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서 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2. 본 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1] 용산구의 일반현황 ___________________________ 2
① 용산구의 지역 특성 및 위치 _______ 2
② 용산구의 인구 _____________ 4
③ 관광지 및 문화제 분포 ___________ 5
[2] 용산구 역사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8
[3] 용산구 남영동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9
[4] 용산구의 발전 방향 __________________________ 10
3. 결 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1
2. 본 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1] 용산구의 일반현황 ___________________________ 2
① 용산구의 지역 특성 및 위치 _______ 2
② 용산구의 인구 _____________ 4
③ 관광지 및 문화제 분포 ___________ 5
[2] 용산구 역사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8
[3] 용산구 남영동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9
[4] 용산구의 발전 방향 __________________________ 10
3. 결 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1
본문내용
.
이같은 외국인 중심 지역들은 용산구를 더욱 특색있게 만들고 내국인의 발길마저 잡아끄는 역할을 한다.
[자료10-이촌동의 리틀도쿄: 말 그대로 일본을 옮겨 놓은듯한 인상이다.]
[2] 용산구의 역사
우리 역사에서 용산지역을 포함한 한강 유역에 최초로 정치 세력이 등장한 것은 초기 백제였으며 마한을 정복하고 점차 세력을 확장하여 초기 고대 국가로 발전하는 역사의 흐름 속에 용산 지역도 자연적으로 백제의 정치권에 포함되었다.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정책으로 백제는 한강유역을 고구려에 내주고 웅진으로 천도하게 되어 용산지역도 77년간 고구려에 편입되었다. 이후 삼국이 통일되어 통일신라시대로 이어지면서 용산지역은 한산주, 한양군 등으로 관할을 바꾸게 되었으며 고려시대에는 국초부터 정종때까지 양주, 문종 이후 충열왕까지는 남경, 충선왕 이후 고려말까지 한양부로 불리었다.
조선시대 용산지역은 초기는 한성부에 속했으며 후기에는 용산방 지역이 되었다. 용산구는 1896년 4월 한성부 용산방으로 시작하여 1910년 10월 조선총독부에 의해 한성부가 경성부로 개칭되면서 경기도에 편입되었다. 다음해인 1911년 4월 경성부내에 5부 8면제를 실시하면서 용산방이 용산면이 되었다.
그 후 경성부의 인구가 100만명에 이르고 주거지역이 급속히 팽창하면서 경성부 본청 행정만으로는 이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1943년 6월 '구제'를 실시, 행정기관으로 용산구역소를 설치하고 '구장'이 관할하게 되었다.
광복 후 1945년 10월 용산구역소의 명칭이 용산구로 개칭되고 1946년 10월 18일부터 '서울특별시 용산구'가 되었으며 당시에는 35개 법정동을 관할했다. 그 후 경제발전과 인구변동 등으로 인해 여러 차례 관할 구역의 조정을 거치다가 1995년 7월 1일 민선 제1기 출범을 계기로 본격적인 지방자치시대로 접어들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료11-용산구의 전경]
[3] 용산구 남영동
[자료12-남영동의 전경]
이제 용산구 중에서도 내가 태어난 남영동에 관해 알아보도록 하자.
남영동은 면적 1.19㎢, 인구 6,881명으로 서울특별시 용산구에 속한 동이다. 한강로를 따라서 형성된 직사각형의 지형이며, 동쪽은 용산동2가, 서쪽은 청파동3가·원효로1가, 남쪽은 한강로1가·용산동1가, 북쪽은 갈월동·후암동과 접해 있다. 동 이름은 서울의 남쪽인 이곳에 군영(軍營)이 있었다 하여 붙여졌다.
행정동인 남영동은 법정동인 남영동, 갈월동, 동자동, 용산동1가를 관할한다.
갈월동은 이 일대에 칡이 많이 자랐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갈월도사라는 사람이 살았기 때문에 유래된 이름이라고도 한다. 갈월동을 옛날에는 부룩배기라고 하였는데, 14번지 일대의 산줄기가 불룩하게 나온 데에서 유래한다.
동자동의 동 이름 유래는 명확치 않으나 서계동의 동쪽에 있다 하여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동자동은 예전부터 교통의 요지였다. 지하철 4호선 서울역과 철도 시발점인 서울역이 있는데, 서울역사는 중구 봉래동 관할로 있으나 서울역 남쪽 구내는 대부분 동자동 지역에 속해 있다.
용산동1가 지역은 대부분 미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다. 옛날 육군본부 자리에 전쟁기념관이 들어서 있고, 한강로변에 미국공보원이 있다.
[4] 용산구의 발전 방향
용산구는 3대 도심지역중 하나로써 중심업무, 중심상업, 그리고 더불어 인구분산 기능까지 담당해 왔다. 그러나 최근 이슈화 되고 있는 미군기지로 인하여 한동안 그 부근지역의 개발이 제한되었고 이로인해 내국인들의 투자나 자본유입이 수월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또한 외국인들이 지나치게 많이 있다는 내국인들의 편견 때문에 쉽게 접근할 수 없었던 지역임도 확실하다. 그러나 최근 평택으로 미군기지가 이전한다는 발표 후 많은 투자자들이 용산구를 집중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묶여있던 수천만평의 대지들이 새로운 개발을 기다리고 있다. 또한 과거의 모습을 탈피하고 현대식으로 개장한 용산역이나 한남동과 이태원 일대의 지역특구구역은 더 많은 관광객을 불러모을수 있는 대단한 유효자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쪽에서는 미군기지 철수가 곧 외국인의 감소로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물론 미군기지가 용산구에 자리함으로써 외국인의 유입을 유도한 것은 사실이나 이미 그들의 정착깊이가 쉽게 이동할 만큼 얕지 않고 다른곳으로 이전하지 못할만큼의 편의가 이미 용산구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외국인의 이동은 생각처럼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용산구는 이미 도심지역의 역할을 충분히 해내고 있기 때문에 외국인의 유출입에 쉽게 영향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용산구의 관광자원들, 상업지구들, 중심업무지구, 그리고 점점 생활환경이 개선되고 있는 주거지구까지- 용산구는 다방면에 거쳐 굉장히 많은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여러 역할이 중첩되면 그 각각의 역할에 대해서는 소흘해 질 수 있는 우려도 있으나 그 우려가 무색할 만큼 용산구는 매 역할마다 충실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듯 긍정적 방향으로 꾸준한 발전이 지속된다면 용산구는 좀더 눈부신 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 발전 가능성이 많은 도시라고 할 수 있겠다.
3. 결 론
이제까지 용산구에 대해 많은 부분을 살펴보았다. 이지역의 지리적 위치, 역사, 인구, 문화관광자원등 한 지역의 특색 있는 부분들을 알아봄으로써 미흡하나마 내가 태어난 곳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이제까지 나의 고향에 대한 개념조차도 정립되지 않은 체 바쁘게 살아왔다. 사실 고향을 되짚어 보는 일 자체가 굉장한 시간낭비이고 의미 없는 작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 과제를 통해 나의 고향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 보니 굉장히 뿌듯하기도 했고 신기하기도 한 시간이었다. 물론 현재 내가 거주하고 있는 이곳도 나에게는 중요한 곳이겠지만 -아니 어찌보면 현재의 내 시각으로는 고향보다는 이곳의 환경이 지금에 나에게 미치는 영향이 더욱더 지대하겠지만- 내가 태어난 곳을 둘러보고 그곳이 어떤 곳인지에 대해 알아보는 것 또한 현재의 나를 알아보는 과거의 발자취 더듬기라고 할 수 있을 듯 싶다.
이번 과제를 통해 더불어 내 과거까지도 돌아볼 수 있게 되어서 뜻 깊은 시간이었다.
이같은 외국인 중심 지역들은 용산구를 더욱 특색있게 만들고 내국인의 발길마저 잡아끄는 역할을 한다.
[자료10-이촌동의 리틀도쿄: 말 그대로 일본을 옮겨 놓은듯한 인상이다.]
[2] 용산구의 역사
우리 역사에서 용산지역을 포함한 한강 유역에 최초로 정치 세력이 등장한 것은 초기 백제였으며 마한을 정복하고 점차 세력을 확장하여 초기 고대 국가로 발전하는 역사의 흐름 속에 용산 지역도 자연적으로 백제의 정치권에 포함되었다.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정책으로 백제는 한강유역을 고구려에 내주고 웅진으로 천도하게 되어 용산지역도 77년간 고구려에 편입되었다. 이후 삼국이 통일되어 통일신라시대로 이어지면서 용산지역은 한산주, 한양군 등으로 관할을 바꾸게 되었으며 고려시대에는 국초부터 정종때까지 양주, 문종 이후 충열왕까지는 남경, 충선왕 이후 고려말까지 한양부로 불리었다.
조선시대 용산지역은 초기는 한성부에 속했으며 후기에는 용산방 지역이 되었다. 용산구는 1896년 4월 한성부 용산방으로 시작하여 1910년 10월 조선총독부에 의해 한성부가 경성부로 개칭되면서 경기도에 편입되었다. 다음해인 1911년 4월 경성부내에 5부 8면제를 실시하면서 용산방이 용산면이 되었다.
그 후 경성부의 인구가 100만명에 이르고 주거지역이 급속히 팽창하면서 경성부 본청 행정만으로는 이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1943년 6월 '구제'를 실시, 행정기관으로 용산구역소를 설치하고 '구장'이 관할하게 되었다.
광복 후 1945년 10월 용산구역소의 명칭이 용산구로 개칭되고 1946년 10월 18일부터 '서울특별시 용산구'가 되었으며 당시에는 35개 법정동을 관할했다. 그 후 경제발전과 인구변동 등으로 인해 여러 차례 관할 구역의 조정을 거치다가 1995년 7월 1일 민선 제1기 출범을 계기로 본격적인 지방자치시대로 접어들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료11-용산구의 전경]
[3] 용산구 남영동
[자료12-남영동의 전경]
이제 용산구 중에서도 내가 태어난 남영동에 관해 알아보도록 하자.
남영동은 면적 1.19㎢, 인구 6,881명으로 서울특별시 용산구에 속한 동이다. 한강로를 따라서 형성된 직사각형의 지형이며, 동쪽은 용산동2가, 서쪽은 청파동3가·원효로1가, 남쪽은 한강로1가·용산동1가, 북쪽은 갈월동·후암동과 접해 있다. 동 이름은 서울의 남쪽인 이곳에 군영(軍營)이 있었다 하여 붙여졌다.
행정동인 남영동은 법정동인 남영동, 갈월동, 동자동, 용산동1가를 관할한다.
갈월동은 이 일대에 칡이 많이 자랐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갈월도사라는 사람이 살았기 때문에 유래된 이름이라고도 한다. 갈월동을 옛날에는 부룩배기라고 하였는데, 14번지 일대의 산줄기가 불룩하게 나온 데에서 유래한다.
동자동의 동 이름 유래는 명확치 않으나 서계동의 동쪽에 있다 하여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동자동은 예전부터 교통의 요지였다. 지하철 4호선 서울역과 철도 시발점인 서울역이 있는데, 서울역사는 중구 봉래동 관할로 있으나 서울역 남쪽 구내는 대부분 동자동 지역에 속해 있다.
용산동1가 지역은 대부분 미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다. 옛날 육군본부 자리에 전쟁기념관이 들어서 있고, 한강로변에 미국공보원이 있다.
[4] 용산구의 발전 방향
용산구는 3대 도심지역중 하나로써 중심업무, 중심상업, 그리고 더불어 인구분산 기능까지 담당해 왔다. 그러나 최근 이슈화 되고 있는 미군기지로 인하여 한동안 그 부근지역의 개발이 제한되었고 이로인해 내국인들의 투자나 자본유입이 수월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또한 외국인들이 지나치게 많이 있다는 내국인들의 편견 때문에 쉽게 접근할 수 없었던 지역임도 확실하다. 그러나 최근 평택으로 미군기지가 이전한다는 발표 후 많은 투자자들이 용산구를 집중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묶여있던 수천만평의 대지들이 새로운 개발을 기다리고 있다. 또한 과거의 모습을 탈피하고 현대식으로 개장한 용산역이나 한남동과 이태원 일대의 지역특구구역은 더 많은 관광객을 불러모을수 있는 대단한 유효자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쪽에서는 미군기지 철수가 곧 외국인의 감소로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물론 미군기지가 용산구에 자리함으로써 외국인의 유입을 유도한 것은 사실이나 이미 그들의 정착깊이가 쉽게 이동할 만큼 얕지 않고 다른곳으로 이전하지 못할만큼의 편의가 이미 용산구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외국인의 이동은 생각처럼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용산구는 이미 도심지역의 역할을 충분히 해내고 있기 때문에 외국인의 유출입에 쉽게 영향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용산구의 관광자원들, 상업지구들, 중심업무지구, 그리고 점점 생활환경이 개선되고 있는 주거지구까지- 용산구는 다방면에 거쳐 굉장히 많은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여러 역할이 중첩되면 그 각각의 역할에 대해서는 소흘해 질 수 있는 우려도 있으나 그 우려가 무색할 만큼 용산구는 매 역할마다 충실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듯 긍정적 방향으로 꾸준한 발전이 지속된다면 용산구는 좀더 눈부신 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 발전 가능성이 많은 도시라고 할 수 있겠다.
3. 결 론
이제까지 용산구에 대해 많은 부분을 살펴보았다. 이지역의 지리적 위치, 역사, 인구, 문화관광자원등 한 지역의 특색 있는 부분들을 알아봄으로써 미흡하나마 내가 태어난 곳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이제까지 나의 고향에 대한 개념조차도 정립되지 않은 체 바쁘게 살아왔다. 사실 고향을 되짚어 보는 일 자체가 굉장한 시간낭비이고 의미 없는 작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 과제를 통해 나의 고향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 보니 굉장히 뿌듯하기도 했고 신기하기도 한 시간이었다. 물론 현재 내가 거주하고 있는 이곳도 나에게는 중요한 곳이겠지만 -아니 어찌보면 현재의 내 시각으로는 고향보다는 이곳의 환경이 지금에 나에게 미치는 영향이 더욱더 지대하겠지만- 내가 태어난 곳을 둘러보고 그곳이 어떤 곳인지에 대해 알아보는 것 또한 현재의 나를 알아보는 과거의 발자취 더듬기라고 할 수 있을 듯 싶다.
이번 과제를 통해 더불어 내 과거까지도 돌아볼 수 있게 되어서 뜻 깊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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