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와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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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김구와 이승만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머리말

2. 백범 독립운동의 자주적 성격
1) 항일독립운동
2) 새로운 차원의 독립운동

3. 백범의 정치사상
1) 민족주의
2) 자유 민주주의
3) 문화/교육사상

4. 백범의 통일로선

5. 맺는 말

본문내용

의한 단독정부의 수립이 통일 독립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에 그것은 마치 죽을 줄을 모르고 "구갈(구갈)을 풀려고 독약을 마시는 것"에 비유한 백범의 민족노선을 "현실경영의 미숙성"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것은 독립운동과정에서 보여준 그의 주체성과 민족사상에 바탕을 둔 대단히 정확한 현실인식이었고, 이 현실인식 위에서 내려진 민족사의 앞날에 나타날 불행에 대한 예견은 그가 간지 안 365일 만에 현실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눈에 보이는 동족상잔이라는 민족의 불행을 막고, 진정한 민족독립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이 육신을 조국이 수요(수요)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받칠" 결심이었고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위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데 협력하지 아니 하겠다"고 하여 '현실적인 길' 보다는 "바른 길'을 촉구했던 것이었다.
백범은 1948년 1월 29일 한독당 위원장으로서 유엔한위에 제출한 의견서에서 남한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첫째 유엔의 결의는 우리의 자주적 주권 행사가 명시되어 있지 않다. 둘째 필연적으로 남북분단의 우려가 있다. 셋째 유엔한위의 감시는 내정간섭이니 부당하다는 것이다. 단정수립에 반대하는 백범의 대안은 첫째 미소양군이 동시에 철수하고, 둘째 그 후 남북한 요인이 협의해야 하고, 셋째 이 남북협상 후에 총선거를 실시하자는 것이었다. 이러던 차에 백범은 3월 27일 김일성으로부터 4월 19일에 열리는 전조선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전조선제정당사회단체련석회의)에 참석하여 달라는 서한을 받고 온갖 모략과 만류를 무릅쓰고 남북협상의 참가를 강행했다. 백범의 남북협상 참가는 공산주의자들의 속성이나 전략전술을 몰라서거나 낙관적인 희망에서가 아니라 통일독립문제는 어디까지나 우리 민족의 문제이므로 죽으나 사나 비록 성사는 못할지라도 동포끼리 한번쯤 무릎을 맞대고 진지하게 논의해 모아야 한다는 자주정신의 논리적 귀결이었다.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 백범의 민족노선은 단순히 국토의 분단을 박아보자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바로 그의 정치사상과 독립운동 성격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그에게 있어서 광복과 독립은 같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조국의 해방으로 그의 독립운동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완전자주독립국가의 건설을 위한 그의 독립운동을 그 성격상 반쪽 정부의 수립과는 원천적으로 타협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의 입장은 단적으로 '일시적 풍파'인 주의 주장이나 외세에 휩쓸리기보다는 '영원한 혈통의 바다'를 온전하게 지키려는 노력이었다고 평가되어져다 할 것이다.
조국의 통일을 위해 38선을 베고 죽을 각오로 임했던 백범의 북행은 예상대로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40여 년의 세월이 지난 현재까지도 민족의 통일을 위한 가장 합리적이고 타당한 방법으로 시도되고 있는 것(남북회담)이 백범이제시한 민족노선의 범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음을 생각해 보면, "눈을 밟는 거친 길이기는 하지만 오늘의 내 행적이 뒷사람의 길이 되리라"는 그의 예측력 앞에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5. 결론
한일합방이란 한국과 일본이라는 서로 다른 두 개의 단위체가 자주적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일본이라는 단위체가 한국이라는 단위체를 속체(속체)화 시켰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식민지가는 용어는 속체화된 한국의 상황을 나타내는 말이고, 한국인의 입장에서 이 용어는 한국인의 [자기상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독립운동이란 [자기상실]상태를 [자기회복], 즉 주체적인 단위체로 회복하기 위한 [자기수립]의 노력으로 [단위의식]의 발로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이러한 [단위의식]은 혈연적, 문화적, 역사적, 지리적 요소 등에 의하여 그 경계선이 규정된 집합체의 구성원 의식이며, 이러한 의식의 기반은 인종, 언어, 역사등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으로서 [민족의식]이라고 부를 수 있다. 독립운동을 이렇게 민족의식에서 나오는 상실된 자기를 회복하기 위한 제반운동들이라고 규정할 때, 방법론상으로 가장 타당한 것은 자주적 역량에 기초한 투쟁이고, 그것을 정당화시키는 근원적인 사상은 민족주의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백범의 독립운동성격은 누차 강조한 것처럼 자주적 역량으로 완전한 자기 회복 및 수립을 위한 투쟁이었다. 그러나 광복은 자주적인 자리회복이 아니라 단지 억압세력이 타의 힘에 의하여 물러간 상황이었다. 따라서 광복이라는 상황이 원초적 단위체가 완전한 자기회복을 한 상태가 아니라는 점, 신탁통치를 실시할 경우 비록 시한부일망정 단위체는 다시 속체의 상태로 돌아가게 된다는 점등은 자명한 사실이고, 더군다나 백범은 단독정부의 수립이 실행된 경우 그것은 [자기수립]이전의 [자기분열] 그것도 재통합되기가 지극히 어려운 분열일 뿐만 아니라 남북한에 세워진 각각의 정부가 미국과 소련의 새로운 속체가 되는 것으로 보았다.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백범의 원칙노선은 독립운동의 성격과 동일 궤도 이에 있는 것으로서 철저히 주체적인 민족의식의 소산이었다. 따라서 단정수립반대 및 남북협상참가는 민족에 뿌리박은 완전자주통일독립국가 즉 완전한 [자기수립]을 위한 투쟁이었지 결코 국제정치와 시대상황에 대한 인식 부족이나 공산주의와 공산주의자들의 전략전술에 대한 무지의 소치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이러한 독립운동 과정은 자기신념체계에 충실했던 논리적 귀결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백범의 신념체계, 즉 그의 정치사상은 그것이 완성되지 못한 상태 다시 말해서 진행과정에서 끝났기 때문에 많은 문제점과 미숙성, 상황적인 한계성을 지닌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일생을 통하여 일관성 있게 주장하고 행동한 민족주체정신은 사상의 미숙성이나 한계성에 구애받지 않고 우리 민족의 가장 값진 교훈이 될 것이요, "사상의 자유를 확보하는 정치양식의 건립과 국민교육의 완비"는 우리 나라 정치.사회발전의 기본적인 지표가 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그의 통일이념은 통일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자체적 역량을 최대한으로 하겠다는 의지나 행동통일 없이 지금까지 실패의 원인이나 앞으로의 해결책을 외적 요인에서만 찾아온 우리의 통일정책이나 통일논의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줄 수 있는 불멸의 각성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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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8페이지
  • 등록일2006.12.27
  • 저작시기2006.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826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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