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서(翰西) 남궁억(南宮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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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서(翰西) 남궁억(南宮憶)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서론

본론

결론

참고자료
-한눈에 보는 남궁억의 생애-

참고문헌 및 싸이트

본문내용

적으로는 물론 민족사적 측면에서도 높이 평가된다. 또한 주지 교과에만 치중하지 않고 ③학생들의 흥미와 정서를 고려하여 전인적 발달을 도모하고, ④실천과 지행의 합일을 강조하고, ⑤교육과 국가발전의 관계를 강조하였으며, ⑥실천궁행하는 교사상과 인격적 가치를 보여주었다는 점 등은 그 의의가 충분히 인정된다.(이문원, 2002, 314~315)
그러나 한국근대교육사에서 그의 교육사상이 갖는 보다 근본적인 의의는 근대적 교육을 도입하려는 그의 노력이 그 누구의 지시, 또는 정부의 방침이나 외세의 간섭에 의한 것이 아니라, 바로 한서 자신과 그의 학생들을 비롯한 일반대중, 즉 우리 민족 스스로의 결단에 의한 자생적 노력이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자생적 노력이야말로 전통으로부터의 단절을 극복하고 자기 문화에 대한 반성과 외래문화에 대한 비판적 수용을 가능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이문원, 2002, 315)
이제 한서의 교육활동에서 골고루 반영되었으며 그의 교육활동을 더욱 두드러지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내용을 정리한다면,
첫째, 인간존중과 삶에 대한 성실함으로 교육입국을 다진 점이요,
둘째, 민족애, 조국애로 일관된 민족교육의 표본을 보인 점이요,
셋째, ‘인간 형성은 가정교육에서’라는 신념 밑에 여성교육에 힘쓴 점이요,
넷째, 전통교육의 틀에서 근대교육으로 과감하게 방향을 개화교육으로 돌린 점이요,
다섯째, 기독교 신앙의 밑받침으로 교육관을 다진 점이요,
마지막으로 삶의 모범을 보인 점이라 하겠다.(김선양, 1999, 124)
결론
개화기 시기의 조선은 국내외로 격동의 시기를 보냈다고 할 수 있다. 전통의 유지와 개화의 추구 중에서 갈등하던 그 시대의 많은 사상가들은 어느 한 노선을 택하여 고집스런 면모를 보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시대 많은 사상가들 중 하나였던 남궁억은 전통과 개화 문명의 자연스러운 조화를 이루기 위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끊임없는 역사 연구와 더불어 현장에서 직접 뛰는 실천적인 교육가로서의 면모와 함께 전통적인 교수방법 외에도 다양한 교육방법을 활용하여 학습자의 학습을 도왔다는 점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남궁억은 이러한 점들을 사상적인 기반으로 구국을 위한 많은 활동을 병행하였다. 어느 한 사상으로의 치우침이 아닌 조화를 이루며 나라를 위하는 일이라면 남궁억 또한 고집스러운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이 고집스러움은 조국의 독립에 대한 변함없는 지조인 것이다. 서구열강과 함께 개화에 한발 앞선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 시대이고 개화기로 포장되는 암울한 시대이니만큼 나라를 구하기 위한 수단으로 교육을 이용하였다. 무궁화 묘목 나눠주기, 무궁화에 관한 노래 만들기, 무궁화 자수본, 태극 자수본 등을 이용하여 학교에서 뿐만 아니라 그 밖의 활동에서 조차 나라를 생각할 수 있게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보인다. “나는 독립을 못 보아도 너희들은 반드시 볼 것이다. 내 몸은 과일나무 아래 묻어 거름이라도 되게 하라.”라는 거룩한 유언을 통해서도 남궁억의 나라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느낄 수 있다.
남궁억은 독립협회와 대한협회 창립 등의 굵직한 사회의 흐름에 앞장섰던 언론인이자 독립운동가, 구국을 위한 교육을 행하는 실천적인 교육가이자 옥같이, 물같이 청렴결백한 관리였다. 하지만 도산 안창호만큼의 화려한 경력과 솔선수범하는 자세를 갖추었지만 그에 비하면 남궁억의 이름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남궁억을 따르던 제자들이 그의 뜻을 따른다는 뜻에서 새로이 한서중 고등학교가 설립되었고 그의 동상을 제작하기도 하였지만 남궁억은 자신의 업적에 비하여 너무나 초라한 명예를 가지고 있는 안타까운 교육자인 것 같다. 그 시대 나라를 구하기 위한 열망이야 누구나 가지고 있었다는 것으로 치부하기에 남궁억은 너무나도 많은 행함을 실천한 학자이다. 우리가 국화로써의 무궁화를 기억하는 만큼 그 무궁화를 전국에 널리 퍼뜨리기 위해 직접 묘목을 가꾸고 자수본을 제작했던 남궁억의 행적 또한 함께 기억하였으면 좋겠다. 남궁억이 살다간 그때, 암울한 시대였지만 그 암울함을 없애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그의 노고를 높이 살 수 있었으면 한다.
- 한눈에 보는 남궁억의 생애 -
1863년 12월 27일 한성 왜송동에서 중추부사를 지냈던 남궁영과 덕수 이씨 사이에서 출생.
그의 자는 치만, 이름은 억, 본관은 함열, 한서는 호
1883년 21세. 국립 영어학교에 입학.
1884년 22세.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 총해관에 독일인 목인덕의 추천으로 견습생이 됨.
1886년 24세. 고종황제의 통역관.
1887년 25세. 전관대신 조민희의 통역서기관.
1889년 27세. 궁내부 별군직.
1894년 31세. 경상도 칠곡부사.
1895년 33세. 내무토목국장. 흥화학교에서 야간에 영문법과 국사를 가르침으로서 교단에섬.
1896년 34세. 독립협회 조직, ‘독립신문’의 영문판 편집 담당.
1898년 36세. ‘황성신문’창간, 사장 겸 주필.
1905년 43세. 성주목사로 다시 관직에 나감.
1906년 44세. 양양군수. 현대적 학교인 현산학교 설립.
1907년 45세. ‘대한협회’조직(회장),
1909년 47세. ‘관동학회’창립(회장), 순 한글로 된 교육 잡지 ‘교육월보’발간.
1910년 48세. 서울 배화학당의 교사로 취임. 청년학원의 원장. 기독교에 귀의.
1918년 56세. 강원도 홍천군 모곡리로 낙향.
1919년 57세. 교회를 먼저 세우고 확장하여 모곡학교 설립.
1933년 71세. 무궁화, 한국역사사건으로 왜경에 체포.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
1934년 72세. 3년간의 집행유예로 석방. 옥중생활의 여독으로 병세가 약화.
1939년 77세. 서거.
<참고 문헌 및 싸이트>
김선양, 1999, 현대 한국 교육사상사, 양서원
이문원, 2002, 한국의 교육사상가, 문음사
* Naver 검색 *
candlep64님의 블로그
- http://blog.naver.com/candlep64?Redirect=Log&logNo=60014532921
남궁억 선생님 자료
- http://web.edunet4u.net/%7Enaray/hometown/moo/hansu.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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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11.30
  • 저작시기20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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