해서 인가
사상적 통일이나 국왕국가의 선포를 알리는 정치적 목적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