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산업혁명 기원론
(1) 정통주의적 시각
(2) 수정주의적 시각
2. 산업혁명의 결과
3. 산업혁명의 폐해
Ⅱ. 본론
1. 산업혁명 기원론
(1) 정통주의적 시각
(2) 수정주의적 시각
2. 산업혁명의 결과
3. 산업혁명의 폐해
본문내용
주식인 감자 대흉작으로 5년간 백만 명을 넘어서는 사망자를 기록했다.
도시는 인구 증가와 산업화가 맞물려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나은 일자리를 찾겠다는 소망을 품고 도시로 상경한 농민들은 도시에서도 역시 극빈 노동자가 되어 채광이나 하수도도 없는 초라한 지하실 방에서 살아야했다.
2) 농업 자본주의
농업 자본주의는 영국과 프로이센에서 가장 먼저 발전하였다. 대지주는 대농지를 경영하며 소농민들의 땅을 사들이고 그들을 소작농으로 부렸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인클로저 운동이 일어나 지주들이 소작농들을 소개시키고 그 땅에 양을 방목하기 위한 목초지를 만들었다. 독일정부는 농노에게서 자유의 대가로 소유지의 절반을 몰수하고, 땅을 가진 자는 땅을 대지주에게 팔도록 압력을 넣는 등 유럽 전역에서 자본주의적 농업이 성행하였다.
3) 농촌 소요사태
농민들은 농업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라 땅도 잃고, 산업 혁명으로 인한 기술의 발전 때문에 가내 공업도 쇠퇴하여 특히나 겨울을 나는 데 필요한 수입이 줄어들었다. 게다가 교통과 통신망의 발달은 정부가 농민들의 삶에 유례없이 강력하게 개입할 수 있게 만들었다.
농민들은 자신들의 삶이 가혹하게 침해당하는 것에 분노하여 산발적 폭력이라는 형태로 대응했다. 1820년대 말 영국 남부의, 자본주의 농업의 상징인 탈곡기 도입에 대한 항거 등이 그 예이다. 소농들은 복면을 하거나 변장하고 밤중에 몰래 창고와 건초 더미에 불을 질러 버렸다. 이들은 습격 전에 켄트 주의 대농장주에게 협박장을 보내기도 했다.
그 밖에도 1830년대와 1840년대에 아일랜드 및 슐레지엔, 갈리시아 등지에서도 대규모 소요사태가 일어났으며, 소규모 소요사태는 전 유럽에 걸쳐 일어났다.
(2) 도시
1) 환경오염
프랑스의 석학 알렉시스 드 토크빌은 맨체스터 노동자 거주 지역을 흐르는 공장 폐수로 오염된 시커먼 강물을 보며 맨체스터와 산업 혁명에 대한 자신의 인상을 이렇게 쓰고 있다.
"이 더러운 하수구로부터 전 세계를 비옥하게 만드는 인간의 땀의 강물이 흘러나오며 순수한 황금도 흘러나온다. 인간이 가장 애써 이룩한 이 문명이 그 기적을 이루는 바로 이곳에서 인간은 야만인이 되어 버렸다."
산업혁명으로 석탄을 태워 동력을 사용하게 되면서 대기오염도 심각해졌다. 공장의 굴뚝은 계속해서 시커먼 연기를 내뿜었다. 그러나 중간 계급들은 이를 ‘번영의 상징’ 으로 예찬하면서도 자신들은 질병과 공장 매연으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사했다.(바람의 방향 때문에 주로 도시의 서쪽으로 이사했다) 남겨진 도시빈민들은 인구 과밀 상태의 거주지에서 각종 전염병과 크고 작은 건강의 위협을 느끼며 살았다.
2) 노동자들의 노동 환경
산업혁명으로 인해 일부 숙련 노동자들은 약간의 임금 상승과 생계비용 하락으로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다수의 비숙련 노동자들은 낮은 임금을 받으며 불확실한 삶을 영위해 나갔다. 경제 불황은 다반사였고 그때 마다 노동자들은 잠정적인 실업 상태에 빠졌으나, 사회 보장제도는 전혀 없었다. 일부 숙련 노동자들도 그들의 기술이 산업화의 영향 하에 있을 경우 비숙련 노동자들에 비해서 결코 나은 생활을 영위하지 못했다.
공장주들은 노동자들이 같은 시간에 일을 시작하고 끝낼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분업화의 등장으로 이들은 기계 앞에 서서 그 동작 속도에 맞추어 똑같은 작업을 반복해야했다. 노동자들은 마치 기계처럼 취급되었으며, 특히 여성과 아동 노동자들은 상대적으로 적은 임금으로 고용되어 혹사당했다.
3) 아동과 여성 노동자
여성과 아동 또한 조작이 쉬운 기계의 보급이 가속화됨에 따라 노동에 뛰어들었다. 아동들은 변변치 않은 수입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 위해 노동전선에 참여했으며, 교육은 일종의 사치로 취급되었다. 산업 자본가들은 남성 노동자들보다 다루기 쉬운 이들을 대량으로 이용하여 인건비를 크게 절약할 수 있었다. 많은 여성과 아동들이 남성 노동자 대신 고용되었으나, 그들의 임금은 남성 노동자에 비해 턱없이 적었다. 게다가 최저 12~16시간, 심지어 20시간에 이르는 살인적인 장시간 노동이 여성과 아동들을 포함한 노동자 전체를 괴롭혔고, 극도의 저임금으로 노동자 가정은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영세민으로 전락하였다..
4) 노사 대립의 격화 - 러다이트 운동
산업 혁명 초기에 노동자들은 아무런 제도적 보호 장치도 없고 노동조합도 존재하치 않았기에 자본가들의 무제한적인 이윤 동기에 의해 큰 희생을 치를 수밖에 없었다. 노동자들은 적은 임금으로 혹사당했고, 기술의 발전에 따라 그나마 일자리도 얻지 못하게 되었다. 실업자는 계속 증가했고, 시간이 지나 노동자로서의 자각을 갖게 된 분노한 노동자들은 기계파괴운동, 즉 러다이트 운동을 일으키기에 이른다.
러다이트 운동은 1811년 섬유산업도시였던 영국의 노팅검에서 처음으로 일어났으며, 수공업자들이 자신의 일자리를 빼앗은 섬유기계를 파괴한 것이 시작이었다. 지도자 러드의 이름을 따서 러다이트운동이라고 하며 참여자들은 러다이트라 불렸다. 이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직물공업에서 기계로 인해 일어난 숙련노동자의 고용감소, 실업자 증가, 임금체불, 물가상승 등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들은 기술 파괴 게릴라를 자처하며 밤마다 가면을 쓰고 나타나 실업의 원인이 되었던 기계들을 부수었다.
1812년 일부 러다이트들이 군인들에 의해 살해된 뒤, 러다이트 운동은 난동수준으로 격해졌고 영국 정부는 강력 제재에 나섰다. 결국 러드는 교수형에 처해지고 반(反)산업, 반혁명 운동이자 생존권 투쟁인 러다이트운동은 사그라졌다.
(3) 식민지 수탈의 강화
산업혁명은 식민지에도 그 그늘을 드리웠다.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식민지의 경제적 중요성이 부각됨에 따라 본국의 공업생산물의 수출 시장이자 원료공급지, 노동력 공급지로서 식민지는 더욱 체계적인 수탈의 대상이 되었다.
식민지 확보를 위한 서유럽국가들의 경쟁과 대립은 세계 1차대전 발발로 이어졌고, 식민지 민족들의 고통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아프리카 지도를 보면 국경이 대단히 직선적인데, 식민지 시절 유럽인들이 편의상 정한 그대로 국가의 경계가 정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도시는 인구 증가와 산업화가 맞물려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나은 일자리를 찾겠다는 소망을 품고 도시로 상경한 농민들은 도시에서도 역시 극빈 노동자가 되어 채광이나 하수도도 없는 초라한 지하실 방에서 살아야했다.
2) 농업 자본주의
농업 자본주의는 영국과 프로이센에서 가장 먼저 발전하였다. 대지주는 대농지를 경영하며 소농민들의 땅을 사들이고 그들을 소작농으로 부렸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인클로저 운동이 일어나 지주들이 소작농들을 소개시키고 그 땅에 양을 방목하기 위한 목초지를 만들었다. 독일정부는 농노에게서 자유의 대가로 소유지의 절반을 몰수하고, 땅을 가진 자는 땅을 대지주에게 팔도록 압력을 넣는 등 유럽 전역에서 자본주의적 농업이 성행하였다.
3) 농촌 소요사태
농민들은 농업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라 땅도 잃고, 산업 혁명으로 인한 기술의 발전 때문에 가내 공업도 쇠퇴하여 특히나 겨울을 나는 데 필요한 수입이 줄어들었다. 게다가 교통과 통신망의 발달은 정부가 농민들의 삶에 유례없이 강력하게 개입할 수 있게 만들었다.
농민들은 자신들의 삶이 가혹하게 침해당하는 것에 분노하여 산발적 폭력이라는 형태로 대응했다. 1820년대 말 영국 남부의, 자본주의 농업의 상징인 탈곡기 도입에 대한 항거 등이 그 예이다. 소농들은 복면을 하거나 변장하고 밤중에 몰래 창고와 건초 더미에 불을 질러 버렸다. 이들은 습격 전에 켄트 주의 대농장주에게 협박장을 보내기도 했다.
그 밖에도 1830년대와 1840년대에 아일랜드 및 슐레지엔, 갈리시아 등지에서도 대규모 소요사태가 일어났으며, 소규모 소요사태는 전 유럽에 걸쳐 일어났다.
(2) 도시
1) 환경오염
프랑스의 석학 알렉시스 드 토크빌은 맨체스터 노동자 거주 지역을 흐르는 공장 폐수로 오염된 시커먼 강물을 보며 맨체스터와 산업 혁명에 대한 자신의 인상을 이렇게 쓰고 있다.
"이 더러운 하수구로부터 전 세계를 비옥하게 만드는 인간의 땀의 강물이 흘러나오며 순수한 황금도 흘러나온다. 인간이 가장 애써 이룩한 이 문명이 그 기적을 이루는 바로 이곳에서 인간은 야만인이 되어 버렸다."
산업혁명으로 석탄을 태워 동력을 사용하게 되면서 대기오염도 심각해졌다. 공장의 굴뚝은 계속해서 시커먼 연기를 내뿜었다. 그러나 중간 계급들은 이를 ‘번영의 상징’ 으로 예찬하면서도 자신들은 질병과 공장 매연으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사했다.(바람의 방향 때문에 주로 도시의 서쪽으로 이사했다) 남겨진 도시빈민들은 인구 과밀 상태의 거주지에서 각종 전염병과 크고 작은 건강의 위협을 느끼며 살았다.
2) 노동자들의 노동 환경
산업혁명으로 인해 일부 숙련 노동자들은 약간의 임금 상승과 생계비용 하락으로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다수의 비숙련 노동자들은 낮은 임금을 받으며 불확실한 삶을 영위해 나갔다. 경제 불황은 다반사였고 그때 마다 노동자들은 잠정적인 실업 상태에 빠졌으나, 사회 보장제도는 전혀 없었다. 일부 숙련 노동자들도 그들의 기술이 산업화의 영향 하에 있을 경우 비숙련 노동자들에 비해서 결코 나은 생활을 영위하지 못했다.
공장주들은 노동자들이 같은 시간에 일을 시작하고 끝낼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분업화의 등장으로 이들은 기계 앞에 서서 그 동작 속도에 맞추어 똑같은 작업을 반복해야했다. 노동자들은 마치 기계처럼 취급되었으며, 특히 여성과 아동 노동자들은 상대적으로 적은 임금으로 고용되어 혹사당했다.
3) 아동과 여성 노동자
여성과 아동 또한 조작이 쉬운 기계의 보급이 가속화됨에 따라 노동에 뛰어들었다. 아동들은 변변치 않은 수입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 위해 노동전선에 참여했으며, 교육은 일종의 사치로 취급되었다. 산업 자본가들은 남성 노동자들보다 다루기 쉬운 이들을 대량으로 이용하여 인건비를 크게 절약할 수 있었다. 많은 여성과 아동들이 남성 노동자 대신 고용되었으나, 그들의 임금은 남성 노동자에 비해 턱없이 적었다. 게다가 최저 12~16시간, 심지어 20시간에 이르는 살인적인 장시간 노동이 여성과 아동들을 포함한 노동자 전체를 괴롭혔고, 극도의 저임금으로 노동자 가정은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영세민으로 전락하였다..
4) 노사 대립의 격화 - 러다이트 운동
산업 혁명 초기에 노동자들은 아무런 제도적 보호 장치도 없고 노동조합도 존재하치 않았기에 자본가들의 무제한적인 이윤 동기에 의해 큰 희생을 치를 수밖에 없었다. 노동자들은 적은 임금으로 혹사당했고, 기술의 발전에 따라 그나마 일자리도 얻지 못하게 되었다. 실업자는 계속 증가했고, 시간이 지나 노동자로서의 자각을 갖게 된 분노한 노동자들은 기계파괴운동, 즉 러다이트 운동을 일으키기에 이른다.
러다이트 운동은 1811년 섬유산업도시였던 영국의 노팅검에서 처음으로 일어났으며, 수공업자들이 자신의 일자리를 빼앗은 섬유기계를 파괴한 것이 시작이었다. 지도자 러드의 이름을 따서 러다이트운동이라고 하며 참여자들은 러다이트라 불렸다. 이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직물공업에서 기계로 인해 일어난 숙련노동자의 고용감소, 실업자 증가, 임금체불, 물가상승 등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들은 기술 파괴 게릴라를 자처하며 밤마다 가면을 쓰고 나타나 실업의 원인이 되었던 기계들을 부수었다.
1812년 일부 러다이트들이 군인들에 의해 살해된 뒤, 러다이트 운동은 난동수준으로 격해졌고 영국 정부는 강력 제재에 나섰다. 결국 러드는 교수형에 처해지고 반(反)산업, 반혁명 운동이자 생존권 투쟁인 러다이트운동은 사그라졌다.
(3) 식민지 수탈의 강화
산업혁명은 식민지에도 그 그늘을 드리웠다.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식민지의 경제적 중요성이 부각됨에 따라 본국의 공업생산물의 수출 시장이자 원료공급지, 노동력 공급지로서 식민지는 더욱 체계적인 수탈의 대상이 되었다.
식민지 확보를 위한 서유럽국가들의 경쟁과 대립은 세계 1차대전 발발로 이어졌고, 식민지 민족들의 고통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아프리카 지도를 보면 국경이 대단히 직선적인데, 식민지 시절 유럽인들이 편의상 정한 그대로 국가의 경계가 정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