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경운궁(덕수궁)을 선택한 이유
(2) 덕수궁의 본명은 경운궁
(3) 시대에 따라 본 경운궁
1) 선조, 광해군 시대의 경운궁
2) 고종시대의 경운궁
3) 순종 시대 이후의 경운궁
(4) 슬픈 역사를 간직한 덕수궁
1) 축소되고 변형된 덕수궁
2) 덕수궁 담장과 청동분수대
3) 덕수궁의 양관들
① 지금까지 남아 있는 양옥 I - 정관헌
② 지금까지 남아 있는 양옥 II - 석조전
③ 지금까지 남아 있는 양옥 III - 중명전
4) 석조전 정면의 ‘이화(배꽃)문양’
(5) 현재 덕수궁에 남아 있는 각 전각들의 양식과 역사 배경
1) 대한문
2) 중화전, 중화문
3) 함녕전
4) 즉조당
5) 준명당
6) 석어당
7) 덕홍전
8) 석조전, 별관
9) 정관헌
(6) 덕수궁 답사를 마치면서
(2) 덕수궁의 본명은 경운궁
(3) 시대에 따라 본 경운궁
1) 선조, 광해군 시대의 경운궁
2) 고종시대의 경운궁
3) 순종 시대 이후의 경운궁
(4) 슬픈 역사를 간직한 덕수궁
1) 축소되고 변형된 덕수궁
2) 덕수궁 담장과 청동분수대
3) 덕수궁의 양관들
① 지금까지 남아 있는 양옥 I - 정관헌
② 지금까지 남아 있는 양옥 II - 석조전
③ 지금까지 남아 있는 양옥 III - 중명전
4) 석조전 정면의 ‘이화(배꽃)문양’
(5) 현재 덕수궁에 남아 있는 각 전각들의 양식과 역사 배경
1) 대한문
2) 중화전, 중화문
3) 함녕전
4) 즉조당
5) 준명당
6) 석어당
7) 덕홍전
8) 석조전, 별관
9) 정관헌
(6) 덕수궁 답사를 마치면서
본문내용
서 즉위하였다. 하여 즉조당이란 명칭이 붙었다. 중화전이 건립되기 전 한때 정전으로 사용되었으며 태극전, 중화전이라 했다. 그 뒤 귀비 엄씨가 거처하였으며 그는 여기서 죽었다.
5) 준명당
정면 6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전각이나 동쪽 끝에 익랑이 있어 'r'자 평면을 구성하고 있다. 연결되어 있는 즉조당과는 반대로 정면 서쪽으로부터 2, 3, 4번째 칸을 개방하여 툇마루를 만들어 조화를 이루었다. 원래는 행각이 있었다.1904년 4월의 화재가
있은 뒤 1904년 6월 30일 중건된 것이다. 화재 대 고종, 순종, 어진, 예진을 여기로 옮기고 경효전도 이 건물의 서행각에 옮긴 일이 있었다. 외국 사신을 여러 번 여기서 접견했다.
<준명당>
<준명당 복도의 누하주> (준명당과 즉조당을 연결시키는 2칸 복도의 아랫부분으로 사란의 통행이 가능하도록 만들어 흥미롭다.)
6) 석어당
궁궐 안의 유일한 2층 건물이다. 아래층은 정면 8칸, 측면 3칸이고 위층은 정면 6칸, 측면 1칸인 팔작지붕의 건축이다. 부속된 행각이 있었다. 선조 때부터 있었던 건물이며
1904년 4월의 화재 뒤 1904년 5월 14일 중건되었다. 예날 왕이 거처한 전각이라 하여 이런 당호가 붙었다. 한때 황태자비가 거처하던 곳이다.
<석어전>
7) 덕홍전
정면 3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의 전각이다. 공포는 익공식이다. 1904년 4월의 화재 뒤 수옥헌 방면으로 옮긴 경효전 터에 1911년 이 건물을 지어 알현소(謁見所)로 사 <덕홍전>
용했다.
8)
) '(4)-3)-②지금까지 남아 있는 양옥 II - 석조전'에 실린 사진 참조
석조전, 별관
1910년에 완성된 이 건물의 연면적은 1,226평이다. 건물 외부에는 이오니아 주두로 된 열주가 늘어서 있고 전면중앙 현관의 상공 박공에는 황실 문장인 배꽃이 새겨져 있다. 콜로니얼 스타일의 건축이다. 상해(上海)의 영국인 하아딩(G.R.Harding)이 설계하였고 일본의 오오구라구미가 공사를 했다. 한국인 심의석, 러시아인 사바틴, 일본인 오가와, 영국인 데이빗슨(H.W.Davidson) 등이 감독하였으며 실내 공사는 영국인 로벨(Lovell)의 설계로 런던의 크리톨(Crittall), 메이플(Maple) 회사가 맡아 하였다 한다. 1층에는 시종들의 거실, 2층에는 접견실을 두고, 3층에는 황제, 황후의 침실, 거실, 담화실, 욕실을 배치했다. 이 건물은 1933년에 일반에 공개되었고 해방 뒤 미소공동위원회, 국련한국위원회, 국립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등으로 사용되었으며 현재는 궁중유물전시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1937년 이왕직박물관으로 지은 별관은 연면적이 1,104평이며, 해방 뒤 석조전의 부속 건물로 사용되었다.
9)
) '(4)-3)-①지금까지 남아 있는 양옥 I - 정관헌'에 실린 사진 참조
정관헌
팔작지붕등 동양적 요소가 있는 벽돌조 단층 양옥인데 인조석 씻어내기로 만든 독립 기둥에는 로마네스크식 주두가 있다. 그 뒤 전면과 측면 테라스에 정교한 아케이드를 만들어 중측한 것으로 추측된다.1900년 진전의 화재 뒤 태조의 영정을 봉안하고 한동안 경운당이라 불렀으나, 새 진전이 완성됨에 따라 영정을 그곳으로 옮겼다.
(6) 덕수궁 답사를 마치면서
이 궁은 대한제국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궁이다. 경희궁만큼이나 가슴을 아프게 하는 궁이다. 고종은 여기서 붕어했고, 이것이 3.1운동에 연결되는 아픈 역사를 간직한 궁궐이다. 주변의 열강 대사관저나 일제의 횡포로 이 궁은 구역이 워낙 많이 잘려 나갔다. 한마디로 구한말이나 광복 후나 이래저래 시련을 겪은 처량한 궁이다. 제대로 된 전각도 별로 없고 너무 작은 규모여서 여기가 궁인가 의심하게 만드는 곳이었다. 우선 정전인 중화전부터가 그러한데 중화문은 주위에 행각을 모두 잃어서 홀로 덩그렇게 서있다. 보기에 너무나 애처로워 보였다. 그리고 중화전 오는 곳에 도대체 무슨 이유로 세종대왕 동상이 있는것인지... 살아 생전에 세종께서 이 곳에 납시었을리 만무한데, 누구 작품인지 정말 이해 할 수 없는 작품이었다. 독립국이란 의미의 대한제국, 그 모습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여기인 것 같다. 중화전으로 가는 답도에는 용 두마리가 새겨져있는데 이는 자주국임을 표방하기 위한 모습으로 독립적인 자주성을 가장 잘 표현해낸 곳인 것 같았다. 고종의 처소였던 함녕전은 그 곳에 당시의 가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다른 궁들의 건물이 문을 걸어 닫고 공개하는 곳도 음침한 내부만을 보여주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가구를 놓고 보니 좀 사람살던 곳 같다는 느낌을 가지게 하는 곳이었다. 다른 건물들도 이렇게 공개하면 인위적인 모습보단 훨씬 생생한 관람을 할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 보았다. 이 궁의 특징은 개화기 면모를 보여주는 곳이 많았다는 점이다. 우선 정관헌, 지중해에 테라스 달린 별장을 연상시키는 곳이라 그런지 신혼부부들이 이 건물에서 사진찍는 모습을 특히 많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조선조 최후의 대 역사(役事) 석조전, 영국인 설계로 이루어졌고 앞에 분수와 조경도 설치되어있었다. 원래 우리 궁에는 정원이 없고 후원만 있었다고 하던데 참 파격적으로 변모한 궁궐 조경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지금 석조전은 궁중 유물 전시관으로 이용되고 있고 이 서편에 석조전 서관은 국립 현대 미술관 별관으로 이용되는 건물이 있다. 그런데 덕수궁에 딱 들어서면 이 두 건물이 덕수궁의 주인인 양 떡하니 중화전을 압도하며 서 있다. 궁중 유물 전시는 몰라도 왜 궁에 서양미술을 전시한 미술관이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을 갖게 하는 곳이었다. 별로 남은 것도 없고, 줄기도 많이 줄어든 곳이라 구경하는데 시간은 별로 들지 않았다. 그러나 이 궁이 남은 것이 별로 없다 해도 19세기말 우리 역사를 체험하는 곳으로는 그만이리라 생각한다. 덕수궁은 그 외에 돌담길이 최고다. 대한문 옆으로 이화여고 까지 난 돌담길은 차량이 드물고 넓직한 인도가 펼쳐진 길로 봄인 이때 싱그러운 나무와 화사한 꽃들, 그리고 덕수궁 벚꽃축제로 도심에서 이만큼 아름답고 좋은 산책길을 찾지는 못할 것이리라는 생각을 하며 덕수궁 답사를 마쳤다.
5) 준명당
정면 6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전각이나 동쪽 끝에 익랑이 있어 'r'자 평면을 구성하고 있다. 연결되어 있는 즉조당과는 반대로 정면 서쪽으로부터 2, 3, 4번째 칸을 개방하여 툇마루를 만들어 조화를 이루었다. 원래는 행각이 있었다.1904년 4월의 화재가
있은 뒤 1904년 6월 30일 중건된 것이다. 화재 대 고종, 순종, 어진, 예진을 여기로 옮기고 경효전도 이 건물의 서행각에 옮긴 일이 있었다. 외국 사신을 여러 번 여기서 접견했다.
<준명당>
<준명당 복도의 누하주> (준명당과 즉조당을 연결시키는 2칸 복도의 아랫부분으로 사란의 통행이 가능하도록 만들어 흥미롭다.)
6) 석어당
궁궐 안의 유일한 2층 건물이다. 아래층은 정면 8칸, 측면 3칸이고 위층은 정면 6칸, 측면 1칸인 팔작지붕의 건축이다. 부속된 행각이 있었다. 선조 때부터 있었던 건물이며
1904년 4월의 화재 뒤 1904년 5월 14일 중건되었다. 예날 왕이 거처한 전각이라 하여 이런 당호가 붙었다. 한때 황태자비가 거처하던 곳이다.
<석어전>
7) 덕홍전
정면 3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의 전각이다. 공포는 익공식이다. 1904년 4월의 화재 뒤 수옥헌 방면으로 옮긴 경효전 터에 1911년 이 건물을 지어 알현소(謁見所)로 사 <덕홍전>
용했다.
8)
) '(4)-3)-②지금까지 남아 있는 양옥 II - 석조전'에 실린 사진 참조
석조전, 별관
1910년에 완성된 이 건물의 연면적은 1,226평이다. 건물 외부에는 이오니아 주두로 된 열주가 늘어서 있고 전면중앙 현관의 상공 박공에는 황실 문장인 배꽃이 새겨져 있다. 콜로니얼 스타일의 건축이다. 상해(上海)의 영국인 하아딩(G.R.Harding)이 설계하였고 일본의 오오구라구미가 공사를 했다. 한국인 심의석, 러시아인 사바틴, 일본인 오가와, 영국인 데이빗슨(H.W.Davidson) 등이 감독하였으며 실내 공사는 영국인 로벨(Lovell)의 설계로 런던의 크리톨(Crittall), 메이플(Maple) 회사가 맡아 하였다 한다. 1층에는 시종들의 거실, 2층에는 접견실을 두고, 3층에는 황제, 황후의 침실, 거실, 담화실, 욕실을 배치했다. 이 건물은 1933년에 일반에 공개되었고 해방 뒤 미소공동위원회, 국련한국위원회, 국립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등으로 사용되었으며 현재는 궁중유물전시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1937년 이왕직박물관으로 지은 별관은 연면적이 1,104평이며, 해방 뒤 석조전의 부속 건물로 사용되었다.
9)
) '(4)-3)-①지금까지 남아 있는 양옥 I - 정관헌'에 실린 사진 참조
정관헌
팔작지붕등 동양적 요소가 있는 벽돌조 단층 양옥인데 인조석 씻어내기로 만든 독립 기둥에는 로마네스크식 주두가 있다. 그 뒤 전면과 측면 테라스에 정교한 아케이드를 만들어 중측한 것으로 추측된다.1900년 진전의 화재 뒤 태조의 영정을 봉안하고 한동안 경운당이라 불렀으나, 새 진전이 완성됨에 따라 영정을 그곳으로 옮겼다.
(6) 덕수궁 답사를 마치면서
이 궁은 대한제국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궁이다. 경희궁만큼이나 가슴을 아프게 하는 궁이다. 고종은 여기서 붕어했고, 이것이 3.1운동에 연결되는 아픈 역사를 간직한 궁궐이다. 주변의 열강 대사관저나 일제의 횡포로 이 궁은 구역이 워낙 많이 잘려 나갔다. 한마디로 구한말이나 광복 후나 이래저래 시련을 겪은 처량한 궁이다. 제대로 된 전각도 별로 없고 너무 작은 규모여서 여기가 궁인가 의심하게 만드는 곳이었다. 우선 정전인 중화전부터가 그러한데 중화문은 주위에 행각을 모두 잃어서 홀로 덩그렇게 서있다. 보기에 너무나 애처로워 보였다. 그리고 중화전 오는 곳에 도대체 무슨 이유로 세종대왕 동상이 있는것인지... 살아 생전에 세종께서 이 곳에 납시었을리 만무한데, 누구 작품인지 정말 이해 할 수 없는 작품이었다. 독립국이란 의미의 대한제국, 그 모습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여기인 것 같다. 중화전으로 가는 답도에는 용 두마리가 새겨져있는데 이는 자주국임을 표방하기 위한 모습으로 독립적인 자주성을 가장 잘 표현해낸 곳인 것 같았다. 고종의 처소였던 함녕전은 그 곳에 당시의 가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다른 궁들의 건물이 문을 걸어 닫고 공개하는 곳도 음침한 내부만을 보여주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가구를 놓고 보니 좀 사람살던 곳 같다는 느낌을 가지게 하는 곳이었다. 다른 건물들도 이렇게 공개하면 인위적인 모습보단 훨씬 생생한 관람을 할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 보았다. 이 궁의 특징은 개화기 면모를 보여주는 곳이 많았다는 점이다. 우선 정관헌, 지중해에 테라스 달린 별장을 연상시키는 곳이라 그런지 신혼부부들이 이 건물에서 사진찍는 모습을 특히 많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조선조 최후의 대 역사(役事) 석조전, 영국인 설계로 이루어졌고 앞에 분수와 조경도 설치되어있었다. 원래 우리 궁에는 정원이 없고 후원만 있었다고 하던데 참 파격적으로 변모한 궁궐 조경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지금 석조전은 궁중 유물 전시관으로 이용되고 있고 이 서편에 석조전 서관은 국립 현대 미술관 별관으로 이용되는 건물이 있다. 그런데 덕수궁에 딱 들어서면 이 두 건물이 덕수궁의 주인인 양 떡하니 중화전을 압도하며 서 있다. 궁중 유물 전시는 몰라도 왜 궁에 서양미술을 전시한 미술관이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을 갖게 하는 곳이었다. 별로 남은 것도 없고, 줄기도 많이 줄어든 곳이라 구경하는데 시간은 별로 들지 않았다. 그러나 이 궁이 남은 것이 별로 없다 해도 19세기말 우리 역사를 체험하는 곳으로는 그만이리라 생각한다. 덕수궁은 그 외에 돌담길이 최고다. 대한문 옆으로 이화여고 까지 난 돌담길은 차량이 드물고 넓직한 인도가 펼쳐진 길로 봄인 이때 싱그러운 나무와 화사한 꽃들, 그리고 덕수궁 벚꽃축제로 도심에서 이만큼 아름답고 좋은 산책길을 찾지는 못할 것이리라는 생각을 하며 덕수궁 답사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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