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들어가기
2. 비극
(1)그리스비극의 일반적 개념
(2)새로운 형식, 비극
3. ‘비극적 쾌감’
(1)‘자기연민’에 사로잡힌 이들
(2)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
4. ‘만남의 기쁨’, 카타르시스
5. 나가기
2. 비극
(1)그리스비극의 일반적 개념
(2)새로운 형식, 비극
3. ‘비극적 쾌감’
(1)‘자기연민’에 사로잡힌 이들
(2)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
4. ‘만남의 기쁨’, 카타르시스
5. 나가기
본문내용
타르시스를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4. ‘만남의 기쁨’ 새로운 형식―대화―를 지니는 ‘비극’을 살펴보았을 때, 그것은 ‘타인과의 만남’을 함의하고 있었 다. 그리하여 비극이 주는 쾌락, 기쁨인 ‘카타르시스’는 ‘만남의 기쁨이라고 이야기를 해도 저어함 이 없을 듯 하다.
, 카타르시스
앞에서 이야기했던 ‘보편성’에 대하여 다시 이야기해보도록 하자. ‘보편성’이라는 단어에서 피해의식을 느낀다면 그것은 너무 과한 이야기가 되는 것일까? 근대에 너무나도 커져버린 ‘이성’의 힘 앞에서 우리는 ‘보편성’, ‘동일성’이라는 개념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된 것이 사실이다. 물론 ‘보편성’이라는 개념의 일면에는 ‘억압의 기제’로서 작용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의 일종의 폭력에 의하여 많은 사람들이 억눌림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보편성은 이러한 부정적인 측면만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요즘의 추세가 워낙 보편적인 것들에 대한 알르레기 반응을 보이는 것이라 이렇게 부정적인 측면이 강조되었을 뿐이지 사실 보편성은 타인과의 소통을 보다 원활하게 해주는 전제가 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작용도 한다. 우리가 카타르시스에서 살펴볼 ‘보편성’은 이렇게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보편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는 ‘비극’이라는 예술장르에서 ‘고통과 연민’이라는 수단을 통하여 ‘타자와의 만남’을 갖고 그 속에서 자기를 정립하고 실현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 김상봉 : <나르시스의 꿈을 넘어서> p.39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보았을 때, 우리는 ‘편협한 이기심’, ‘고립된 개별성’에서 진정한 의미에서 벗어났다고 할 수 있으며, 진정으로 ‘비극적 쾌감’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인간은 오직 타인의 고통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정도만큼만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5)와 동일한 책. p.309
이 말을 통해서 우리는 타인과의 공감,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보편성을 통해서만 우리가 자 유로울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우리는 타인을 인정하고, 타인과 소통함으로써 우리를 억누르던 고통에서 해방이 가능하고, 순수한 의미에서 기쁨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의 정 신은 그만큼 넓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정으로 타인과 함께 상호교호가 가능한 순수한 기쁨마저도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만남의 기쁨'을 통해서 우리는 비극에서 ‘명랑함’과 ‘숭고’를 찾아볼 수 있게 된다. 마냥 슬프고, 고통스럽게만 느껴지던 그것에서 우리는 역설적이게도 ‘명랑함’을 찾아볼 수 있게 된다. 비극을 통한 그리스 정신이 우리에게 보여준 명랑함이라는 것은 그것이 삶, 그리고 나아가서는 고통에 관한 부분에까지 긍정할 수 있는 심오한 긍정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긍정이라는 것은 ‘니체’가 이야기한 초인의 무감동을 뛰어넘어 보다 거대한 것, 완전하고, 탁월한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다. 그리하여 우리의 이야기는 카타르시스, 만남의 기쁨을 넘어서 무한한 거대함, ‘숭고’를 맞닥뜨릴 수 있게 된다. ‘숭고라는 것은 약함 속에서만 자기를 드러내는 정신의 힘, 고통을 통해서만 피어나는 긍지의 기 쁨인 것이다.’ -5)와 동일한 책. p.317
5. 나가기
그리스 비극이라는 하나의 예술장르를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오랜 시간동안 논란거리가 되어왔던 ‘카타르시스’에 대한 이야기를 짧게나마 해보았다. ‘자기연민’에서 시작된 카타르시스의 해석은 그것을 뛰어넘어 ‘타인과 의사소통’이 가능한 곳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 곳에서 우리는 긍정적인 의미에서 보편성을 상정하였고, 그리고 보편적인 주체가 되었다. 보편적인 주체―그리스에서 진정한 의미의 ‘자유인’―, 공동체 속에서 타인과의 소통도 가능하고, 동시에 자신의 주체성도 확립한 이상적인 주체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주체가 됨으로써 우리는 그리스 고유의 ‘명랑함’과 ‘숭고’의 개념에까지 나아갈 수 있었다. 이 장에서 모든 이야기를 하기에는 나의 능력이 너무나도 부족했다. 그러므로 숭고에 대해서는 말 을 아끼기로 했다. 한 학기동안 예술철학에서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이상적인 보편적 주체 가 됨으로써 진정한 ‘만남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는 점으로 모두 종합해볼 수 있을 것 같다.
.
이러한 개념들을 마주하면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의 상황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비극’은 전무하고, ‘자기연민’의 극한에서 값싼 눈물을 강요하는 이러한 상황이 그리스의 숭고와 명랑한 상황에 대치되어 얼마나 나를 슬프게 했는지 모른다. 어느새 현재 상황 자체로 비극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렇기에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극한 상황에서 오히려 정신적 숭고를 드러내고, 타인과의 만남이 가능했던 ‘그리스 비극’처럼 우리의 사회에서도 그러한 것이 가능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우리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타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우리 사회 일반적인 현상들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우리가 좀더 예민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여기에서 ‘예민하게’라는 말은 현재 우리가 아무런 노력 없이 누릴 수 있는 ‘극단적인’ 예민함과 구별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예민함’은 우리의 부정적인 상황에 대해 넋 놓고 있거 나,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이 관망하는 자세에서 벗어나서 자신의 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예민함’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고대 그리스인들처럼 심오한 긍정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다면…….
우리들을 협소하고 개별적인 주체에서 벗어나서 본질적인 자율성이 가능할 수 있는 보편적인 주체로 나아갈 수 있게끔 이끌어줄 수 있는 ‘비극’이 하루바삐 출현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러한 바람과 함께 우리 역시 비극에 관하여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소양을 갖추기 우한 노력이 병행된다면 우리는 ‘제 2의 그리스’를 꿈꿀 수 있지 않을까? 나의 이 꿈이 너무 허황된 것이 아니었으면, 진정으로 실현될 수 있다면 우리는 진정한 시민이자 개인인 ‘보편적 주체’로서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4. ‘만남의 기쁨’ 새로운 형식―대화―를 지니는 ‘비극’을 살펴보았을 때, 그것은 ‘타인과의 만남’을 함의하고 있었 다. 그리하여 비극이 주는 쾌락, 기쁨인 ‘카타르시스’는 ‘만남의 기쁨이라고 이야기를 해도 저어함 이 없을 듯 하다.
, 카타르시스
앞에서 이야기했던 ‘보편성’에 대하여 다시 이야기해보도록 하자. ‘보편성’이라는 단어에서 피해의식을 느낀다면 그것은 너무 과한 이야기가 되는 것일까? 근대에 너무나도 커져버린 ‘이성’의 힘 앞에서 우리는 ‘보편성’, ‘동일성’이라는 개념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된 것이 사실이다. 물론 ‘보편성’이라는 개념의 일면에는 ‘억압의 기제’로서 작용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의 일종의 폭력에 의하여 많은 사람들이 억눌림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보편성은 이러한 부정적인 측면만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요즘의 추세가 워낙 보편적인 것들에 대한 알르레기 반응을 보이는 것이라 이렇게 부정적인 측면이 강조되었을 뿐이지 사실 보편성은 타인과의 소통을 보다 원활하게 해주는 전제가 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작용도 한다. 우리가 카타르시스에서 살펴볼 ‘보편성’은 이렇게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보편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는 ‘비극’이라는 예술장르에서 ‘고통과 연민’이라는 수단을 통하여 ‘타자와의 만남’을 갖고 그 속에서 자기를 정립하고 실현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 김상봉 : <나르시스의 꿈을 넘어서> p.39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보았을 때, 우리는 ‘편협한 이기심’, ‘고립된 개별성’에서 진정한 의미에서 벗어났다고 할 수 있으며, 진정으로 ‘비극적 쾌감’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인간은 오직 타인의 고통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정도만큼만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5)와 동일한 책. p.309
이 말을 통해서 우리는 타인과의 공감,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보편성을 통해서만 우리가 자 유로울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우리는 타인을 인정하고, 타인과 소통함으로써 우리를 억누르던 고통에서 해방이 가능하고, 순수한 의미에서 기쁨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의 정 신은 그만큼 넓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정으로 타인과 함께 상호교호가 가능한 순수한 기쁨마저도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만남의 기쁨'을 통해서 우리는 비극에서 ‘명랑함’과 ‘숭고’를 찾아볼 수 있게 된다. 마냥 슬프고, 고통스럽게만 느껴지던 그것에서 우리는 역설적이게도 ‘명랑함’을 찾아볼 수 있게 된다. 비극을 통한 그리스 정신이 우리에게 보여준 명랑함이라는 것은 그것이 삶, 그리고 나아가서는 고통에 관한 부분에까지 긍정할 수 있는 심오한 긍정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긍정이라는 것은 ‘니체’가 이야기한 초인의 무감동을 뛰어넘어 보다 거대한 것, 완전하고, 탁월한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다. 그리하여 우리의 이야기는 카타르시스, 만남의 기쁨을 넘어서 무한한 거대함, ‘숭고’를 맞닥뜨릴 수 있게 된다. ‘숭고라는 것은 약함 속에서만 자기를 드러내는 정신의 힘, 고통을 통해서만 피어나는 긍지의 기 쁨인 것이다.’ -5)와 동일한 책. p.317
5. 나가기
그리스 비극이라는 하나의 예술장르를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오랜 시간동안 논란거리가 되어왔던 ‘카타르시스’에 대한 이야기를 짧게나마 해보았다. ‘자기연민’에서 시작된 카타르시스의 해석은 그것을 뛰어넘어 ‘타인과 의사소통’이 가능한 곳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 곳에서 우리는 긍정적인 의미에서 보편성을 상정하였고, 그리고 보편적인 주체가 되었다. 보편적인 주체―그리스에서 진정한 의미의 ‘자유인’―, 공동체 속에서 타인과의 소통도 가능하고, 동시에 자신의 주체성도 확립한 이상적인 주체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주체가 됨으로써 우리는 그리스 고유의 ‘명랑함’과 ‘숭고’의 개념에까지 나아갈 수 있었다. 이 장에서 모든 이야기를 하기에는 나의 능력이 너무나도 부족했다. 그러므로 숭고에 대해서는 말 을 아끼기로 했다. 한 학기동안 예술철학에서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이상적인 보편적 주체 가 됨으로써 진정한 ‘만남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는 점으로 모두 종합해볼 수 있을 것 같다.
.
이러한 개념들을 마주하면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의 상황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비극’은 전무하고, ‘자기연민’의 극한에서 값싼 눈물을 강요하는 이러한 상황이 그리스의 숭고와 명랑한 상황에 대치되어 얼마나 나를 슬프게 했는지 모른다. 어느새 현재 상황 자체로 비극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렇기에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극한 상황에서 오히려 정신적 숭고를 드러내고, 타인과의 만남이 가능했던 ‘그리스 비극’처럼 우리의 사회에서도 그러한 것이 가능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우리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타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우리 사회 일반적인 현상들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우리가 좀더 예민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여기에서 ‘예민하게’라는 말은 현재 우리가 아무런 노력 없이 누릴 수 있는 ‘극단적인’ 예민함과 구별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예민함’은 우리의 부정적인 상황에 대해 넋 놓고 있거 나,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이 관망하는 자세에서 벗어나서 자신의 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예민함’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고대 그리스인들처럼 심오한 긍정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다면…….
우리들을 협소하고 개별적인 주체에서 벗어나서 본질적인 자율성이 가능할 수 있는 보편적인 주체로 나아갈 수 있게끔 이끌어줄 수 있는 ‘비극’이 하루바삐 출현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러한 바람과 함께 우리 역시 비극에 관하여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소양을 갖추기 우한 노력이 병행된다면 우리는 ‘제 2의 그리스’를 꿈꿀 수 있지 않을까? 나의 이 꿈이 너무 허황된 것이 아니었으면, 진정으로 실현될 수 있다면 우리는 진정한 시민이자 개인인 ‘보편적 주체’로서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