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산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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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조치로서 무기몰수를 감행하여 동대사 대불을 조성한다는 지략을 쓰서 못,칼,창,총등을 사찰에서 몰수했다.
그는 불교를 탄압하기는 하였지만 비교적 우호적이었고 지진으로 인하여 대불이 파괴되자 불상을 조성하기도 하였다.
또한 오다노부나가 파괴한 히에산과 본원사 등을 복원 및 보호하므로 불교부흥책을 폈다. 그는 승려들에게 학문을 권장하였으며, 지계생활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불교부흥에 의한 민심수습차원과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려고 하는 뜻이 숨겨져 있었다고 볼 수도 있으나 한편으로는 통일정책에 불교계의 힘이 필요함을 인식하여 불교를 이용하자는 심산이었을 것이다.
특히 묘심사와 도요도미 히데요시와는 깊은 인연이 있는데, 히데요시의 아들인 풍신엽군이 3살 때 죽었는데 그의 장례를 묘심사의 51대 주지인 직지가 법주가 되어 지냈다. 또한 풍신수길은 선승의 대표격인 오산승이나 림하승들과는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는 문맹인 무신들이 외교적인 면이 약함을 알고 외교면에서 지식층인 오산승들에게 의지하였다. 오산승들은 외교문서의 작성에 능숙하였으며, 임진왜란때에는 상국사의 사이쇼쇼타이와 남선사의 겐보레이산, 동복사의 이꾜에이데즈등의 선승들이 참여하여 외교적인 면과 전쟁 참모역할을 담당하였다.
●덕천가강
도쿠가와이에야스는 정토종의 신도와 묘심사의 단월로서 선종과 깊은 관계였다.
유배생활 로 묘심사에 감금이 되어있었을 때 태원종부에게 교육을 받게 되어 종교적 인격적 면에서 도취하게 된다. 오산파 승려들과 교류를 가짐.
★ 풍신수길이 종불사를 하면서 기원명을 새길때 동복사의 대문장가 청한을 초청하여 글을 넣었는데
國家安康 君臣 樂
左僕射 源朝臣家康公
이라고 새겼는데 후에 "덕천가강이 죽기를 기원하며 치는 종이다" 라고 해석하여 문제를 삼음
●이심숭전과 자의사건
숭전은 무인들의 통과의례를 만들고 기독교를 탄압하는 안을 만들었다.
원래 남선사 승려인데 문장의 재능으로 가강에게 접근하여 문서를 기초하는 직책에 종사하다가 점차 능력을 인정받아 장악에 참여한다. 그의 대단한 수완은 "가사를 입은 총리다"라는 칭송을 들을 정도였으며, 남선사 승려이기에 남선사를 제외한 다른 절에게 차별을 두어 자의를 남선사 승려만 입게하고 그 외는 제외하는 등, 출가 30년이 지나고 1,700공안을 타파해야 주지를 할 수 있고 제자를 둘 수 있다고 제재를 가함. 그래서 다쿠앙 선사들이 항의문을 제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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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6페이지
  • 등록일2006.06.25
  • 저작시기2003.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56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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