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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할 뿐만 아니라, 저녁이면 사랑방에서 가마니틀, 자리틀을 마련해 놓고 가마니나 자리를 짜고 새끼 꼬기, 짚신 삼기를 마을사람들과 청년들에게 가르치기를 계속하였다.
한서는 교사로서 또는 학교 설립자로서 전통적 교육과는 다른 근대적 학교교육 활동을 전개하였기 때문에 그가 가르쳤거나 그가 설립한 학교의 교육내용은 보다 다양하며 현대의 교육내용에 접근한다고 하겠다. 그러나 한서는 민족적 수난의 시대에 교육에 대해 요청되는 인간상을 양성하기 위해서 특히 국사교육, 예능교육, 실업교육의 내용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한서가 그의 교육 목적과 내용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던 방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지행합일(知行合一)하는 행동인을 만들기 위하여 주지주의적 이론 위주의 교육을 배격하고 실천궁행(實踐躬行)을 강조하였다.
둘째, 주체성있고 조국과 동포를 아끼고 사랑하는 정신의 함양을 위하여 국사와 국어 교육을 강조하였다.
세째, 생산과 노동을 중요시하고 책임감이 강한 생활인을 만들기 위해 실과(實科)와 실험실습을 중요시하였다.
네째, 피교육자에게 강요와 억압을 하는 전제적인 교사상을 배격하고 이해와 설득 그리고 솔선수범으로 모범이 되어 교육력을 강화하는 민주적 교사상을 중요시하였다.
다섯째, 학교교육 이외에 사회와 언론과 종교를 통한 교육도 중요시하였다.
결국 한서의 교육사상은 교육구국의 사상으로 귀결되며, 교육목적, 내용, 방법등 그의 교육활동 전반에 걸쳐서 교육을 통해 민중을 계몽하고 계몽된 민중의 힘으로 국권을 회복, 강화하려는 교육적 민족주의를 지향하였다고 하겠다.
3.교육사적 의의
한서는 내적 모순과 외세의 도전 앞에서 무기력하게 기울어 가는 한말의 전환기에 태어나 평생을 구국의 일념으로 민족의 수난기를 감래하였으며, 끝내 그가 염원, 확신하였던 민족의 자주독립과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서거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당시 동아일보는 조선의 일군이 가셨으니 우리들 조선사람은 슬퍼한다 고하였으며, 이은상은 역사의 풍우 속에서 구국의 의기와 정열에 불타오르던 민족혼의 등대요, 남먼저 깨어 일어나 외치며 앞섰던 새 세대의 신봉 이라고 하였다.
한서 남궁억은 개화의 선각자, 교육자, 언론인, 종교인, 민족운동의 지도자로 민족의 장래를 위해 횃불을 든 민족혼의 등대로서 민족이 수난과 핍박 속에 신음하고 있을 때 오로지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헌신하였던 조선의 일군이었다.
물론 그의 교육적 민족주의가 대중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였으며, 언론활동과 교육활동이 장래를 위한 준비로써 실력 양성으로만 그쳤을 뿐 식민통치에 대한 절대 투쟁으로 나가지 못한 점이 있고, 그의 민족운동이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민족적 감정을 민족의식으로 활성화하는 데 영향을 미치기는 하였으나 정치적 이데올로기에까지 발전하지 못한 점이 한서의 교육적 민족주의와 애국계몽운동의 한계로 지적될 수 있다.
그러나 교육사적으로 보았을 때 한서는 우선 구국교육운동가로서 구원한 이상적 교사상을 몸소 실천으로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일찍이 서구 문명에 눈을 떠 전통적 유교적 교육 내용과 방법으로부터 근대적인 새로운 교육 내용과 방법으로 전환하는데 있어서 교량적 역할을 한 새교육의 제창자였으며, 일제의 압박과 통치하에서 그가 보여준 민족정신과 애국사상의 함양을 위한 교육적 노력은 비단 교육사적 입장에서 뿐만 아니라 민족사적 입장에서도 과소 평가될 수 없는 것이다.
아울러 그가 행한 교육이 주지주의적 교육보다는 전인적 교육이었으며, 실천인을 기르는데 있었음은 오늘 우리의 현실에 비추어 보아도 중요한 뜻을 지닌다고 하겠다. 특히 실천궁행하는 지행합일의 교육이야말로 한서 자신의 인간상을 잘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한서는 교사로서 또는 학교 설립자로서 전통적 교육과는 다른 근대적 학교교육 활동을 전개하였기 때문에 그가 가르쳤거나 그가 설립한 학교의 교육내용은 보다 다양하며 현대의 교육내용에 접근한다고 하겠다. 그러나 한서는 민족적 수난의 시대에 교육에 대해 요청되는 인간상을 양성하기 위해서 특히 국사교육, 예능교육, 실업교육의 내용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한서가 그의 교육 목적과 내용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던 방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지행합일(知行合一)하는 행동인을 만들기 위하여 주지주의적 이론 위주의 교육을 배격하고 실천궁행(實踐躬行)을 강조하였다.
둘째, 주체성있고 조국과 동포를 아끼고 사랑하는 정신의 함양을 위하여 국사와 국어 교육을 강조하였다.
세째, 생산과 노동을 중요시하고 책임감이 강한 생활인을 만들기 위해 실과(實科)와 실험실습을 중요시하였다.
네째, 피교육자에게 강요와 억압을 하는 전제적인 교사상을 배격하고 이해와 설득 그리고 솔선수범으로 모범이 되어 교육력을 강화하는 민주적 교사상을 중요시하였다.
다섯째, 학교교육 이외에 사회와 언론과 종교를 통한 교육도 중요시하였다.
결국 한서의 교육사상은 교육구국의 사상으로 귀결되며, 교육목적, 내용, 방법등 그의 교육활동 전반에 걸쳐서 교육을 통해 민중을 계몽하고 계몽된 민중의 힘으로 국권을 회복, 강화하려는 교육적 민족주의를 지향하였다고 하겠다.
3.교육사적 의의
한서는 내적 모순과 외세의 도전 앞에서 무기력하게 기울어 가는 한말의 전환기에 태어나 평생을 구국의 일념으로 민족의 수난기를 감래하였으며, 끝내 그가 염원, 확신하였던 민족의 자주독립과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서거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당시 동아일보는 조선의 일군이 가셨으니 우리들 조선사람은 슬퍼한다 고하였으며, 이은상은 역사의 풍우 속에서 구국의 의기와 정열에 불타오르던 민족혼의 등대요, 남먼저 깨어 일어나 외치며 앞섰던 새 세대의 신봉 이라고 하였다.
한서 남궁억은 개화의 선각자, 교육자, 언론인, 종교인, 민족운동의 지도자로 민족의 장래를 위해 횃불을 든 민족혼의 등대로서 민족이 수난과 핍박 속에 신음하고 있을 때 오로지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헌신하였던 조선의 일군이었다.
물론 그의 교육적 민족주의가 대중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였으며, 언론활동과 교육활동이 장래를 위한 준비로써 실력 양성으로만 그쳤을 뿐 식민통치에 대한 절대 투쟁으로 나가지 못한 점이 있고, 그의 민족운동이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민족적 감정을 민족의식으로 활성화하는 데 영향을 미치기는 하였으나 정치적 이데올로기에까지 발전하지 못한 점이 한서의 교육적 민족주의와 애국계몽운동의 한계로 지적될 수 있다.
그러나 교육사적으로 보았을 때 한서는 우선 구국교육운동가로서 구원한 이상적 교사상을 몸소 실천으로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일찍이 서구 문명에 눈을 떠 전통적 유교적 교육 내용과 방법으로부터 근대적인 새로운 교육 내용과 방법으로 전환하는데 있어서 교량적 역할을 한 새교육의 제창자였으며, 일제의 압박과 통치하에서 그가 보여준 민족정신과 애국사상의 함양을 위한 교육적 노력은 비단 교육사적 입장에서 뿐만 아니라 민족사적 입장에서도 과소 평가될 수 없는 것이다.
아울러 그가 행한 교육이 주지주의적 교육보다는 전인적 교육이었으며, 실천인을 기르는데 있었음은 오늘 우리의 현실에 비추어 보아도 중요한 뜻을 지닌다고 하겠다. 특히 실천궁행하는 지행합일의 교육이야말로 한서 자신의 인간상을 잘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