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서론
- 불교의 정의
2. 본론
- 불교의 기원
- 창시자
- 경전
- 윤회사상
- 불교의 사상
- 한국불교의 전래
- 불교에서 알아야할 용어
(성불, 법우, 불자, 부처님, 염불, 기도, 독경, 공양, 참회, 발원, 불교의 명절, 스님, 삼보, 팔번뇌, 대승과 소승, 소임과 별칭, 연꽃, 5대 보궁, 심우도, 만자, 자비, 삼보사찰, 총림, 스님이 되는 과정, 불교에서 부르는 호칭 등)
3. 결론
- 한국불교의 오늘과 내일
- 불교의 정의
2. 본론
- 불교의 기원
- 창시자
- 경전
- 윤회사상
- 불교의 사상
- 한국불교의 전래
- 불교에서 알아야할 용어
(성불, 법우, 불자, 부처님, 염불, 기도, 독경, 공양, 참회, 발원, 불교의 명절, 스님, 삼보, 팔번뇌, 대승과 소승, 소임과 별칭, 연꽃, 5대 보궁, 심우도, 만자, 자비, 삼보사찰, 총림, 스님이 되는 과정, 불교에서 부르는 호칭 등)
3. 결론
- 한국불교의 오늘과 내일
본문내용
다. 즉 이타행(利他行)의 경지에 들어 중생제도에 나선 것을 비유한 것이다.
21. 만자(卍字)
범어 Srivatsalksana(수리밧살크사나), 만자(万字), 만자(萬字), 만자(卍字)라고도 한다. 길상해운(吉祥海雲), 길상희선(吉祥喜旋) 이라고도 쓴다. 길상(吉祥)과 행운의 표시이다. 삼십이상(三十二相)의 하나로 불타의 가르침에 덕상(德相)이 있고, 또 불타의 수족(手足), 두발(頭髮)과 허리에도 있다고 한다. 이에 상당한 범어는 네 가지가 있지만 Srivatsa(슈리밧사)란 말은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이 말은 모발이 말리어 겹치고 합해져 해운(海雲) 같은 모양이란 뜻이다. 따라서 만자(卍字)란, 길상만덕(吉祥萬德)이 모이는 곳을 뜻한다. 또한 만자는 십자와 마찬가지로 예로부터 세계 각지에서 사용되었는데, 그 기원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불교나 절을 나타내는 기호나 표시로 쓰이고 있다.
모양은 중심에서 오른쪽으로 도는 우만자와 왼쪽으로 도는 좌만자로 크게 나누어진다. 그런데 이 만(卍)자를 입체적으로 형상화시켜서 세워 놓고 볼 때 앞에서 보면 卍 모양이 되지만 뒤쪽에서 보면 右卍자 모양으로 보이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놀의 옛 조각에는 우만자가 많으나 중국, 한국, 일본에서는 굳이 구별하지는 않는다.
22. 자비의 의미
자비란 자기 이외의 사람들을 고뇌에서 자유롭게 해주는 것을 말한다. 자(慈)란 적극적으로 상대방에게 이익과 안락을 보태주는 것이고, 비(悲)란 고통받는 사람의 불이익과 괴로움을 덜어주는 것이다.
23. 삼보사찰
불보사찰 :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경남 양산 통도사
법보사찰 : 팔만대장경을 모신 합천 해인사
승보사찰 : 16국사를 배출한 전남 승주 송광사
24. 총림이란 경전을 배우는 강원, 선을 닦는 선원, 율을 배우는 율원이 다 갖추어진 사찰을 말하는 데 5개의 총림이 있다.
영축총림 : 양산 통도사
해인총림 : 합천 해인사
조계총림 : 전남 송광사
덕숭총림 : 예산 수덕사
고불총림 : 전남 백양사
25. 스님이 되는 과정(조계종 기준)
처음 출가를 하게 되면 2년정도 행자생활을 한다. 절의 허드렛일을 하면서 승려가 될 자격이 있는 가를 테스트 받고 나면 사미계(사미니)를 받고, 사미, 치문, 사집, 사교를 거치고 나면 정식으로 비구계를 받고, 포교활동을 한든가 아니면 선방에서 선을 닦게 된다.
26. 불교에서 부르는 호칭
남자스님 : 비구스님
여자스님 : 비구니스님
사미계를 받은 예비 남자스님 : 사미(행자)
사미니계를 받은 예비 여자스님 : 사미니
남자신도 : 거사, 처사, 우바새
여자신도 : 보살, 우바이
Ⅲ . 결론
1. 한국불교의 오늘과 내일
한국불교 1600년의 역사는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조선 500년의 억불시대와 일제식민지라는 기나긴 암흑기는 유구한 한국불교의 맥을 끊고 불교의 자주성을 앗아갔다. 그러나 1945년 해방이래 불교계는 그러한 시련을 딛고 불교의 정법화, 대중화, 현대화에 힘써왔다. 그럼에도 우리 불교계에는 안팎으로 해결해야 할 수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우선 안으로는 승속을 통틀어 불자 본연의 자세를 잘 지켜가고 있는지 반성해야 할 것이며, 밖으로는 급속히 변모해 가는 현대사회의 흐름 속에서 불교의 참뜻을 얼마나 잘 구현해내고 있는지를 되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불교계 내부를 반성함에는 무엇보다 먼저 그 잣대로 삼아야 할 것이 부처님의 계정혜 삼학의 가르침이다. 승속(僧俗)이 공히 지켜야 할 본분을 잘 지켜가고 있는지는 부처님이 제시한 계율에 의거하여야만 한다. 계율이라는 바른 생활토대가 없이 바른 지혜를 펴는 삶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대소승의 계율을 충분히 숙지하고 활용하여 향락화, 퇴폐화가 극으로 치닫는 오늘의 사회에 참다운 불자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이 사회를 정화해 가야 할 것이다. 다음 정(定)과 혜(慧)의 문제다. 바른 선정 없이는 바른 지혜가 나올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선정은 깨달음을 추구하는 불교적 삶에 있어서 바른 지혜가 나올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선정은 깨달음을 추구하는 불교적 삶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그러한 선을 교종에 상대적인 하나의 종파로 발전시킴으로써 많은 폐단을 낳기도 하였다. 현재 우리의 조계종이라는 명칭도 그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지금 우리는 이러한 명칭을 당위적으로 사용할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을 한번쯤 되돌아보아야 한다. 역대 큰스님들은 지혜가 부족하며 캄캄한 선정에 안주하는 암증선사와 문자의 바다 속에서 참다운 지혜를 열지 못하면서 경전을 읽고 강의하는 문자법사를 함께 경책해 왔다. 오늘날에도 이 두 가지 편협된 모습을 동시에 지양하는 바른 수행의 자세가 간절히 요구된다. 요즈음 들어 조사선(祖師禪)에 대한 여래선(如來禪)을 강조하며, 부처님 당시의 근본 선정수행으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이러한 시도 또한 우리 불교사를 되돌아보며 그 오류를 반성하고, 참다운 불자의 모습을 되찾는 맥락에서 수용하여야 할 것이다.
다음은 현대사회에 불교가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점철되었던 서구사회도 삭막하고 비인간적으로 흐르는 현대문명 속에서 불교의 연기적 세계관에 관심을 기울인지 오래다. 우리나라에서 불교는 더 이상 외래의 종교가 아니다. 1600여 년 간 우리 민족과 호흡을 같이하며 이미 우리화된 것이다. 연기적 세계관에 입각한 불교적 삶은 인류에 어떠한 변화가 오더라도 자비와 지혜의 정신으로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는 힘을 갖게 한다. 불교보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역사가 짧은 다른 종교도 그 열렬한 전파력으로 이제는 불교를 능가할 교세를 지닌 현실을 볼 때 불교는 이제 사회의 교육에 힘을 기울여야한다. 교육이란 강원이나 대학과 같은 상위교육기관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가장 어린 아이를 담당하는탁아소부터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나아가 대학교와 일반신도의 교육 등 다양한 교육체계를 확보하여 사회 구석구석까지 손길이 미치는 포교를 펼쳐나가야 할 것이다. 그것만이 불교가 미래사회에도 변함없이 감로의 법으로써 깨끗한 사회(淨土)를 구현해 갈 수 있는 길이다.
21. 만자(卍字)
범어 Srivatsalksana(수리밧살크사나), 만자(万字), 만자(萬字), 만자(卍字)라고도 한다. 길상해운(吉祥海雲), 길상희선(吉祥喜旋) 이라고도 쓴다. 길상(吉祥)과 행운의 표시이다. 삼십이상(三十二相)의 하나로 불타의 가르침에 덕상(德相)이 있고, 또 불타의 수족(手足), 두발(頭髮)과 허리에도 있다고 한다. 이에 상당한 범어는 네 가지가 있지만 Srivatsa(슈리밧사)란 말은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이 말은 모발이 말리어 겹치고 합해져 해운(海雲) 같은 모양이란 뜻이다. 따라서 만자(卍字)란, 길상만덕(吉祥萬德)이 모이는 곳을 뜻한다. 또한 만자는 십자와 마찬가지로 예로부터 세계 각지에서 사용되었는데, 그 기원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불교나 절을 나타내는 기호나 표시로 쓰이고 있다.
모양은 중심에서 오른쪽으로 도는 우만자와 왼쪽으로 도는 좌만자로 크게 나누어진다. 그런데 이 만(卍)자를 입체적으로 형상화시켜서 세워 놓고 볼 때 앞에서 보면 卍 모양이 되지만 뒤쪽에서 보면 右卍자 모양으로 보이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놀의 옛 조각에는 우만자가 많으나 중국, 한국, 일본에서는 굳이 구별하지는 않는다.
22. 자비의 의미
자비란 자기 이외의 사람들을 고뇌에서 자유롭게 해주는 것을 말한다. 자(慈)란 적극적으로 상대방에게 이익과 안락을 보태주는 것이고, 비(悲)란 고통받는 사람의 불이익과 괴로움을 덜어주는 것이다.
23. 삼보사찰
불보사찰 :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경남 양산 통도사
법보사찰 : 팔만대장경을 모신 합천 해인사
승보사찰 : 16국사를 배출한 전남 승주 송광사
24. 총림이란 경전을 배우는 강원, 선을 닦는 선원, 율을 배우는 율원이 다 갖추어진 사찰을 말하는 데 5개의 총림이 있다.
영축총림 : 양산 통도사
해인총림 : 합천 해인사
조계총림 : 전남 송광사
덕숭총림 : 예산 수덕사
고불총림 : 전남 백양사
25. 스님이 되는 과정(조계종 기준)
처음 출가를 하게 되면 2년정도 행자생활을 한다. 절의 허드렛일을 하면서 승려가 될 자격이 있는 가를 테스트 받고 나면 사미계(사미니)를 받고, 사미, 치문, 사집, 사교를 거치고 나면 정식으로 비구계를 받고, 포교활동을 한든가 아니면 선방에서 선을 닦게 된다.
26. 불교에서 부르는 호칭
남자스님 : 비구스님
여자스님 : 비구니스님
사미계를 받은 예비 남자스님 : 사미(행자)
사미니계를 받은 예비 여자스님 : 사미니
남자신도 : 거사, 처사, 우바새
여자신도 : 보살, 우바이
Ⅲ . 결론
1. 한국불교의 오늘과 내일
한국불교 1600년의 역사는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조선 500년의 억불시대와 일제식민지라는 기나긴 암흑기는 유구한 한국불교의 맥을 끊고 불교의 자주성을 앗아갔다. 그러나 1945년 해방이래 불교계는 그러한 시련을 딛고 불교의 정법화, 대중화, 현대화에 힘써왔다. 그럼에도 우리 불교계에는 안팎으로 해결해야 할 수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우선 안으로는 승속을 통틀어 불자 본연의 자세를 잘 지켜가고 있는지 반성해야 할 것이며, 밖으로는 급속히 변모해 가는 현대사회의 흐름 속에서 불교의 참뜻을 얼마나 잘 구현해내고 있는지를 되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불교계 내부를 반성함에는 무엇보다 먼저 그 잣대로 삼아야 할 것이 부처님의 계정혜 삼학의 가르침이다. 승속(僧俗)이 공히 지켜야 할 본분을 잘 지켜가고 있는지는 부처님이 제시한 계율에 의거하여야만 한다. 계율이라는 바른 생활토대가 없이 바른 지혜를 펴는 삶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대소승의 계율을 충분히 숙지하고 활용하여 향락화, 퇴폐화가 극으로 치닫는 오늘의 사회에 참다운 불자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이 사회를 정화해 가야 할 것이다. 다음 정(定)과 혜(慧)의 문제다. 바른 선정 없이는 바른 지혜가 나올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선정은 깨달음을 추구하는 불교적 삶에 있어서 바른 지혜가 나올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선정은 깨달음을 추구하는 불교적 삶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그러한 선을 교종에 상대적인 하나의 종파로 발전시킴으로써 많은 폐단을 낳기도 하였다. 현재 우리의 조계종이라는 명칭도 그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지금 우리는 이러한 명칭을 당위적으로 사용할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을 한번쯤 되돌아보아야 한다. 역대 큰스님들은 지혜가 부족하며 캄캄한 선정에 안주하는 암증선사와 문자의 바다 속에서 참다운 지혜를 열지 못하면서 경전을 읽고 강의하는 문자법사를 함께 경책해 왔다. 오늘날에도 이 두 가지 편협된 모습을 동시에 지양하는 바른 수행의 자세가 간절히 요구된다. 요즈음 들어 조사선(祖師禪)에 대한 여래선(如來禪)을 강조하며, 부처님 당시의 근본 선정수행으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이러한 시도 또한 우리 불교사를 되돌아보며 그 오류를 반성하고, 참다운 불자의 모습을 되찾는 맥락에서 수용하여야 할 것이다.
다음은 현대사회에 불교가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점철되었던 서구사회도 삭막하고 비인간적으로 흐르는 현대문명 속에서 불교의 연기적 세계관에 관심을 기울인지 오래다. 우리나라에서 불교는 더 이상 외래의 종교가 아니다. 1600여 년 간 우리 민족과 호흡을 같이하며 이미 우리화된 것이다. 연기적 세계관에 입각한 불교적 삶은 인류에 어떠한 변화가 오더라도 자비와 지혜의 정신으로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는 힘을 갖게 한다. 불교보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역사가 짧은 다른 종교도 그 열렬한 전파력으로 이제는 불교를 능가할 교세를 지닌 현실을 볼 때 불교는 이제 사회의 교육에 힘을 기울여야한다. 교육이란 강원이나 대학과 같은 상위교육기관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가장 어린 아이를 담당하는탁아소부터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나아가 대학교와 일반신도의 교육 등 다양한 교육체계를 확보하여 사회 구석구석까지 손길이 미치는 포교를 펼쳐나가야 할 것이다. 그것만이 불교가 미래사회에도 변함없이 감로의 법으로써 깨끗한 사회(淨土)를 구현해 갈 수 있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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