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일 서종문저 국문학사 요약문 정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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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동일 서종문저 국문학사 요약문 정리문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문학사 이해의 새로운 관점

2. 첫째시대 : 원시문학

3. 둘째시대 : 고대문학

4. 셋째시대 : 중세전기문학

5. 셋째시대 : 중세전기문학(2)

6. 넷째시대 : 중세후기문학

7. 넷째시대 : 중세후기문학(2)

8. 다섯째시대 : 중세문학에서 근대문학으로의 이행기

9. 다섯째시대 : 중세문학에서 근대문학으로의 이행기(2)

본문내용

문에 기본교리에는 뚜렷한 유사점이 있다. 어느 교조든지 억압, 살육, 원한으로 가득 찬 당시까지의 역사가 근본적으로 쇄신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불향이 극도에 다다르면 반드시 반전이 있게 마련이라는 소박한 신념이 신이롭게 교리화해서, 불행한 시대인 선천은 가고 평등, 조화, 화합으로 이루어진 무한한 행복을 가져다 줄 후천이 시작되는 후천개벽사상을 폈다.
9.2. 구비문학의 활기와 긴장
구비문학은 어느 시기의 문학에서도 그 나름대로 중요한 구실을 해왔지만 1860년대에 이르러서 전에 볼 수 없던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중세의 청산이 가까워오면서 한문학 담당층은 위엄을 잃었으며, 국문문학은 근대민족문학으로 자라나기 위해서 규범화된 격식을 버리고 구비문학과 제휴할 필요가 있었다. 밑으로부터의 각성이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어 구비문학이 민족의 위기를 타개하는 데 적극 참여하도록 했다.
9.3. 구시대 국문문학의 지속과 변모
시조는 원래 시(時)가 아니고 가(歌)였다. 인쇄되어 전달되는 시로서의 시조, 소위 신시조가 나타난 것은 1900년대 이후의 일이다. 고시조는 오늘날까지 창으로 불리어지지만 신시조가 나타날 무렵에 새로운 창작이 추가되지 않았다. 음악으로서의 시조에서는 오직 고시조의 지속이 있을 따름인데, 문학으로서의 시조에서는 신구의 교체를 보게 되었다.
9.4. 한문학에 부과된 사명
안으로 민란이 거듭되고 밖으로는 외세의 침략이 목전에 닥친 시기에, 무리하게 누대에 걸친 국권을 장악해 온 노벌 벌열층은 한문학에서 우위를 유지하는 데도 세심한 배려를 했다. 그러나 세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는 위기의식은 가지지 않았으며, 정통 한문학의 품격과 진폭이 유지 될 수 있게 하는 데 만족했다. 한편 소론 쪽에서는 명분론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어 정통 한문학의 체질개선을 적극적으로 시도했다.
9.5. 의병투쟁의 체험과 문학
항일의병이 일어나자 문학의 양상도 사뭇 달라졌다. 의병을 하러 나선 사람들은 전문적인 문인이 아니었으나 투지를 선포하고, 전투의 경과를 기록하고, 벅찬 감격과 쓰라린 고난을 전하기 위해서 여러 갈래의 시문을 활용했다. 그래서 한문학에 생기를 불어넣고 국문문학도 긴장되게 했으며 그 둘이 서로 얽히는 영역을 마련했다. 의병문학은 신문이나 잡지에 발표되던 애국계몽운동의 문학에 비한다면 표현양식에서는 보수적이었다고 하겠지만, 언론검열의 제약을 받지 않고 항일의지를 적극 고취할 수 있었으며, 민족사의 위기를 스스로 타개하려는 벅찬 체험을 농도 짙게 표출했다. 의병전쟁이 패배로 돌아간 다음에는 그 전통이 식민지적인 제약을 거부하는 항일문학의 저류로 계승되었다.
9.6. 신구 문학관의 대립과 교체
한문학을 지키고자 하는 문인은 누가나 문학이 관도 또는 재도의 그릇이라는 유가적인 문학관의 기본전제가 시대가 달라져도 바뀔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건창이 <정매하과록서>에서 경의와 시부 중에서 시부는 그만 둘 수 있어도 경의는 이어나가야 한다고 한 것은 경의로써 도를 캐고 물어야 위기를 타개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건창, 김윤식에서 황현, 김택영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문인은 시국관이나 정치의식에서는 견해가 일치하지 않지만, 품격 높은 한문학을 계속 갈고 닦아야 정신적 가치를 유지하고 혼란에 빠진 문화를 바로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점에서는 서로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창작방법론에 대해서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그 준칙을 명확하게 정리하려고 애썼다.
1894년에 갑오경장을 하면서 신분제가 폐지되고, 한문을 대신해서 국문이 공식적인 글로 등장했으며, 1000년 가까운 기간 동안 이어져 온 과거제도가 폐지되어 한문학이 결정적인 타격을 받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문학을 하는 문인들은 자기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두고 깊이 고심하다가 노선이 나뉘어졌다.
9.7. 국문시가의 새로운 양상
1895년 5월 14일에 대한제국의 독립을 경축하기 위한 잔치에서 을미의숙을 비롯한 일곱 학교의 학도들이 <독립가>를 불렀다. 그때부터 시작해서 몇 년 동안 대한제국의 독립을 칭송하는 <독립가> 또는 <애국가>가 거듭 이루어졌으며, 그 가운데 상당수가 <독립신문>에 실려 있다. 이런 노래는 대한제국의 악장이라고 할 수 있다.
9.8. 소설의 변화
소설은 필사본, 목판본, 활자본의 세 가지 형태로 존재하고 유통되어 왔다. 필사본은 오랫동안 글을 전달하는 기본 형태였으므로, 소설도 활자본이 일반화되기 전까지는 모든 작품이 필사본으로 유통되면서 그 일부만 인쇄되었다. 방각본이라고 일컬어지는 판매목적의 목판본이 17세기에 나타나 처음에는 서당 교과서류를 주대상으로 하다가 차차 소설에도 상당한 비중을 두게 되었다. 판각연대를 밝혔어도 대부분은 간지만이라 정확한 편년을 작성할 수 없지만, 방각본 소설의 전성기는 1860년대에서 1890년대까지라고 할 수 있다. 신식활자를 사용한 활자본 소설은 1900년대에 등장해서 1910년대에는 종수나 부수에서 방각본 소설을 능가했고, 그 구실이 계속 확대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9.9. 민속극, 창극, 신파극
18세기 동안에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도시탈춤은 그 모체인 농촌탈춤은 물론 무당굿놀이, 꼭두각시놀음 등보다 규모가 크고 짜임새가 훌륭하며 주제가 선명한 민속극으로 정착되어 계속 발전하는 추세를 보였다. 그 기간 동안 교역의 중심지로 자라난 상업도시에서 상인들이 사람들을 모아들이는 데 도움이 되도록 탈춤을 육성하고, 또한 자기네 취미에 맞는 구경거리로 즐겼다. 민속극은 한창 시절에 쇠퇴의 길에 들어섰다. 그 직접적인 이유는 정치적인 상황이 불리하게 조성된 데 있다. 판소리를 창극으로 바꾸어 놓은 것에 대해서 바람직한 일이었는가는 당시에도 논란이 있었던 문제이다. 판소리의 순수성을 지키고자 하는 쪽에서는 오랜 격식을 함부로 파괴해서 통속적인 인기에 영합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창극은 판소리의 맛을 즐기면서 흥미로운 구경거리를 찾고자 하는 시대적인 요청의 산물이었으며, 창극을 정착시키고 발전시키고자 한 노력은 잘못되지 않았다. 판소리, 창극, 탈춤이 각기 그것대로의 특색을 살리면서 나란히 발전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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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4.08
  • 저작시기20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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