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고갱과 2개월 동안 함께 일하면서 어느 정도 영향을 주고받았지만, 사사건건 의견이 대립하고 성미도 전혀 맞지 않았기 때문에 사이가 급속히 나빠졌다. 1888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반 고흐는 신경과민으로 발작을 일으켜 왼쪽 귀의 일부를 잘랐다. 고갱은 떠났고 그는 병원으로 실려갔다. 그리고 2주일 뒤에 '노란 집'으로 돌아와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파이프를 물고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 Self-Portrait with Pipe and Bandaged Ear〉과 몇 점의 정물화 및 〈아기를 재우는 여인 La Berceuse〉 같은 작품을 제작했다.몇 주일 뒤, 그는 다시 심한 정신이상 증세를 보여 병원에 입원했다. 1889년 4월말 더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프로방스의 생레미에 있는 정신병원에 찾아가 한동안 의사의 감독을 받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림 그리는 능력을 잃지 않아야만 자신의 온전한 정신상태가 보장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고흐는 그 정신병원에 12개월 동안 갇혀 있으면서, 되풀이되는 발작에 시달리고 평온한 기분과 절망적인 기분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도 이따금 그림을 그렸다. 〈정신병원의 정원 Garden of the Asylum〉〈삼나무 Cypresses〉〈올리브 나무 Olive Trees〉〈알피유 가족 Les Alpilles〉, 의사들의 초상화, 렘브란트들라크루아밀레의 그림들을 본뜬 모작 등은 모두 이 시기에 그린 것들이다.
<가셰 박사>
<휴식(밀레의 모작)>
이 시기(1889~90)에 그의 작품을 지배한 주된 특징은 현실과 격리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일종의 슬픔이다. 오랫동안 정신병원의 독방이나 정원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주제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는데다 자신의 영감이 직접적인 관찰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억을 되살려 그림을 그려야 하는 현실과 맞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지난 여름에 사용했던 강렬한 색채를 부드럽게 만들고, 좀더 차분한 그림을 그리려고 애썼다. 그러나 흥분을 억제할수록 상상력이 더욱 넘쳐서 구성요소들의 극적인 효과에 몰두하게 되어, 역동적인 형태와 힘찬 선(선이 색채와 동등한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에 바탕을 둔 표현양식을 개발했다. 따라서 생레미 시절의 작품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들은 아를 시절의 작품보다 훨씬 대담하고 환상적이다.
<피에타 (들라크루아 모작)
>
다시 북부로..
3월, 브류셀의 20인전에 출품한 <붉은 포도밭>이 4백 프랑에 팔렸는데, 이는 고호 생애 중에 팔린 단 하나의 유화이다.1890년 5월에 고흐는 생 레미 정신 병원을 떠나 파리로 갔다. 고흐는 북부로 가고 싶어져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오베르 쉬르 우아즈로 옮겨갔다. 폴 가셰 박사가 고흐를 돌봐 주었다. 가셰 박사는 정신과 의사로 그 자신 짬짬이 그림을 그리는 화가였다. 7월 1일, 파리에 수일동안 체재하면서 로트렉 등과 재회. 오베르로 돌아와 <까마귀가 나는 밀밭>, <오베르의 교회> 등을 제작하였다.
<까마귀가 나는 밀밭>
<오베르의 교회>
끝 그리고 시작
마침내 고흐는 이 시기에 스스로 마침표를 찍었다. 오베르로 간 그는 처음에는 열성적으로 작업에 몰두했다. 옥수수밭, 강이 흐르는 골짜기, 농부들의 오두막, 교회, 읍사무소 같은 주제들을 선택한 것을 보면 그가 정신적으로 위안을 얻었음을 알 수 있다. 화풍도 달라졌다. 북부의 햇빛 속에서, 그는 옅으면서도 산뜻한 색조를 택했다. 붓놀림은 더욱 폭넓어지고 한결 풍부한 표현력을 갖게 되었으며, 자연에 대한 시각은 보다 서정적으로 되었다. 그러나 가셰와 벌인 말다툼, 어쩔 수 없이 테오에게 생계를 의존하는 데서 오는 죄의식, 그리고 성공하지 못한 데 따른 열등감 때문에 이 시기는 금방 끝이 나고 말았다.
오베르에서 두 달을 보낸 후 고흐는 완전히 기운을 잃고 말았다. 1890년 7월 27일, 그는 들에 나가 권총으로 자신을 쏘았다. 그의 나이 37세였다. 이틀 후에 고흐는 테오의 품 안 에서 숨을 거두었다.
반 고흐는 렘브란트 이후 가장 위대한 네덜란드 화가로 널리 인정받고 있으며, 현대미술사의 표현주의 흐름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불과 1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제작된 그의 작품들은 강렬한 색채, 거친 붓놀림, 뚜렷한 윤곽을 지닌 형태를 통하여 그를 자살까지 몰고간 정신병의 고통을 인상깊게 전달하고 있다.
그의 그림에서는 모든 것이 살아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작품은 많은 현대회화의 발전, 특히 수틴과 독일 표현주의 화가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가 평생 동안 그린 800점 이상의 유화와 700점 이상의 데생 가운데, 그가 살아 있는 동안 팔린 작품은 데생 1점뿐이었다. 항상 가난했던 그는 그림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시급히 전달해야 한다는 확신과 형을 무조건 믿었던 테오의 도움으로 간신히 생활을 유지했다. 1872년부터 테오와 친구들에게 쓴 편지들은 그의 목표와 믿음, 희망과 절망, 수시로 달라지는 건강상태와 정신상태를 생생하게 담고 있어서, 위대한 인간기록이라 할 수 있는 독특하고 감동적인 전기자료이다. 그가 자살했을 때, 반 고흐라는 이름은 세상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는 1888~90년에 파리의 앵데팡당 미술전람회에, 그리고 1890년 브뤼셀에서 그림 몇 점을 출품했다. 그가 죽은 뒤 1891년에는 파리와 브뤼셀에서 그를 기념하여 몇 점 안되는 그의 작품을 전시했을 뿐이다. 그의 개인전은 1892년에야 열렸고 그가 살아 있는 동안, 그에 대한 비평은 단 1번밖에 나오지 않았다.
1962년 : 빈센트 반 고흐 재단이 창설
1973년 : 6월2일 율리아나 여왕에 의해 반 고흐 재단이 설립된지 13년 만인 1973년 암스테르담에 그를 기념하는 미술관이 설립되었다. 그전까지는 바로 옆에 위치한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슈테데릭 미술관)에서 그의 작품들을 전시해 왔다.
그의 생전 작품 유화 8 백 70 여점, 드로잉 1천 2백여점 중 유화 2 백여점, 드로잉 5백 50점을 메트로폴리탄 등 세계 각지에 분산되어 있으나 이곳처럼 각 시대별로 고루 수집되어 있는 곳은 없다.
<가셰 박사>
<휴식(밀레의 모작)>
이 시기(1889~90)에 그의 작품을 지배한 주된 특징은 현실과 격리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일종의 슬픔이다. 오랫동안 정신병원의 독방이나 정원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주제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는데다 자신의 영감이 직접적인 관찰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억을 되살려 그림을 그려야 하는 현실과 맞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지난 여름에 사용했던 강렬한 색채를 부드럽게 만들고, 좀더 차분한 그림을 그리려고 애썼다. 그러나 흥분을 억제할수록 상상력이 더욱 넘쳐서 구성요소들의 극적인 효과에 몰두하게 되어, 역동적인 형태와 힘찬 선(선이 색채와 동등한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에 바탕을 둔 표현양식을 개발했다. 따라서 생레미 시절의 작품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들은 아를 시절의 작품보다 훨씬 대담하고 환상적이다.
<피에타 (들라크루아 모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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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북부로..
3월, 브류셀의 20인전에 출품한 <붉은 포도밭>이 4백 프랑에 팔렸는데, 이는 고호 생애 중에 팔린 단 하나의 유화이다.1890년 5월에 고흐는 생 레미 정신 병원을 떠나 파리로 갔다. 고흐는 북부로 가고 싶어져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오베르 쉬르 우아즈로 옮겨갔다. 폴 가셰 박사가 고흐를 돌봐 주었다. 가셰 박사는 정신과 의사로 그 자신 짬짬이 그림을 그리는 화가였다. 7월 1일, 파리에 수일동안 체재하면서 로트렉 등과 재회. 오베르로 돌아와 <까마귀가 나는 밀밭>, <오베르의 교회> 등을 제작하였다.
<까마귀가 나는 밀밭>
<오베르의 교회>
끝 그리고 시작
마침내 고흐는 이 시기에 스스로 마침표를 찍었다. 오베르로 간 그는 처음에는 열성적으로 작업에 몰두했다. 옥수수밭, 강이 흐르는 골짜기, 농부들의 오두막, 교회, 읍사무소 같은 주제들을 선택한 것을 보면 그가 정신적으로 위안을 얻었음을 알 수 있다. 화풍도 달라졌다. 북부의 햇빛 속에서, 그는 옅으면서도 산뜻한 색조를 택했다. 붓놀림은 더욱 폭넓어지고 한결 풍부한 표현력을 갖게 되었으며, 자연에 대한 시각은 보다 서정적으로 되었다. 그러나 가셰와 벌인 말다툼, 어쩔 수 없이 테오에게 생계를 의존하는 데서 오는 죄의식, 그리고 성공하지 못한 데 따른 열등감 때문에 이 시기는 금방 끝이 나고 말았다.
오베르에서 두 달을 보낸 후 고흐는 완전히 기운을 잃고 말았다. 1890년 7월 27일, 그는 들에 나가 권총으로 자신을 쏘았다. 그의 나이 37세였다. 이틀 후에 고흐는 테오의 품 안 에서 숨을 거두었다.
반 고흐는 렘브란트 이후 가장 위대한 네덜란드 화가로 널리 인정받고 있으며, 현대미술사의 표현주의 흐름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불과 1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제작된 그의 작품들은 강렬한 색채, 거친 붓놀림, 뚜렷한 윤곽을 지닌 형태를 통하여 그를 자살까지 몰고간 정신병의 고통을 인상깊게 전달하고 있다.
그의 그림에서는 모든 것이 살아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작품은 많은 현대회화의 발전, 특히 수틴과 독일 표현주의 화가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가 평생 동안 그린 800점 이상의 유화와 700점 이상의 데생 가운데, 그가 살아 있는 동안 팔린 작품은 데생 1점뿐이었다. 항상 가난했던 그는 그림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시급히 전달해야 한다는 확신과 형을 무조건 믿었던 테오의 도움으로 간신히 생활을 유지했다. 1872년부터 테오와 친구들에게 쓴 편지들은 그의 목표와 믿음, 희망과 절망, 수시로 달라지는 건강상태와 정신상태를 생생하게 담고 있어서, 위대한 인간기록이라 할 수 있는 독특하고 감동적인 전기자료이다. 그가 자살했을 때, 반 고흐라는 이름은 세상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는 1888~90년에 파리의 앵데팡당 미술전람회에, 그리고 1890년 브뤼셀에서 그림 몇 점을 출품했다. 그가 죽은 뒤 1891년에는 파리와 브뤼셀에서 그를 기념하여 몇 점 안되는 그의 작품을 전시했을 뿐이다. 그의 개인전은 1892년에야 열렸고 그가 살아 있는 동안, 그에 대한 비평은 단 1번밖에 나오지 않았다.
1962년 : 빈센트 반 고흐 재단이 창설
1973년 : 6월2일 율리아나 여왕에 의해 반 고흐 재단이 설립된지 13년 만인 1973년 암스테르담에 그를 기념하는 미술관이 설립되었다. 그전까지는 바로 옆에 위치한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슈테데릭 미술관)에서 그의 작품들을 전시해 왔다.
그의 생전 작품 유화 8 백 70 여점, 드로잉 1천 2백여점 중 유화 2 백여점, 드로잉 5백 50점을 메트로폴리탄 등 세계 각지에 분산되어 있으나 이곳처럼 각 시대별로 고루 수집되어 있는 곳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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