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
2. 단재사학의 특징
3. 역사연구의 동기
4. 각 시기별 역사연구
5. 단재의 역사연구 방법론
6. 단재 사학의 민족주의적 성격
7. 유교적 중세사학의 극복과 근대사학의 성립 : 민족사학의 의의
2. 단재사학의 특징
3. 역사연구의 동기
4. 각 시기별 역사연구
5. 단재의 역사연구 방법론
6. 단재 사학의 민족주의적 성격
7. 유교적 중세사학의 극복과 근대사학의 성립 : 민족사학의 의의
본문내용
의 관계를, 넓게는 동북아시아에서의 민족간의 我와 非我의 관계를 규명해 나간 것이었다고 하겠다.
3) ‘郎家’思想의 발견과 金富軾 사학에 대한 비판
가. ‘郎家’思想의 발견
단재는 특히 자주적인 낭가사상의 패퇴가 우리의 웅혼한 역사를 말살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낭가’사상의 근거위에서 조선의 자주적이고 웅혼한 역사를 회복하는 것을 일생의 사명으로 삼았다. 단재는 조선의 전통사상인 ‘낭가’사상이 위축되고 중국으로부터 수용된 유교가 도입됨으로 자주적이고 웅혼한 우리의 기상이 죽게 되었다고 한다.
나. 김부식사학에 대한 비판
① 단재의 김부식에 대한 비판은 그의 사론과 역사서술 전편에 흐르고 있지만, 요약하면 김부식이 崇儒慕華 사대주의자로서 조선을 멸시하는 중국측 사서와 그 정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반면 단군이래 郎家系統으로 내려오던 강건 웅혼했던 조선사는 중국측 사서에 위배된다 하여 모두 제거해 버렸다는 것이다.
② 단재는 당시까지 내려오던 한국의 강건한 실제 역사가 나약하고 이렇게 주체성이 없게 된 것은 바로 崇儒慕華 사대주의인 바로 김부식 때문이라고 하였다. 여기에는 단재가 고려 초 중기의 사상사를 나름대로 정리한 데서 얻은 결론이었다. 이는 고려 중기의 '妙淸의 亂'을 사상사적으로 다룬 <朝鮮歷史上 一千年來 第一大事件>이란 논문에 잘 나타나 있다. 요약하면 이렇다. 고려에는 초기부터 평양에 도읍을 정하고 나아가 고구려 옛 강토를 회복하자는 화랑의 무사가 한 파로 있었고, 事大로 국시를 삼아 압록강 이내의 안주를 주장하는 유교도가 한 파로 있었다. 양파는 대치한 지 수백년만에 佛僧 妙淸이 화랑의 사상에다가 음양가의 미신을 보태어 평양에서 거병하여 북벌을 실행하려다가 유교도의 김부식에게 패망하고 말았다. 이어서 김부식은 사대주의를 근본으로 하여 《삼국사기》를 지었는데, 거기에는 동북 부여를 빼어버리고 조선문화의 근본을 진토에 묻어버렸으며 발해를 버리어 삼국이래 결정된 문명을 초개에 던지게 되었고, 또 고구려와 백제가 남긴 명예의 역사는 소탕하면서 魏兵을 깨친 백제의 沙法名의 이름이 《삼국사기》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③ 결국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지을 때, 古記를 삭제하여 시대로는 삼국 이후부터 끊어 그 이전의 왕조로는 부여도 빼 버렸고, 강역으로는 압록강 이동부터 획정하였으며, 그 열전은 유교에 가까운 인물로 한하여 그 이외의 종교는 國仙敎와 불교의 巨聖들을 빼버렸고, 춘추필법의 노예가 되어 柳花聖母의 修道나 동명성왕의 유적은 한 귀절도 남기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중국사람의 심리로 《삼국사기》를 지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단재는 김부식이 이렇게 자기의 주장에 맞는 사료는 적당히 개작하고 불합하는 사료는 論貶塗改 혹은 삭제하였기 때문에 역사편찬에 필요한 사료들이 많이 인멸하게 되었는데 따라서 역대의 兵火보다 김부식의 사대주의가 사료를 없애는 주역이 되었다고 하였다. 이렇게 때문에 단재는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문화사로나 정치사로나 가치가 전무하다"고 결론지었다.
④ 단재의 김부식과 舊史에 대한 비판은 곧 '낭가'사상을 상실한 慕華 崇儒 事大主義(모화 승유 사대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따라서 단재의 이같은 비판은 곧 자기의 사상과 문화, 전통을 중요시하고 거기에서 자신의 자주성을 찾아야 한다는 중요한 민족주의의 원리를 도출해 내어야 했던 것이다.
다. 단재의 고대사인식
단재의 고대사에 대한 인식은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와 일제에 의한 식민주의 사학을 거부 청산하는 데에 있었다. 따라서 그는 고대에서부터 중국에 필적하는 조선사의 웅혼한 사적을 돋보이게 하고자 노력하였다. 중국을 능가하는 상고문화의 우수성을 강조하는가 하면, 단군 부여족의 支那식민론과 백제의 요서경략론을 주장하고 對중국투쟁에서 고구려의 승리를 강조하는 것 등은 바로 종래 조선사를 침윤시켜 온 사대주의론을 거부하는 한편 조선은 상고시대부터 강건한 기백을 가진 문화민족이었음을 들어내 보임으로써 민족독립의 가능성과 자부심을 고양하였다. 또 일제의 조선침략과 그 지배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했던 ‘任那日本府說’ 등을 부정하고 백제신라의 일본정복설을 주장한 것은 일제 관학자들의 식민주의사관을 거부하는 한편 당시의 식민지적 민족상황을 철폐하려는 그의 의지의 소산이었다. 이것은 그의 민족주의 사학이 지향하는 바가 어떤 것인가를 암시해 준다. 그가 그리려고 한 민족사상은, 한국의 고대사를 통해서만 표출된 것이기는 해도, 강건한 기백과 고상한 문화를 기반으로 한 완전자주독립민족이었다.
7. 유교적 중세사학의 극복과 근대사학의 성립 : 민족사학의 의의
단재는 그의 역사 연구 제 3기에 와서 유교적 가치관에 입각하여, 현실적인 것은 물론 역사적 사건과 인물에 대한 종래의 윤리 체계 자체를 비판했을 뿐만 아니라 그 윤리에 입각한 역사관도 아울러 비판하였다. 즉 단재는 유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천명론과 의리론 및 정통론 등을 비판 내지는 정면으로 부정하였다. 일제 강점하에서 제국주의의 침략과 강권주의가 세계를 지배하는 현실을 목격한 단재는, 민족 독립을 위한 강력한 투쟁 방법으로 민중혁명론을 구체화시키면서 종래의 유교 중심의 천명론과 의리론, 그리고 거기에 입각하여 성립된 정통론적 역사관을 배재하였다.
또한 의리론정통론에 입각한 역사가 정권의 자기 합리화 내지는 상대방 비판의 방편으로서, 일종의 이데올로기성이 거기에 부여되었던 셈인데, 단재는 이를 제거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단재는 역사학을 편협한 의리론정통론과 이데올로기성에서 해방시켜 역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밝히는 ‘역사과학’의 위치로 끌어올리려 하였다. 즉 근대적 역사학의 좌표 설정이 단재에게서 가능해졌던 것이다. 이것은 단재에게 있어서 유교적 중세 사학의 완전한 청산과 근대 사학의 성립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단재의 근대 사학의 성립 배경에는 역사 주체로서의 민중에 대한 그의 신념과 근대 역사학의 이론에 대한 그의 연구가 폭넓게 수용되고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참고 문헌>
신일철 著, 申采浩의 歷史思想硏究, 고려대학교 출판부, 1983
이만열 著, 丹齋 申采浩의 歷史學 硏究, 문학과 지성사, 1990
3) ‘郎家’思想의 발견과 金富軾 사학에 대한 비판
가. ‘郎家’思想의 발견
단재는 특히 자주적인 낭가사상의 패퇴가 우리의 웅혼한 역사를 말살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낭가’사상의 근거위에서 조선의 자주적이고 웅혼한 역사를 회복하는 것을 일생의 사명으로 삼았다. 단재는 조선의 전통사상인 ‘낭가’사상이 위축되고 중국으로부터 수용된 유교가 도입됨으로 자주적이고 웅혼한 우리의 기상이 죽게 되었다고 한다.
나. 김부식사학에 대한 비판
① 단재의 김부식에 대한 비판은 그의 사론과 역사서술 전편에 흐르고 있지만, 요약하면 김부식이 崇儒慕華 사대주의자로서 조선을 멸시하는 중국측 사서와 그 정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반면 단군이래 郎家系統으로 내려오던 강건 웅혼했던 조선사는 중국측 사서에 위배된다 하여 모두 제거해 버렸다는 것이다.
② 단재는 당시까지 내려오던 한국의 강건한 실제 역사가 나약하고 이렇게 주체성이 없게 된 것은 바로 崇儒慕華 사대주의인 바로 김부식 때문이라고 하였다. 여기에는 단재가 고려 초 중기의 사상사를 나름대로 정리한 데서 얻은 결론이었다. 이는 고려 중기의 '妙淸의 亂'을 사상사적으로 다룬 <朝鮮歷史上 一千年來 第一大事件>이란 논문에 잘 나타나 있다. 요약하면 이렇다. 고려에는 초기부터 평양에 도읍을 정하고 나아가 고구려 옛 강토를 회복하자는 화랑의 무사가 한 파로 있었고, 事大로 국시를 삼아 압록강 이내의 안주를 주장하는 유교도가 한 파로 있었다. 양파는 대치한 지 수백년만에 佛僧 妙淸이 화랑의 사상에다가 음양가의 미신을 보태어 평양에서 거병하여 북벌을 실행하려다가 유교도의 김부식에게 패망하고 말았다. 이어서 김부식은 사대주의를 근본으로 하여 《삼국사기》를 지었는데, 거기에는 동북 부여를 빼어버리고 조선문화의 근본을 진토에 묻어버렸으며 발해를 버리어 삼국이래 결정된 문명을 초개에 던지게 되었고, 또 고구려와 백제가 남긴 명예의 역사는 소탕하면서 魏兵을 깨친 백제의 沙法名의 이름이 《삼국사기》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③ 결국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지을 때, 古記를 삭제하여 시대로는 삼국 이후부터 끊어 그 이전의 왕조로는 부여도 빼 버렸고, 강역으로는 압록강 이동부터 획정하였으며, 그 열전은 유교에 가까운 인물로 한하여 그 이외의 종교는 國仙敎와 불교의 巨聖들을 빼버렸고, 춘추필법의 노예가 되어 柳花聖母의 修道나 동명성왕의 유적은 한 귀절도 남기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중국사람의 심리로 《삼국사기》를 지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단재는 김부식이 이렇게 자기의 주장에 맞는 사료는 적당히 개작하고 불합하는 사료는 論貶塗改 혹은 삭제하였기 때문에 역사편찬에 필요한 사료들이 많이 인멸하게 되었는데 따라서 역대의 兵火보다 김부식의 사대주의가 사료를 없애는 주역이 되었다고 하였다. 이렇게 때문에 단재는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문화사로나 정치사로나 가치가 전무하다"고 결론지었다.
④ 단재의 김부식과 舊史에 대한 비판은 곧 '낭가'사상을 상실한 慕華 崇儒 事大主義(모화 승유 사대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따라서 단재의 이같은 비판은 곧 자기의 사상과 문화, 전통을 중요시하고 거기에서 자신의 자주성을 찾아야 한다는 중요한 민족주의의 원리를 도출해 내어야 했던 것이다.
다. 단재의 고대사인식
단재의 고대사에 대한 인식은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와 일제에 의한 식민주의 사학을 거부 청산하는 데에 있었다. 따라서 그는 고대에서부터 중국에 필적하는 조선사의 웅혼한 사적을 돋보이게 하고자 노력하였다. 중국을 능가하는 상고문화의 우수성을 강조하는가 하면, 단군 부여족의 支那식민론과 백제의 요서경략론을 주장하고 對중국투쟁에서 고구려의 승리를 강조하는 것 등은 바로 종래 조선사를 침윤시켜 온 사대주의론을 거부하는 한편 조선은 상고시대부터 강건한 기백을 가진 문화민족이었음을 들어내 보임으로써 민족독립의 가능성과 자부심을 고양하였다. 또 일제의 조선침략과 그 지배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했던 ‘任那日本府說’ 등을 부정하고 백제신라의 일본정복설을 주장한 것은 일제 관학자들의 식민주의사관을 거부하는 한편 당시의 식민지적 민족상황을 철폐하려는 그의 의지의 소산이었다. 이것은 그의 민족주의 사학이 지향하는 바가 어떤 것인가를 암시해 준다. 그가 그리려고 한 민족사상은, 한국의 고대사를 통해서만 표출된 것이기는 해도, 강건한 기백과 고상한 문화를 기반으로 한 완전자주독립민족이었다.
7. 유교적 중세사학의 극복과 근대사학의 성립 : 민족사학의 의의
단재는 그의 역사 연구 제 3기에 와서 유교적 가치관에 입각하여, 현실적인 것은 물론 역사적 사건과 인물에 대한 종래의 윤리 체계 자체를 비판했을 뿐만 아니라 그 윤리에 입각한 역사관도 아울러 비판하였다. 즉 단재는 유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천명론과 의리론 및 정통론 등을 비판 내지는 정면으로 부정하였다. 일제 강점하에서 제국주의의 침략과 강권주의가 세계를 지배하는 현실을 목격한 단재는, 민족 독립을 위한 강력한 투쟁 방법으로 민중혁명론을 구체화시키면서 종래의 유교 중심의 천명론과 의리론, 그리고 거기에 입각하여 성립된 정통론적 역사관을 배재하였다.
또한 의리론정통론에 입각한 역사가 정권의 자기 합리화 내지는 상대방 비판의 방편으로서, 일종의 이데올로기성이 거기에 부여되었던 셈인데, 단재는 이를 제거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단재는 역사학을 편협한 의리론정통론과 이데올로기성에서 해방시켜 역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밝히는 ‘역사과학’의 위치로 끌어올리려 하였다. 즉 근대적 역사학의 좌표 설정이 단재에게서 가능해졌던 것이다. 이것은 단재에게 있어서 유교적 중세 사학의 완전한 청산과 근대 사학의 성립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단재의 근대 사학의 성립 배경에는 역사 주체로서의 민중에 대한 그의 신념과 근대 역사학의 이론에 대한 그의 연구가 폭넓게 수용되고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참고 문헌>
신일철 著, 申采浩의 歷史思想硏究, 고려대학교 출판부, 1983
이만열 著, 丹齋 申采浩의 歷史學 硏究, 문학과 지성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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