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광주 풍납리 토성 [廣州風納里土城]
⑴ 풍납토성
⑵ 풍납토성 축조법
⑶ 유물
⑷ 관련기사
① 인천일보 “풍납 토성, 몽촌보다 앞선 백제왕성”
② 세계일보 : 풍납토성 국내 最古 도로 발견
Ⅱ. 몽촌토성 [夢村土城]
⑴ 몽촌토성
⑵ 유물
Ⅲ. 석촌동 백제초기 적석총 [石村洞百濟初期積石塚]
⑴ 석촌동 제3호 돌무지무덤
⑵ 석촌동 제4호 돌무지무덤
⑶ 석촌동 제1호분
⑷ 석촌동 제2호분
⑸ 석촌동 제2호 토광묘
⑹ 석촌동 제3호 토광묘(石村洞 第三號 土壙墓)
⑺ 내원외방형적석총(內圓外方形積石塚)
Ⅳ. 방이동 백제고분군 [芳荑洞百濟古墳群]
Ⅴ. 가락동 고분군 [可樂洞 古墳群]
Ⅵ. 하남시 이성산성 [二聖山成] ; 이성산성의 기원에 관한 고찰
(naver 지식 in 내용)
1. 서론
2. 본론
⑴ 초기 백제 도읍 지설
⑵ 신라 축조설
⑶ 확인한 것
3. 결론
Ⅶ. 그 외의 백제 유적지
⑴ 공주 공산성 [公州公山城]
⑵ 공주 정지산 백제유적 [公州艇止山百濟遺蹟]
⑶ 부여 관북리 백제유적 [扶餘官北里百濟遺蹟]
⑷ 부여 구아리 백제유적 [扶餘舊衙里百濟遺蹟]
⑴ 풍납토성
⑵ 풍납토성 축조법
⑶ 유물
⑷ 관련기사
① 인천일보 “풍납 토성, 몽촌보다 앞선 백제왕성”
② 세계일보 : 풍납토성 국내 最古 도로 발견
Ⅱ. 몽촌토성 [夢村土城]
⑴ 몽촌토성
⑵ 유물
Ⅲ. 석촌동 백제초기 적석총 [石村洞百濟初期積石塚]
⑴ 석촌동 제3호 돌무지무덤
⑵ 석촌동 제4호 돌무지무덤
⑶ 석촌동 제1호분
⑷ 석촌동 제2호분
⑸ 석촌동 제2호 토광묘
⑹ 석촌동 제3호 토광묘(石村洞 第三號 土壙墓)
⑺ 내원외방형적석총(內圓外方形積石塚)
Ⅳ. 방이동 백제고분군 [芳荑洞百濟古墳群]
Ⅴ. 가락동 고분군 [可樂洞 古墳群]
Ⅵ. 하남시 이성산성 [二聖山成] ; 이성산성의 기원에 관한 고찰
(naver 지식 in 내용)
1. 서론
2. 본론
⑴ 초기 백제 도읍 지설
⑵ 신라 축조설
⑶ 확인한 것
3. 결론
Ⅶ. 그 외의 백제 유적지
⑴ 공주 공산성 [公州公山城]
⑵ 공주 정지산 백제유적 [公州艇止山百濟遺蹟]
⑶ 부여 관북리 백제유적 [扶餘官北里百濟遺蹟]
⑷ 부여 구아리 백제유적 [扶餘舊衙里百濟遺蹟]
본문내용
었다.
475년(문주왕 1) 한산성(漢山城)에서 웅진(熊津)으로 천 도하였다가, 538년(성왕 16)에 부여로 천도할 때까지 5 대 64년간의 도읍지인 공주를 수호하기 위하여 축조한 것으로, 당시의 중심 산성이었다. 해발 110m인 공산(公 山)의 정상에서 서쪽의 봉우리까지 에워싼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며 성의 둘레는 2450m이다. 평면으로는 동서 약 800m, 남북이 약 400m이며 사방에 석벽이 남아 있다. 원래 토성이었는데 조선 중기에 석성으로 개축된 것이다.
동쪽과 남쪽 성벽은 돌로 쌓아 높이 약 2.5m인데, 전면만을 석축 하였으며 내면은 토사·잡석으로 다져 붙였고, 너비는 3m이다. 동쪽 성벽 밖에 토성이 있는데, 높이는 무너져서 알 수 없으나 너비는 약 3m이다. 서쪽 성벽은 본래 토축(土築)된 위에 돌로 쌓아 외면만을 축조하여 높이는 4m 정도이다. 지금은 원형을 알 수 없는 서문터(현재는 통로) 남쪽은 석재로 쌓았는데, 너비 4.5m, 높이 3m이다.
성벽 안에는 7∼8m의 호(壕)가 남아 있다. 북쪽에는 조잡한 석축성벽(石築城壁)이 높이 2m, 너비 1.5m 정도로 남아 있으며, 수구(水口)도 있다. 남쪽에 남문터(현재 鎭南樓)가 있고, 그 서쪽은 높이 3m, 너비 3.7m로 석축 하였고, 성내에는 너비 11m의 호가 있다. 진남루 앞의 넓은 터는 백제의 궁터이고, 공북루(拱北樓)의 윗부분은 건물터로 추정된다. 또, 이 부근에는 우물터 3개가 있다. 성내에는 후대에 세워진 영은사·광복루(光復樓)·쌍수정(雙樹亭)·연못터 등이 남아 있다.
⑵ 공주 정지산 백제유적 [公州艇止山百濟遺蹟]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 정지산에 있는 백제시대의 유적.
지정번호 : 충남기념물 제147호
지정연도 : 1998년 7월 28일
소장 : 건교부 및 사유
소재지 : 충남 공주시 금성동 산1 외4필
시대 : 백제시대
면적 : 8,970㎡
분류 : 유지
1998년 7월 28일 충청남도기념물 제147호로 지정 되었다.
백제의 왕실제사유적으로 공주 송산리 고분군(公州 宋山里古墳群:사적 13)과 인접한 곳에 있다. 8,970㎡ 가량 되는 이 일대의 내부시설물이 국내에서 최초로 조사된 특수한 구조물이어서 자료가 부족한 백제사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시설물은 기존의 가옥을 모두 철거한 후 능선을 깎아내고 넓고 평탄한 대지에 만들어졌으며, 공주 공 산성(公州公山城:사적 12)이 바라다 보이는 남동쪽으 로는 네댓 겹의 나무울타리를 돌리고, 송산리 고분군 쪽으로 연결되는 능선에는 약 1m 내외의 좁은 출입 구만 남긴 채 너비 5m, 깊이 2m 이상의 넓고 깊은 도량을 파고 내부에 몇 채의 건물을 축조하였다. 이곳에서 화려한 장식이 부착된 장고형 그릇받침 등의 유물이 수습되었다.
백제문화권 종합개발계획에 따라 1995년 3월 24일 착공한 백제큰길(공주와 부여를 잇는 백제문화권개발도로) 공사를 진행하는 도중 현장이 지나갈 예정이었던 정지산 정상이, 왕이 하늘에 천제(天祭)를 지내던 제단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터널로 설계가 변경되었다.
⑶ 부여 관북리 백제유적 [扶餘官北里百濟遺蹟]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扶餘邑) 관북리에 있는 백제 때의 유적지.
지정번호 : 사적 제428호
지정연도 : 2001년 2월 5일
소재지 : 충남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 725
시대 : 삼국시대
면적 : 9만 5048
분류 : 기타유적지㎡
1983년 9월 29일 충청남도기념물 제43호(傳百濟王宮址) 로 지정되었다가 관북리 725번지 일대를 포함하여 184필지 9만 5048㎡를 2001년 2월 5일 사적 제428호로 변경하였 다.
관북리 일대는 백제의 왕궁터와 고려·조선시대의 관아가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지역이다. 왕궁터는 부여 부소산성(사적 5) 남쪽 기슭에 위치하며 부여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는 입지조건으로 보아 백제왕궁지로 적합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왕궁터의 범위는, 동쪽은 부여여자고등학교 앞 동쪽의 쌍북리 와요지, 서쪽은 부여문화재연구소, 남쪽은 논산 방면의 길가, 북쪽은 부소산 남쪽 기슭을 한계선으로 추정된다.
왕궁 터에서는 건물터·도로·하수구·연못·석축시설 등의 유구가 확인되었고 현재 부여여자고등학교에는 임금이 마셨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백제의 어정(御井)인 팔각정(八角井:충남문화재자료 103)이 있다.
연못은 직사각형의 활석으로 쌓았으며 남북길이 약 6m, 깊이 약 1m이고 이곳에서 연꽃무늬 수막새, 토기, 금동제 귀고리, 등잔, 개원통보, 대바구니, 목간(木簡) 등의 다양한 유물이 대량 출토되었다. 특히 나무패에 글씨를 쓴 목간은 백제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출토된 것이다.
연못 동쪽에는 양쪽에 배수로가 설치된 도로망이 발견되었고 여기에서도 연꽃무늬 수막새 등 많은 토기와 기와가 발견되었다. 이밖에도 기와로 쌓은 건물 기단과 약 80㎝ 높이의 석축시설이 확인되었다.
부여문화재연구소 앞쪽에 있는 민가에는 백제 때의 사각형 및 둥근 모양의 주춧돌·지대석·판석 등의 석재가 흩어져 있으며,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된 부여 석조(보물 194)도 원래 이곳에 있던 것인데, 당시 궁궐에서 연꽃을 심었던 그릇이라고 전해진다.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였던 곳이니만큼 학술적 의미가 크다.
⑷ 부여 구아리 백제유적 [扶餘舊衙里百濟遺蹟]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구아리에 있는 백제시대의 유적.
지정번호 : 충남기념물 제88호
지정연도 : 1993년 7월 20일
소재지 : 충남 부여군 부여읍 구아리
면적 : 5,445㎡
분류 : 기타문화재
1993년 7월 20일 충청남도기념물 제88호로 지정되었다. 〈천왕(天王)〉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조각이 출토되어 절터로 추정하였으나 발굴 결과 백제시대에 만들어진 우물 2기가 발견되었다. 우물 2기는 모두 사각형이고 깊이 270 ㎝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우물 안에서 백제시대의 기와,
토기, 방추차 등이 출토되었다.
*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오픈사전, 지식in
- 키즈코스모스 (http://www.kizcosmos.or.kr)
- 서울 문화재 사이트 (http://sca.visitseoul.net/intro/intro.htm)
475년(문주왕 1) 한산성(漢山城)에서 웅진(熊津)으로 천 도하였다가, 538년(성왕 16)에 부여로 천도할 때까지 5 대 64년간의 도읍지인 공주를 수호하기 위하여 축조한 것으로, 당시의 중심 산성이었다. 해발 110m인 공산(公 山)의 정상에서 서쪽의 봉우리까지 에워싼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며 성의 둘레는 2450m이다. 평면으로는 동서 약 800m, 남북이 약 400m이며 사방에 석벽이 남아 있다. 원래 토성이었는데 조선 중기에 석성으로 개축된 것이다.
동쪽과 남쪽 성벽은 돌로 쌓아 높이 약 2.5m인데, 전면만을 석축 하였으며 내면은 토사·잡석으로 다져 붙였고, 너비는 3m이다. 동쪽 성벽 밖에 토성이 있는데, 높이는 무너져서 알 수 없으나 너비는 약 3m이다. 서쪽 성벽은 본래 토축(土築)된 위에 돌로 쌓아 외면만을 축조하여 높이는 4m 정도이다. 지금은 원형을 알 수 없는 서문터(현재는 통로) 남쪽은 석재로 쌓았는데, 너비 4.5m, 높이 3m이다.
성벽 안에는 7∼8m의 호(壕)가 남아 있다. 북쪽에는 조잡한 석축성벽(石築城壁)이 높이 2m, 너비 1.5m 정도로 남아 있으며, 수구(水口)도 있다. 남쪽에 남문터(현재 鎭南樓)가 있고, 그 서쪽은 높이 3m, 너비 3.7m로 석축 하였고, 성내에는 너비 11m의 호가 있다. 진남루 앞의 넓은 터는 백제의 궁터이고, 공북루(拱北樓)의 윗부분은 건물터로 추정된다. 또, 이 부근에는 우물터 3개가 있다. 성내에는 후대에 세워진 영은사·광복루(光復樓)·쌍수정(雙樹亭)·연못터 등이 남아 있다.
⑵ 공주 정지산 백제유적 [公州艇止山百濟遺蹟]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 정지산에 있는 백제시대의 유적.
지정번호 : 충남기념물 제147호
지정연도 : 1998년 7월 28일
소장 : 건교부 및 사유
소재지 : 충남 공주시 금성동 산1 외4필
시대 : 백제시대
면적 : 8,970㎡
분류 : 유지
1998년 7월 28일 충청남도기념물 제147호로 지정 되었다.
백제의 왕실제사유적으로 공주 송산리 고분군(公州 宋山里古墳群:사적 13)과 인접한 곳에 있다. 8,970㎡ 가량 되는 이 일대의 내부시설물이 국내에서 최초로 조사된 특수한 구조물이어서 자료가 부족한 백제사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시설물은 기존의 가옥을 모두 철거한 후 능선을 깎아내고 넓고 평탄한 대지에 만들어졌으며, 공주 공 산성(公州公山城:사적 12)이 바라다 보이는 남동쪽으 로는 네댓 겹의 나무울타리를 돌리고, 송산리 고분군 쪽으로 연결되는 능선에는 약 1m 내외의 좁은 출입 구만 남긴 채 너비 5m, 깊이 2m 이상의 넓고 깊은 도량을 파고 내부에 몇 채의 건물을 축조하였다. 이곳에서 화려한 장식이 부착된 장고형 그릇받침 등의 유물이 수습되었다.
백제문화권 종합개발계획에 따라 1995년 3월 24일 착공한 백제큰길(공주와 부여를 잇는 백제문화권개발도로) 공사를 진행하는 도중 현장이 지나갈 예정이었던 정지산 정상이, 왕이 하늘에 천제(天祭)를 지내던 제단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터널로 설계가 변경되었다.
⑶ 부여 관북리 백제유적 [扶餘官北里百濟遺蹟]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扶餘邑) 관북리에 있는 백제 때의 유적지.
지정번호 : 사적 제428호
지정연도 : 2001년 2월 5일
소재지 : 충남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 725
시대 : 삼국시대
면적 : 9만 5048
분류 : 기타유적지㎡
1983년 9월 29일 충청남도기념물 제43호(傳百濟王宮址) 로 지정되었다가 관북리 725번지 일대를 포함하여 184필지 9만 5048㎡를 2001년 2월 5일 사적 제428호로 변경하였 다.
관북리 일대는 백제의 왕궁터와 고려·조선시대의 관아가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지역이다. 왕궁터는 부여 부소산성(사적 5) 남쪽 기슭에 위치하며 부여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는 입지조건으로 보아 백제왕궁지로 적합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왕궁터의 범위는, 동쪽은 부여여자고등학교 앞 동쪽의 쌍북리 와요지, 서쪽은 부여문화재연구소, 남쪽은 논산 방면의 길가, 북쪽은 부소산 남쪽 기슭을 한계선으로 추정된다.
왕궁 터에서는 건물터·도로·하수구·연못·석축시설 등의 유구가 확인되었고 현재 부여여자고등학교에는 임금이 마셨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백제의 어정(御井)인 팔각정(八角井:충남문화재자료 103)이 있다.
연못은 직사각형의 활석으로 쌓았으며 남북길이 약 6m, 깊이 약 1m이고 이곳에서 연꽃무늬 수막새, 토기, 금동제 귀고리, 등잔, 개원통보, 대바구니, 목간(木簡) 등의 다양한 유물이 대량 출토되었다. 특히 나무패에 글씨를 쓴 목간은 백제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출토된 것이다.
연못 동쪽에는 양쪽에 배수로가 설치된 도로망이 발견되었고 여기에서도 연꽃무늬 수막새 등 많은 토기와 기와가 발견되었다. 이밖에도 기와로 쌓은 건물 기단과 약 80㎝ 높이의 석축시설이 확인되었다.
부여문화재연구소 앞쪽에 있는 민가에는 백제 때의 사각형 및 둥근 모양의 주춧돌·지대석·판석 등의 석재가 흩어져 있으며,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된 부여 석조(보물 194)도 원래 이곳에 있던 것인데, 당시 궁궐에서 연꽃을 심었던 그릇이라고 전해진다.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였던 곳이니만큼 학술적 의미가 크다.
⑷ 부여 구아리 백제유적 [扶餘舊衙里百濟遺蹟]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구아리에 있는 백제시대의 유적.
지정번호 : 충남기념물 제88호
지정연도 : 1993년 7월 20일
소재지 : 충남 부여군 부여읍 구아리
면적 : 5,445㎡
분류 : 기타문화재
1993년 7월 20일 충청남도기념물 제88호로 지정되었다. 〈천왕(天王)〉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조각이 출토되어 절터로 추정하였으나 발굴 결과 백제시대에 만들어진 우물 2기가 발견되었다. 우물 2기는 모두 사각형이고 깊이 270 ㎝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우물 안에서 백제시대의 기와,
토기, 방추차 등이 출토되었다.
*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오픈사전, 지식in
- 키즈코스모스 (http://www.kizcosmos.or.kr)
- 서울 문화재 사이트 (http://sca.visitseoul.net/intro/intro.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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