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초기 철기 시대
1. 초기 철기의 시작
2. 철기의 사용
3. 철기 제품
⑴ 철검
⑵ 협도
4. 청동기, 초기 철기 시대의 생활
5. 청동기, 초기 철기 시대의 예술
6. 철기시대의 연맹왕국
7. 철기 문화의 발전
⑴ 철기 문화의 보급 시기 ; 기원전 4세기경 이후
⑵ 전파 지역
⑶ 유물과 유적
⑷ 철기 문화의 영향
Ⅱ. 삼한시대
1. 삼한시대와 안면도
2. 삼한시대의 언양
3. 정치제도
4. 종교
5. 산업
6. 생활양식 및 풍습
7. 음악
1. 초기 철기의 시작
2. 철기의 사용
3. 철기 제품
⑴ 철검
⑵ 협도
4. 청동기, 초기 철기 시대의 생활
5. 청동기, 초기 철기 시대의 예술
6. 철기시대의 연맹왕국
7. 철기 문화의 발전
⑴ 철기 문화의 보급 시기 ; 기원전 4세기경 이후
⑵ 전파 지역
⑶ 유물과 유적
⑷ 철기 문화의 영향
Ⅱ. 삼한시대
1. 삼한시대와 안면도
2. 삼한시대의 언양
3. 정치제도
4. 종교
5. 산업
6. 생활양식 및 풍습
7. 음악
본문내용
: 天安)설로 수정되고 있으나 아직 정론(定論)이 되지는 못하고 있다).백제(伯濟 : 경기 광주(廣州) 지방이 중심임) 등 54개국의 지역적 연합체를 이루고 있었다.
마한의 여러 나라 중 총 호수는 10여 만호(戶)였으며, 그 중 큰 나라는 1만여호이었고, 작은 나라는 수천 호였다. 특히 목지국은 진국(辰國)의 중심지였을 뿐 아니라 삼한 시대에도 그 왕은 진왕(辰王)이라 일컬어 마한 여러 나라의 맹주(盟主)처럼 되어 있었다. 삼한의 초기에는 진왕의 세력이 진한, 변한에까지 미쳤다 한다. 진한과 변한은 총 호수가 4~5만호이었는데, 큰 나라는 4~5천호이었고, 작은 나라는 6~7백호에 지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삼한 78개의 소국들은 각각 지역에 따라 여러 부락국가로 된 연맹체였고, 각 부락국가에는 위에 족장(族長 : 君長)이 있어, 그 족장의 통솔 하에 부락적 또는 씨족적 자치생활을 하였다.
4. 종교
삼국사회에서는 천군(天君)이라 부르는 제사장(祭祀長)이 각 국읍(國邑)마다 1인씩 있어서 소도(蘇塗 : 솟대)라 부르는 제사지역을 관할하였는데, 소도는 신성한 지역으로서 법률의 힘이 여기에 미치지 못하였고 범죄인이 이곳으로 도피하면 그를 돌려보내지도 않았으며, 또 이들을 잡아가지도 못하게 되어 있었다. 즉 정치와 종교(제사)가 분리된 제정분리(祭政分離)의 사회였다.
5. 산업
인류 문화의 발전 단계의 제일 마지막시대인 철기시대에 해당하는 삼한사회는 농업과 양잠, 길쌈 등이 널리 행하여졌다. 특히 평야가 많은 삼한지역에는 벼농사가 일찍부터 행하여졌고 수리시설로 저수지도 많이 축조되었던 것 같다. 그 한 예로 김제(金堤)의 벽골지(碧骨池).밀양(密陽)의 수산제(守山堤).상주(尙州)의 공검지(恭儉池).제천(堤川)의 의림제(義林堤) 등은 이때의 저수지이다.
목축도 성했고 해안지대에는 어업도 성하였다. 특히 진한과 변한에서는 철이 많이 생산되어 널리 쓰였는데, 이 철은 물품매매에도 화폐처럼 사용되었고 멀리 낙랑, 대방과 일본에도 수출하였다고 한다.
6. 생활양식 및 풍습
농업이 그들 경제의 최대 근본이었으므로 씨를 뿌리는 봄과 추수하는 가을에는 계절적인 제사가 성행하였다. 씨를 뿌리고 난 5월에는 부락 전체의 군중이 모여 신에게 제사하고 가무(歌舞)와 음주(飮酒)로 밤낮을 즐겁게 놀았고 추수가 끝난 10월에도 그러하였다.
집은 대개 평지에 움집(토굴집 : 竪穴), 산지에는 귀틀집(고대의 통나무집)이 많았는데 의복은 삼베, 모시, 명주 등으로 만들어 입었다. 남자는 도포(道袍)처럼 된 웃옷을 입고 상투를 틀었고 가죽신 또는 짚신을 신었으며, 이 때부터 농기구인 지게가 사용되었다. 그리고 구슬을 재보(財寶)로 삼았고, 또 그것을 옷에 장식으로 달기도 하였으며 귀걸이와 목걸이도 사용하였다. 이러한 유물은 지금도 당시의 고분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다.
진한, 변한에서는 길 가던 사람들이 서로 길을 사양하였다 하니 풍속의 순후(淳厚)함을 말해주고 있으며, 혼인 등 예절에는 남녀의 구별이 있었고 법과 형벌은 일반적으로 엄하였다.
자연환경은 온화하고 곡식이 풍부하며 사람들은 명랑 쾌활한 성격을 지니고 있어서 노래, 춤, 음주가 성행하였으며, 특히 변한, 마한지역에는 비파(琵琶)와 같은 악기도 있었다고 한다.
7. 음악
5월 하종(下種 : 곡식의 씨를 뿌림)과 10월 농공(農功 : 추수)이 끝났을 때에 베풀어졌을 성대한 가무연(歌舞宴)은 오늘날의 농악무(農樂舞)나 호남지방의 강강수월래, 영남지방의 쾌지나칭칭나네와 같은 군무(群舞)나 원무(圓舞)의 시원(始原)일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변한과 진한에는 중국의 축(筑)과 비슷한 현악기(絃樂器)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가야금과 거문고가 만들어지기 전에 있었던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고>로 추정된다. 이 <고>에 딸린 속요(俗謠)나 속무(俗舞)가 의당(宜當) 존속했을 것으로 추측되나 자세한 것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 <고>는 6세기경 등장한 가야금의 전신(前身)으로 보이며 가야금 이후 거의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 출처
- 네이버 지식 in, 네이버 백과사전
- http://www.eonyang.com/history/history2_3.htm
- http://cafe.naver.com/s7204/5
- http://cafe.naver.com/powerofkorea.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1220
- 책 「다시 찾는 우리역사」(한영우 저 - 경세원)
마한의 여러 나라 중 총 호수는 10여 만호(戶)였으며, 그 중 큰 나라는 1만여호이었고, 작은 나라는 수천 호였다. 특히 목지국은 진국(辰國)의 중심지였을 뿐 아니라 삼한 시대에도 그 왕은 진왕(辰王)이라 일컬어 마한 여러 나라의 맹주(盟主)처럼 되어 있었다. 삼한의 초기에는 진왕의 세력이 진한, 변한에까지 미쳤다 한다. 진한과 변한은 총 호수가 4~5만호이었는데, 큰 나라는 4~5천호이었고, 작은 나라는 6~7백호에 지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삼한 78개의 소국들은 각각 지역에 따라 여러 부락국가로 된 연맹체였고, 각 부락국가에는 위에 족장(族長 : 君長)이 있어, 그 족장의 통솔 하에 부락적 또는 씨족적 자치생활을 하였다.
4. 종교
삼국사회에서는 천군(天君)이라 부르는 제사장(祭祀長)이 각 국읍(國邑)마다 1인씩 있어서 소도(蘇塗 : 솟대)라 부르는 제사지역을 관할하였는데, 소도는 신성한 지역으로서 법률의 힘이 여기에 미치지 못하였고 범죄인이 이곳으로 도피하면 그를 돌려보내지도 않았으며, 또 이들을 잡아가지도 못하게 되어 있었다. 즉 정치와 종교(제사)가 분리된 제정분리(祭政分離)의 사회였다.
5. 산업
인류 문화의 발전 단계의 제일 마지막시대인 철기시대에 해당하는 삼한사회는 농업과 양잠, 길쌈 등이 널리 행하여졌다. 특히 평야가 많은 삼한지역에는 벼농사가 일찍부터 행하여졌고 수리시설로 저수지도 많이 축조되었던 것 같다. 그 한 예로 김제(金堤)의 벽골지(碧骨池).밀양(密陽)의 수산제(守山堤).상주(尙州)의 공검지(恭儉池).제천(堤川)의 의림제(義林堤) 등은 이때의 저수지이다.
목축도 성했고 해안지대에는 어업도 성하였다. 특히 진한과 변한에서는 철이 많이 생산되어 널리 쓰였는데, 이 철은 물품매매에도 화폐처럼 사용되었고 멀리 낙랑, 대방과 일본에도 수출하였다고 한다.
6. 생활양식 및 풍습
농업이 그들 경제의 최대 근본이었으므로 씨를 뿌리는 봄과 추수하는 가을에는 계절적인 제사가 성행하였다. 씨를 뿌리고 난 5월에는 부락 전체의 군중이 모여 신에게 제사하고 가무(歌舞)와 음주(飮酒)로 밤낮을 즐겁게 놀았고 추수가 끝난 10월에도 그러하였다.
집은 대개 평지에 움집(토굴집 : 竪穴), 산지에는 귀틀집(고대의 통나무집)이 많았는데 의복은 삼베, 모시, 명주 등으로 만들어 입었다. 남자는 도포(道袍)처럼 된 웃옷을 입고 상투를 틀었고 가죽신 또는 짚신을 신었으며, 이 때부터 농기구인 지게가 사용되었다. 그리고 구슬을 재보(財寶)로 삼았고, 또 그것을 옷에 장식으로 달기도 하였으며 귀걸이와 목걸이도 사용하였다. 이러한 유물은 지금도 당시의 고분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다.
진한, 변한에서는 길 가던 사람들이 서로 길을 사양하였다 하니 풍속의 순후(淳厚)함을 말해주고 있으며, 혼인 등 예절에는 남녀의 구별이 있었고 법과 형벌은 일반적으로 엄하였다.
자연환경은 온화하고 곡식이 풍부하며 사람들은 명랑 쾌활한 성격을 지니고 있어서 노래, 춤, 음주가 성행하였으며, 특히 변한, 마한지역에는 비파(琵琶)와 같은 악기도 있었다고 한다.
7. 음악
5월 하종(下種 : 곡식의 씨를 뿌림)과 10월 농공(農功 : 추수)이 끝났을 때에 베풀어졌을 성대한 가무연(歌舞宴)은 오늘날의 농악무(農樂舞)나 호남지방의 강강수월래, 영남지방의 쾌지나칭칭나네와 같은 군무(群舞)나 원무(圓舞)의 시원(始原)일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변한과 진한에는 중국의 축(筑)과 비슷한 현악기(絃樂器)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가야금과 거문고가 만들어지기 전에 있었던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고>로 추정된다. 이 <고>에 딸린 속요(俗謠)나 속무(俗舞)가 의당(宜當) 존속했을 것으로 추측되나 자세한 것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 <고>는 6세기경 등장한 가야금의 전신(前身)으로 보이며 가야금 이후 거의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 출처
- 네이버 지식 in, 네이버 백과사전
- http://www.eonyang.com/history/history2_3.htm
- http://cafe.naver.com/s7204/5
- http://cafe.naver.com/powerofkorea.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1220
- 책 「다시 찾는 우리역사」(한영우 저 - 경세원)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