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소의 대한반도 정책과 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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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미, 소의 대한반도 정책과 분단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제 2차 세계대전과 동아시아 재편 구도

Ⅱ. 대국의 한반도 정책
1. 미국의 대한반도정책(1945~1948)
(1) 미국의 대소련관
(2) 미군 상륙과 남한 정국
(3) 미군정 초기의 정책 기조
(4) 미군정의 좌파 탄압정책
2. 소련의 대한반도정책(1945~1948)
(1) 대한 정책의 배경
(2) 소련군의 진주와 초기 점령 정책
(3) 소련의 북한정권수립 구상

Ⅲ. 미ㆍ소의 대한반도정책이 한국 분단에 끼친 영향

본문내용

연합을 기본으로 한 비교적 ‘진보적인’ 정책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이러한 소군정의 정책방향은 한국인의 운동이 이미 소련에 대한 친화성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지, 소군정의 정책적 본질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었다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북한에 친소정권을 수립하려는 대국 소련의 이해에 위배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경우에는 소련도 한민족의 자주적인 정치행위를 억압할 충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소군정의 북한 정책의 성격은 스탈린 지령이 전달된 직후인 10월 31일 조선공산당 서북 5도 책임자 및 열성자 대회에서 북한만의 공산당조직인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결성된 것을 출발로 점차 현실화되어간다. 소련은 북한에서 안정적으로 친소정권을 수립하는 기초로서, 우선 북조선만의 공산당을 조직하고 이를 기반으로 김일성을 비롯해 친소적인 좌파 세력을 결집해갔다. 또한 10월 8일부터 10일까지 개최되었던 북조선 5도 인민위원회 연합회의에서 각 지역의 정권기관을 인민위원회로 통일시켜 도 인민위원회 연합회의에서 각 지역의 정권기관을 인민위원회로 두는 행정체계를 확립하였고, 이를 통제하는 중앙기구에 농상관리, 산업과 공업, 재정과 금융, 행정의 4개 분과를 설치하는 등 전권수립의 기초를 정비해 나갔다. 이후 11월에 수립된 북조선 5도 행정국, 1946년 2월에 수립된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라는 코스를 밟아 결국 좌파가 주도하는 북한만의 친소적인 정권기관으로 귀결해 갔다.
이와 같이 대국 소련의 북한정책은 표면적으로는 비교적 한국인 스스로의 자주적인 정치운동을 수용하는 듯이 보였지만, 실제로는 친소적인 좌파세력을 중심으로 초기부터 북한만의 친소정권을 수립하는 데 주안을 두고 있었다. 이러한 소련의 정책기조는 초기에는 유화적인 국면을 연출했지만 결국 조만식 등 북조선 내부의 통일지향적인 세력에 대한 탄압, 미소공위에서의 배타적인 대응,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북한단독정권의 강화를 초래하는 결정적 요인으로서 작용하게 된다.
Ⅲ. 미ㆍ소의 대한반도정책이 한국 분단에 끼친 영향
한국 분단의 책임에 관하여 그동안 많은 논의가 있어왔다. 분단의 원인을 일본군의 항복을 접수한다는 단순한 군사적 목표로 한반도를 점령했던 소련과 미국에 돌리는 외인론, 우리 민족의 정치적 역량이 주원인이었다는 내인론이 있다.
내인론의 논리는 분단 당시가 미국과 소련이 냉전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이전이었으므로 우리 민족의 정치적 역량 특히 정치지도자들이 민족의 이익에 투철했다면 이념상으로나 국제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오스트리아 형의 정부를 세워 민족의 독립과 통일을 달성할 수 있었으리라는 견해이다. 그러나 아무리 당시 정치지도자들이 민족적 주체성이 강하고 지도역량이 높아서 미국과 소련의 유도에 부화뇌동하지 않았다 해도, 냉정은 소련의 동유럽 점령과 트루먼의 대통령 취임과 때를 같이 하여 개시되었으며, 한반도는 극동에 있어서 냉전의 첫 번째 결전장이 되었다. 따라서 한국 분단에 대한 원인을 규명함에 있어서 내인론은 논리의 근거가 취약하다.
외인론에 있어서도 미국의 책임을 강조하는 논리는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후 자국 중심의 새로운 세계질서의 구축을 기도했다는 가정에 기초한다. 즉 미국은 소위 얄타 체제를 통한 집단안전보장, 브레턴우즈 체제를 통한 세계 경제의 장악을 이용하여 적극적으로 세계적 패권을 모색했다는 것이다. 이는 그럴 듯한 명분으로 외교의 원칙을 세우고 내용상에서는 제국주의를 관철해왔던 전철의 연속일 뿐이라는 논리이다. 이 논리에도 일리는 있으나, 한국에 적용하기에는 적합지 못한 점이 많다.
분단의 책임의 가장 큰 원인은 소련의 한반도 정책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그리고 전후에 있어서 소련은 한반도를 동유럽과 동일하게 국가안보상 중요지역으로 보였다. 따라서 주축국으로부터 해방시킨 후 민족ㆍ공산 세력의 연합정권을 수립, 점차 공산당이 이끄는 사회주의 위성국으로 만든다는 적극적ㆍ혁명적인 정책을 구체적 행동 계획으로 제2차 세계대전 중 치밀하게 수립하여 소련군의 북한 진주와 함께 체계적으로 실천에 옮겼다. 결국 1946년 7월 스탈린은 김일성을 모스크바로 불러 북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지시하였다.
스탈린의 팽창 노선에 대항하여 미국은 전세계적 차원에서 봉쇄정책을 점차 수립했으나 미국의 전략상 중요 지역은 서부 및 남부 유럽, 터키, 동양에서는 일본이었던 반면에 한국은 주변 지역에 불과하여 미국이 일본에서 보여주었던 민주개혁을 추진할 만한 행정지원과 경제원조를 할애할 수 없었다. 더욱이 1946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의회를 장악하면서 사정은 더욱 악화되어 미군정은 남한에서 민주주의의 쇼케이스를 만들 자원이 부족했고, 미 군부는 군사력이 부족하여 전력배치상 우선순위가 높은 지역으로 주한미군을 옮기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의 한반도정책은 소련의 공세에 대해 최소한의 방어에 그쳤고 유엔이라는 편리한 기구에 한국문제를 이관하여 체면을 유지하면서 그나마 차지했던 38선 이남에 유약한 반공정권을 세우는데 만족하고 군대를 철수하고 말았다.
4개국에 의한 신탁 통치 해결방안은 처음부터 성공 가능성이 희박했다. 미국은 통일된 한국 정부를 세우기 원했던 반면에, 소련은 통일된 공산국가를 수립하려고 노력하였다. 미ㆍ소 간의 협상이 실패한 근본적인 원인은 양국 모두 한반도가 적대국에 의해 지배되는 것을 반대하는데 있었다. 4개국에 의한 신탁통치안이 실패하고 남북한의 분단이 고착화되자, 한반도는 미ㆍ소 간의 공동통치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참 고 문 헌
홍인숙, 『대국 미ㆍ소와 한민족 분단』(서울 : 경인문화사, 1973)
강만길, 『한국현대사』(서울: 창작과 비평사, 1984)
일월서각편집부편, 『분단전후의 현대사』(서울: 일월서각, 1983)
심지연, 『미소공동위원회연구』(서울: 청계연구소, 1989)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현대사 연구소, 『한국현대사의 재인식 1: 해방정국과 미소군정』(서울 : 도서출판 오름, 1998)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현대사 연구소, 『한국현대사의 재인식 2: 정부수립과 제헌국회』(서울 : 도서출판 오름, 1998)

키워드

미국,   소련,   대한반도,   정책,   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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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6.24
  • 저작시기200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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