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도자기-고려청자분석(A+레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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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의 도자기-고려청자분석(A+레포트)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도자공예의 정의 및 도자기의 분류
1) 도자공예의 정의
2) 도자기의 분류
3) 도자공예에 사용되는 점토 (粘土),

2. 한국의 도자기

3. 고려청자
1) 청자의 기원
2) 고려청자의 기원
3)고려청자의 특징과 변천과정
4) 고려청자의 종류
5) 도요지

4. 결론

5. 참고문헌

본문내용

고려시대의 전성기인 12세기 전반에 많이 발달하였다.
(5) 연리문청자
청자의 태토에 백토(白土)와 자토(赤土)를 합쳐서 다시 반죽하면 세가지 태질이 서로 갈아 포개져서 목리문(木理文) 비슷한 무늬를 나타내게 된다. 그 위에 투명유를 씌워서 구우면 청자태(靑磁胎)는 회색(灰色)으로 백토태(白土胎)는 백색(白色)으로 자토태(赤土胎)는 검은색으로 발색(發色)되어 여러 무늬의 조화를 이루는 변화를 갖게 된다.
5) 도요지
전라남도 강진군(康津郡)의 90여 개소, 전라북도부안군(扶安郡)의 60여 개소를 비롯해 대전광역시 부근, 경기도 고양군, 황해 송화군(松禾郡), 평안남도강서군(江西郡) 등에서 각각 요지가 발견되었다. 고려 조정이 요지를 경영했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고려사(高麗史)》에 제요직(諸窯直)이라는 관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정의 관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출토된 파편으로 보아 강진군대구면(大口面) 용운리(龍雲里)의 여러 요지는 초기의 것이며, 사당리(沙堂里)의 요지들은 최성기의 것임을 알 수 있고 여기서는 상감청자·회청자도 생산되었다. 부안군의 요지에서는 1938년 순청자·상감청자와 함께 백자·상감백자 파편들이 처음으로 출토되어 고려에서의 백자 생산이 확인되었고, 또 최성기 청자 조각과 함께 진사(辰砂)를 입힌 청자병의 파편이 나와 고려 진사자기의 가장 오래된 예로 주목을 끌었다.
고려시대 청자 가마터가 대게 강진과 같은 황해와 남해 바닷가나 바다와 가까운 곳에서 발견되는 것은 바다를 통해 중국 남송과 교류를 벌였던 지정학적인 이유 때문이다. 이는 무역 또는 상업 활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즉 5-6세기경 부터 중국에서 생산되던 청자가 한반도로 넘어와서 신라말기인 8-9세기 경에는 강진군 대구면 용운리에서 생산이 시작되어 14세기 쇠퇴기까지 500년 고려왕조동안 대구면 정수사에서 미산까지 6Km에 이르는 집단적인 청자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 당시 대구면에서 20km 떨어진 곳에는 동남아시아의 해상 무역을 장악하고 있었던 해상왕 장보고대사의 청해진이 중국과 활발한 무경긍ㄹ 전개하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한반도로 청자가 전래된 경로를 짐작케 하며 또한 중국 당나라와 교역이 이뤄진 영암군 당포와 마찬가지로 이곳 포구 인접 마을 이름이 당전이고 보면 이곳에도 청자와 관련해 당나라로 나아가던 포구가 있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전국적으로 발견된 4백여기의 옛 가마터 중 188기가 강진군 일대에 집중돼 있고 그 규모가 대구면 일대에만 모두 18만여평 규모에 퍼져 있는 것으로 볼 때 가히 청자문화의 꽃을 피운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욱이 현존하는 국내 국보와 보물급 중 80%가 용운리 일대에서 만들어 졌고 나라가 외세에 유린당하던 시절 일본과 프랑스 등 세계 곳곳으로 도둑질 당한 명품청자의 대부분도 이곳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중앙정부인 경주와 고려의 서울인 개성에서 천리길을 넘는 이곳 강진에서 부와 권력의 상징인 청기와 등 고급청자가 구워졌다는 것은 신라 말 이곳에 터를 잡은 이들이 중앙권력에 버금가는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반증한다
결론 적으로 강진 일대는 신라 말부터 강대한 토호들이 중국과 무역을 해왔으며 이 것을 계기로 중국의 자기인 청자를 받아들여 우리 고유의 색깔을 지닌 비색청자를 개발하고 이것을 수출하는 지역이 되었으며 그러다보니 도자기 생산지의 대부분이 강진 일대에 위치하게 된 것이다.
* 위 치 : 전남 강진군 대구면 일대
* 관 리 청 : 강진군 고려청자사업소 ( 전화 : 061-430-3565)
* 개 요 : 강진군 대구면 일대는 우리 나라 중세미술을 대표하는 고려청자의 생산지다. 1963년 사적 제68호로 지정된 대구고려청자도요지는 9세기부터 14세기까지 5백여 년간 집단적으로 청자를 생산했던 곳으로 9개 마을에 180여개소의 가마터가 분포되어 있으며, 약18만여평을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고려시대 집단적으로 청자를 생산했던 곳으로 이곳 강진과 부안 등을 들 수 있으나, 전국적으로 지금까지 발견된 400여기의 옛 가마터중 대부분이 이곳 강진에 분포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사당리는 제작기술이 최절정을 이룬 시기에 청자를 생산하였던 지역으로, 우리나라의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청자의 80%이상이 이곳에서 생산되었을 정도로 그기법의 천재 성과 예술적 가치를 세계적으로 인정받아 왔으며, 프랑스 루부르 박물관에도 보관되어 있다. 또한, 강진은 다른 지방에 비해 태토, 연료, 해운, 기후 등 여건이 적합하여 우리나라 청자 문화를 주도해 왔으나, 고려말기에 청자 기법이 쇠퇴한 후 600여년 동안 전승되지 못한채 단절되어 오던 것을 1977년부터 재현사업을 하여 재현에 성공하였다.
4. 결론
이번 발표를 준비하면서 느낀 점은, 세계적으로도 인정받고 있는 우리의 고려청자가 우리 나라에서의 보존 상태와 연구 결과가 외국의 고려청자의 관심과 비교해서도 부족한 실정이라는 점이다.
다행히도 최근, 한 공영방송에서 우리 문화재들의 뿌리를 찾자는 취지 아래, <위대한 유산 74434>라는 방송을 제작해 방영중이다. 해외로 유출된 문화재 뿐 아니라 우리 주변에 있는 문화재 조차 국민들에게 잊혀져 가고 있는 현실에, 한민족의 뿌리이자 자존심, 우리의 위대한 유산들을 바로 알고자 하는 우리 모두의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생각하며, 그러한 관심과 마음가짐을 바탕으로 후세에 현재 우리의 문화들 까지도 올바르게 전달되어, 민족의 뿌리가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5. 참고문헌
윤용이, 아름다운 우리 도자기, 학고재, 1996
정양모, 고려청자, 대원사, 1998
한길흥, 도자공예, 서울 산업대 출판부, 1994
고경보, 완도 어두리 해저유물에 관한 연구 :청자 도자기를 중심으로 , 우석대 교육대학원, 2004
김경진외, 강진 고려청자의 특성과 과학적 분석 연구, 한국공예논총, 2005
박경희, 고려 청자완의 시각적 문양에 상징된 철학사상, 시각디자인 학술지, 2004
고려청자 비취색의 비밀은 과학동아, 동아 사이언스, 2004
네이버 백과사전
청자, 그 손끝의 역사를 찾아서 http://myhome.shinbiro.com/~kdwdp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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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8.11
  • 저작시기200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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