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사지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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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미륵사지에 대하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미륵사의 창건과 변천
1). 삼국유사의 무왕 기록
2). 창건과 변천

2. 미륵사지를 통해본 불교미술
1) 가람배치
2) 유 구
① 중문지
② 탑 지
③ 동원 9층 석탑
④ 금당지
⑤ 강당지
⑥ 회랑지
⑦ 승방지
⑧ 남문지 및 주변 회랑
⑨ 연못지 및 진입로
⑩ 고려시대 건물지
⑪ 조선시대 건물지
⑫ 통일신라시대 기와가마
⑬ 고려시대 기와가마
3) 가람배치 양식비교
4) 석등모형
5) 목탑모형

3. 황룡사의 창건과 미륵사

4. 백제계 석탑의 변천

5. 미륵사지 출토 이형제품

참고자료

본문내용

다. 이점을 위의 무왕의 기록에서는 선화공주가 왕비로서 왕에게 저의 평생 소원입니다 하면서, 미륵삼존이 나타난 큰 못 위에 못을 메우고 대가람을 지을 것을 청했고 무왕은 이를 허락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면 황룡사는 왜 지어졌는가. 삼국사기 진흥왕 14년(AD 553년)의 황룡사 창건기를 보면 다음과 같다.
春二月 王命所司 築新宮於月城東 黃龍見其地 王疑之 改爲佛寺 賜號曰皇龍
봄 이월에 왕이 궁중건축을 맡고 있는 부서에 명하여 월성의 동쪽에 신궁을 짓도록 하였는데, 거기에 황룡이 나타나니 왕이 이를 기이하게 여겨 신궁의 명칭을 고쳐 불사(佛寺)로 만들고, 그 불사의 이름을 황룡(皇龍)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신궁터에서 황룡이 나타났기 때문에 신궁을 불사로 만들고 그 이름을 황룡이라 하였으니 황룡(黃龍)이 곧 황룡(皇龍)이요 황룡(皇龍)은 곧 임금(진흥왕)이라, 그 터에 부처님을 모셨으니 임금(진흥왕)은 곧 부처님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삼국유사의 무왕의 기록을 대비시켜 고찰해 보기로 한다. 무왕의 어머니는 혼자서 서울 남 쪽 못 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 못의 용과 교통(정을 통함)을 하여 무왕을 낳았다고 한다. 그 용의 아들 무왕은 왕비와 함께 사자사의 지명법사를 찾아가다가 용화산 아래 큰 못 가운데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났기 때문에 그 못을 메우고 거기에 미륵사를 지었다. 용의 아들이 용이 사는 못에 미래의 부처인 미륵삼존을 거기에 미륵삼존이 나타난 그 것으로 해서 그 못을 메우고 거기에 미륵삼존을 모셨다. 황룡사도 용 미륵사도 용이 두 임금과 관련하여 왕은 곧 용으로서 그 창건 주체의 핵심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미륵사 금당의 초석을 기둥으로 높이 하여 금당의 마루 밑에 공간을 둔 것은 용이 거기에 와서 서리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이 문무왕의 무덤 대왕암을 향하여 지은 감은사의 초석이 그러한 목적에서 공간을 두고 만들어 졌다고도 한다.
아무튼 진흥왕 14년은 신라와 진흥왕에게 있어 대단한 해였다. 진흥왕은 이 해 7월에 백제의 동북고을을 빼앗아 거기에 신주(新州) 6주를 두고 아찬 김무력으로 군주를 삼아 그 곳을 지키도록 하였다. 그리고 10월에는 백제의 왕녀에게 장가를 들어 백제의 왕녀를 소비(小妃)로 삼았다. 이 진흥왕 14년은 백제의 동성왕이 신라의 소지왕과 결혼동맹을 맺어 고구려에 맞서기 시작한 서기 493년으로부터 약 60년 후의 일이었다. 이렇게 장가를 든 진흥왕은 다음 해인 서기 554년에 백제와의 싸움에서 백제의 성왕을 죽였다. 새로 장가든 백제 왕녀의 아버지를 죽인 것이다.
4. 백제계 석탑의 변천
불타의 사리를 봉안하는 불탑은 만든 재료에 따라 목탑(木塔), 석탑(石塔),전탑(塼塔)벽돌로 만든것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우리나라는 초기 목탑과 전탑에서 발전된 석탑이 주로 남아 있다. 백제시대의 석탑은 불교 수용 초기의 목탑을 본따서 재료를 석재로 바꾸어 정교하고 아름답게 만들었으니, 그 대표적인 것이 익산 미륵사지석탑과 부여 정림사지석탑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도 옛 백제 지역에서는 백제시대 석탑의 양식을 계승한 석탑이 다수 만들어 졌는데, 이들을 백제계 석탑이라고 한다. 이 백제계 석탑은 양식적 특성상 두 갈래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한국 석탑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미륵사지 석탑을 바탕으로 하여 고려시대의 조형 감각을 가미한 것으로, 익산 왕궁리 5층석탑, 담양 읍내리 5층석탑, 서울 홍재동 5층석탑 등이 있다. 다른 하나는 목탑의 형식인 미륵사지석탑을 근간으로 하되, 보다 단순화하고 체계화하여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을 계승한 것으로 비인 5층석탑, 부여 장하리 3층석탑, 김제 귀신사 3층석탑, 정읍 은선리 3층석탑이 대표적인 것이다.
5. 미륵사지 출토 이형제품
가.미륵사지 출토 얼굴동물도깨비
미륵사지 출토 유물 중에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그릇, 도구, 기와류, 불교 신앙에 관련된 유물 등을 제외한, 특이한 형태를 가졌거나 출토수량이 극히 적어 그 용도나 성격을 알 수 없는 것, 어떤 용도에 쓰이나 그 용도와는 다른 의미를 표현하고 있는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청동제품으로 만들어진 것은 그 형태가 정확하지 않지만 아가리를 크게 벌리고 있는 사자상으로 추정되며, 사자는 불가에서 성스런 동물로 여겨지고 있다. 와제품은 사람얼굴무늬 수막새, 귀면무늬 암막새, 사래기와로 추정되는 도깨비 얼굴과 평와에 선으로 그려진 여자 얼굴, 부처얼굴 그림이 있다. 사람얼굴무늬 수막새는 출토 수량이 극히 적어 실제로 수막새의 용도로 쓰였는지 알 수 없고, 귀면문 암막새와, 도깨비 얼굴은 막새와 장식기능 이외에 벽사적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평와에 그려진 여자얼굴과 부처얼굴 그림은 기와 제작 당시 와공의 솜씨일 것으로 추정되는데, 소박함과 불심을 느낄 수 있다.
토제품은 자라모양, 머리와 다리 부분 등이 잘려진 말 모양, 동물의 다리를 포함한 몸체 부분으로 추정되는데 붉은 색칠이 된 것, 토우로 생각되는 사람얼굴 및 동물얼굴 등이 있다. 민간풍속에 자라모양은 건물의 일정부분에 부착시키고 머리와 다리 등이 잘린 말 모양은 땅에 묻는 의식이 있는데, 이는 불(火)의 재앙을 막기 위해 재앙을 태워서 멀리 보낸다는 의미가 있다. 위 두 가지 유물의 출토는 불교사원과 토속과의 결합을 추정 할 수 있다. 동물모양 토제품에 붉은 칠이 된 것은 인위적인 것으로 보이며 벽사적 의미를 갖는 것을 볼 수 있다. 한편 토우는 지금까지 주로 무덤에서 출토되는 것으로 알려져 왔는데 사찰인 이곳에서 출토는 특이한 예라 할 수 있다.
참고자료
http://user.chollian.net/~phs6009/index/2209/mirugsaji.html
http://iksan.woorizip.com/
http://www.talman.pe.kr/pagoda/tabstart.htm
http://city.iksan.chonbuk.kr/
불탑과 불상 /1985년 9월 15일 /저자 : 황수영 /편찬 : 교양국사총서 편 찬 위원회
문화유적발굴도록 /1993년12월 30일 발행 / 한국문화재보호재단

키워드

미륵사지,   가람,   황룡사,   사찰,   백제,   ,   예술,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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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9.22
  • 저작시기2006.9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64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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