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세력으로 자리 잡는다. 공업화에서 또 하나의 주요 동력은 국제관계의 긴장인데, 이것이 고조되는 가운데 소련은 정상적인 외교경로와, 코민테른을 통한 두 가지 모순적인 방향으로 대응했다. 코민테른은 1928년에 채택된 전투적 정책을 고수하였는데 이는 결국 정상적 외교경로를 통한 소련의 정책에 장애를 초래했다. 이런 모순적 대응 태도는 1934년까지 계속되었고 히틀러의 대두에 일조를 했다. 히틀러가 등장하고 그 위협이 점점 현실화 되자 이 모순적 두 정책은 합류하기 시작하고, 1934년 국제연맹에 가입,1935년 프랑스와 상호원조 조약을 맺었다. 1938년과 1939년에 소련은 일본의 원동지역 침공을 격퇴해야만 했는데 폴란드와 루마니아는 소련에 대해 적대적 태도를 보였고, 구미제국은 무시하고 주변국들은 사방에서 위협을 가하는 상황에서 소련은 극도의 고립감과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고 그 결과 1939년8월에는 나치 독일과 사회주의 소련간에 10년간 불가침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에 따라 소련은 공업화에 절실하게 필요했던 공산품과 군수물자를 얻을 수 있었고 영토병합과 함께 국가안보상의 문제를 조금이나마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더욱 큰 문제는 독일의 그 다음 목표가 소련이라는 사실이다.
2)대조국전쟁
소련은 1941년6월22일 독일의 침공으로 시작된 대조국 전쟁 초기에 엄청난 패배를 겪었다. 그러나 스탈린그라드 대공방전을 계기로 전세를 역전시켜 1944년 말에 전국토를 회복하고,1945년5월8일에는 결국 독일의 항복을 받아냈다. 승리원인의 근본적인 것은 1930년대의 공업화정책에 힘입어 소련이 독일과 맞먹는 공업생산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 이었다.이로 인해 소련은 국부의 1/3을 잃었다. 이는 전후 복구에 필요한 소중한 인적 자원의 엄청난 손실을 뜻했다.
3)냉전
소련의 전후 발전에 중요한 변수는 냉전이었다. 1949년 중국의 공산당 집권,1950년 한국전쟁 등으로 미소간의 냉전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발전했다. 대조국 전쟁과 냉전의 결합은 전후 소련에 다시한번 파국적인 경제적. 정치적 효과를 강요했다. 소련은1930년대의 양상을 되풀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완만하지만 뚜렷한 변화를 이룩하게 된 계기는 절대 권력자인 스탈린의 죽음이다.
5. 사회주의의 희망과 좌절(1953~1991년)
구미로부터의 소외가 계속되면서도 소련의 초강대국 지위는 유지되었고, 정치및 경제면의 권력은 여전히 국가의 손에 있었으며, 당의 영향력도 그대로 남았다. 이런 틀 안에서도 소련의 생활 모든 면에서 질적인 변화가 일어났는데 스탈린의 후계자들은 정치적 폭력과 자의적 체포를 줄이는 쪽으로 움직였다. 그 결과 권력투쟁에서 지더라도 죽는 일은 없어졌다. 이런 고위층의 변화는 일반 사회에도 영향을 나타냈다. 억압적 체제의 완화 시도는 체제의 위기를 가져올 가능성이 컸지만, 소련 정부는 안정 속에 일단은 이를 잘 극복해 나갔다. 스탈린의 계승자들, 특히 흐루시초프는 농업부문의 관계를 반전시켰다. 공업의 수혜부문으로 역전시켜 농업기계화, 관개, 배료생산 등에 엄청난 투자를 했고 그로인해 공업생산의 증가는 한층 더 두르러졌다. 생산력 증가는 곧바로 생활수준의 향상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경제 발전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다른 분야에서도 일련의 변화가 있었는데 탈 스탈린화와 더불어 지적 세계에 대한 통제는 완화되고 그 방식도 세련되었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은 상대적 자율성을 얻어가던 이들 집단의 반발을 일으킴으로써 1946년에 흐루시초프는 실각했고, 그의 후계자인 브레즈네프는 현상유지를 추구하는 정책으로 일관했다. 이런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동안, 노동자와 농민들의 지위와 발언권도 강화되었다. 또한 교육기회의 확대로 대중의 의식수준은 전반적으로 높아지고 있었다. 집단이기주의적 경향을 보이던 당 및 국가기구와 인민의 대립관계가 생겨날 소지가 있게 된 것이다. 이런 대립관계를 성숙시킨 것은 1970년대 후반부터 찾아온 경제 침체였다. (경제력의 단순한 성장도 이루어지지 않는 가운데, 인민의 욕구는 경제력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짐에 따라 양자의 괴리는 점점 더 심화되었던 것이다) 미국과의 군비경쟁은 계속되고 동부 유럽 및 제3세계의 우방에 대한 원조는 증가한 반면, 생산에 대한 투자나 인민생활의 개선을 위한 비용은 감소할 수밖에 없었고, 이런 상황은1980년대로 넘어가면서 더욱 심화되어 사회는 전반적으로 무력감에 빠지게 되었다. 브레즈네프 후기에는 ‘안정화정책’이 꾸준히 추진되었기 때문에 큰 변화를 요구하는 사회의 전반적 재편작업을 기대하기 어려웠고, 이 과제를 떠맡은 사람이 고르바초프였다.1985년에 당 총서기로 취임한 그는 소련 사회의 과제를 재편이나 개혁을 뜻하는‘페레스트로이카’로 설정하고 ‘글라스노스트’정책을 천명했다. 이 양대 정책은 소련 사회의 병리 현상에 아주 적절한 처방이었으나 소련 사회에 엄청난 혼란을 가져올 소지가 컸고 실제로 그러했다. 일종의 힘의 진공상태가 발생하고 경제의 부진 속에 인민의 생활고가 가중되자, 각종 정치 선동이 난무하는 가운데 사회 혼란은 극심해졌고, 1991년8월에 공산당 내 일부 보수파는 쿠데타를 감행 하 게된다. 그 결과 공산당은 권위가 땅에 떨어진 채 불법화되었고 연방을 유지해주던 핵심적 고리인 공산당의 소멸로 연방의 해체도 가속화 되었으며,쿠데타의 저지에 앞장섰던 자본주의 신봉자 옐친 러시아 대통령을 중심으로 급속히 세력 개편이 이루어졌다. 결국 소련은 1991년 말에 해체라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6.맺는 말
소련은 1928년에서 1941년에 걸친 세 차례의 5개년계획의 결과 강력한 공업국으로 대두했고 서방의 예상을 뛰어넘는 빠른 속도로 대조국전쟁의 피해를 회복 했으며, 그 이후에도 1975년 무렵까지는 꾸준히 경제발전을 이룩했다. 이는 볼셰비키가 사회주의의 기본적 토대로 생각했던 생산력의 엄청난 증대를 의미하는 것으로서,1930년대의 공업화가 갖는 의의가 얼마나 큰가를 보여준다. 공업화의 원동력은 인민의 지지와 함께 사회 전 분야의 인민에 대한 폭력이었다. 한편 공업화 기간 동안 넓은 의미의 공산당 지배가 확립되었고, 이는 전 후에도 계속되었다.
2)대조국전쟁
소련은 1941년6월22일 독일의 침공으로 시작된 대조국 전쟁 초기에 엄청난 패배를 겪었다. 그러나 스탈린그라드 대공방전을 계기로 전세를 역전시켜 1944년 말에 전국토를 회복하고,1945년5월8일에는 결국 독일의 항복을 받아냈다. 승리원인의 근본적인 것은 1930년대의 공업화정책에 힘입어 소련이 독일과 맞먹는 공업생산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 이었다.이로 인해 소련은 국부의 1/3을 잃었다. 이는 전후 복구에 필요한 소중한 인적 자원의 엄청난 손실을 뜻했다.
3)냉전
소련의 전후 발전에 중요한 변수는 냉전이었다. 1949년 중국의 공산당 집권,1950년 한국전쟁 등으로 미소간의 냉전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발전했다. 대조국 전쟁과 냉전의 결합은 전후 소련에 다시한번 파국적인 경제적. 정치적 효과를 강요했다. 소련은1930년대의 양상을 되풀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완만하지만 뚜렷한 변화를 이룩하게 된 계기는 절대 권력자인 스탈린의 죽음이다.
5. 사회주의의 희망과 좌절(1953~1991년)
구미로부터의 소외가 계속되면서도 소련의 초강대국 지위는 유지되었고, 정치및 경제면의 권력은 여전히 국가의 손에 있었으며, 당의 영향력도 그대로 남았다. 이런 틀 안에서도 소련의 생활 모든 면에서 질적인 변화가 일어났는데 스탈린의 후계자들은 정치적 폭력과 자의적 체포를 줄이는 쪽으로 움직였다. 그 결과 권력투쟁에서 지더라도 죽는 일은 없어졌다. 이런 고위층의 변화는 일반 사회에도 영향을 나타냈다. 억압적 체제의 완화 시도는 체제의 위기를 가져올 가능성이 컸지만, 소련 정부는 안정 속에 일단은 이를 잘 극복해 나갔다. 스탈린의 계승자들, 특히 흐루시초프는 농업부문의 관계를 반전시켰다. 공업의 수혜부문으로 역전시켜 농업기계화, 관개, 배료생산 등에 엄청난 투자를 했고 그로인해 공업생산의 증가는 한층 더 두르러졌다. 생산력 증가는 곧바로 생활수준의 향상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경제 발전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다른 분야에서도 일련의 변화가 있었는데 탈 스탈린화와 더불어 지적 세계에 대한 통제는 완화되고 그 방식도 세련되었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은 상대적 자율성을 얻어가던 이들 집단의 반발을 일으킴으로써 1946년에 흐루시초프는 실각했고, 그의 후계자인 브레즈네프는 현상유지를 추구하는 정책으로 일관했다. 이런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동안, 노동자와 농민들의 지위와 발언권도 강화되었다. 또한 교육기회의 확대로 대중의 의식수준은 전반적으로 높아지고 있었다. 집단이기주의적 경향을 보이던 당 및 국가기구와 인민의 대립관계가 생겨날 소지가 있게 된 것이다. 이런 대립관계를 성숙시킨 것은 1970년대 후반부터 찾아온 경제 침체였다. (경제력의 단순한 성장도 이루어지지 않는 가운데, 인민의 욕구는 경제력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짐에 따라 양자의 괴리는 점점 더 심화되었던 것이다) 미국과의 군비경쟁은 계속되고 동부 유럽 및 제3세계의 우방에 대한 원조는 증가한 반면, 생산에 대한 투자나 인민생활의 개선을 위한 비용은 감소할 수밖에 없었고, 이런 상황은1980년대로 넘어가면서 더욱 심화되어 사회는 전반적으로 무력감에 빠지게 되었다. 브레즈네프 후기에는 ‘안정화정책’이 꾸준히 추진되었기 때문에 큰 변화를 요구하는 사회의 전반적 재편작업을 기대하기 어려웠고, 이 과제를 떠맡은 사람이 고르바초프였다.1985년에 당 총서기로 취임한 그는 소련 사회의 과제를 재편이나 개혁을 뜻하는‘페레스트로이카’로 설정하고 ‘글라스노스트’정책을 천명했다. 이 양대 정책은 소련 사회의 병리 현상에 아주 적절한 처방이었으나 소련 사회에 엄청난 혼란을 가져올 소지가 컸고 실제로 그러했다. 일종의 힘의 진공상태가 발생하고 경제의 부진 속에 인민의 생활고가 가중되자, 각종 정치 선동이 난무하는 가운데 사회 혼란은 극심해졌고, 1991년8월에 공산당 내 일부 보수파는 쿠데타를 감행 하 게된다. 그 결과 공산당은 권위가 땅에 떨어진 채 불법화되었고 연방을 유지해주던 핵심적 고리인 공산당의 소멸로 연방의 해체도 가속화 되었으며,쿠데타의 저지에 앞장섰던 자본주의 신봉자 옐친 러시아 대통령을 중심으로 급속히 세력 개편이 이루어졌다. 결국 소련은 1991년 말에 해체라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6.맺는 말
소련은 1928년에서 1941년에 걸친 세 차례의 5개년계획의 결과 강력한 공업국으로 대두했고 서방의 예상을 뛰어넘는 빠른 속도로 대조국전쟁의 피해를 회복 했으며, 그 이후에도 1975년 무렵까지는 꾸준히 경제발전을 이룩했다. 이는 볼셰비키가 사회주의의 기본적 토대로 생각했던 생산력의 엄청난 증대를 의미하는 것으로서,1930년대의 공업화가 갖는 의의가 얼마나 큰가를 보여준다. 공업화의 원동력은 인민의 지지와 함께 사회 전 분야의 인민에 대한 폭력이었다. 한편 공업화 기간 동안 넓은 의미의 공산당 지배가 확립되었고, 이는 전 후에도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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