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바가바드기타를 읽기 전에 알아야 할 것
1. 바가바드기타란?
2. 바가바드기타의 중요성
3. 바가바드기타의 기원과 원본에 대하여
바가바드기타 요약
1장. 아르쥬나의 고민
2장. 상크야 요가
3장. 행동의 길
~~~~~~~~~
제18장. 내버림으로써 해탈에 이르는 길
1. 바가바드기타란?
2. 바가바드기타의 중요성
3. 바가바드기타의 기원과 원본에 대하여
바가바드기타 요약
1장. 아르쥬나의 고민
2장. 상크야 요가
3장. 행동의 길
~~~~~~~~~
제18장. 내버림으로써 해탈에 이르는 길
본문내용
에 이르느니라. 그러나 경전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애욕을 따라 제멋대로 행동하는 자는 완전에 이를 수도 없고, 평안을 얻을 수도 없고, 가장 높은 곳에 이를 수도 없느니라. 그 러므로 무엇이 해야 할 것이며, 또 무엇이 해야 하지 않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는 경전만이 너의 근거가 되어야 하느니라. 그것을 먼저 이해하고 나서 그 경전의 가르침 대로 너는 이 세상에서 행동해야 하는 것이다.
제 17장 세 가지 종류의 신앙
아르쥬나 묻기를 :
경전의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서도 믿음을 가지고 희생을 바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어떤 바탈의 상태에 있는 것입니까? 사라트입니까? 라자스입니까? 타마스입니 까?
바가반 크리슈나께서 말씀하시기를 :
사람의 믿음이란 그 바탈에 따라 세 가지로 나누니 그것을 사트바와 라자스와 타마스다. 각 사람의 믿음의 형태란 그 성질에 따라 이루어지느니라. 사람은 그 믿음으로 되느니, 무 엇을 믿었든지 간에 그 믿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곧 그 사람이니라. 위선과 교만에 쏠 려, 경전에서 지시하지도 않은 고행을 맹렬히 행하는 사람은 애욕과 집착의 힘에 몰려, 어 리석게도 자기 몸의 구성 요소 체를 학대하고 또 그 몸 안에 있는 나까지도 괴롭히니, 그 런 사람은 귀신에게 혹한 사람이니라. 경전의 지시에 따라 희생의 의식을 행하고, 자기 자 신을 위해서는 어떤 이익도 바라지 않을 때, 그 사람의 희생의 의식은 사트바적이다. 그러 나 겉으로 남에게 보이기 위하여 희생의 의식을 하고, 그 대가로서 어떤 보상을 바라는 사람, 그 사람의 의식은 라자스적이다. 그리고 경전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의식의 행함에 아무런 공양물도 바치지 않고, 조그만 신앙도 없이 찬가도 부르지도 않고, 모든 것을 생략 하는 사람, 이런 사람은 타마스적이다. 또 확고부동한 마음, 온유함, 명상함, 스스로 자기 를 제어함, 바탈 맑음의 마음의 고행이라고 하느니라. 이 세 가지 고행을 보상받을 욕심 없이 그저 깨달음으로 행한다면 이것을 가리켜 나는 사트바라고 하느니라. 그리고 모든 수행을 이기적인 자부심에서, 명성과 명예를 얻기 위해서 시작한다면, 이것을 가리켜 나는 라자스라고 하느니라. 또 어떤 자극을 얻기 위해 자기 자신을 학대하며, 다른 사람에게도 피해를 주는 고집 많은 고행은 어리석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가리켜 타마스라고 하느니 라. 옴, 타트, 사트 정말 있는 것, 참인 것
이 세 가지 말은 브라흐만의 상징으로서 옴은 어떤 희생의 의식을 행하기 전에, 보시를 행하기 전에, 고행을 시작하기 전에, 브라흐만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항상 외우는 말이다. 타트는 희생의 의식이나 보시나 어떤 고행을 행할 때, 그 구원을 바 라는 이들이 외우는 말이다. 사트는 거룩한 말로서 참된 있음이니라. 그러나 믿음에 대한 확신과 진리에 대한 사랑이 없이, 어떤 의식을 행하고 보시를 행하고 고행을 한다면, 그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니니라. 비실재는 이 세상에서도 저 세상에서도 오직 허망할 뿐이 니라.
제 18장. 내버림으로써 해탈에 이르는 길
아르쥬나 말하기를 :
내버림과 집착하지 않음의 참된 성격에 대하여 알고 싶습니다. 내버림과 집착하지 않음은 무엇입니까? 또 이 두 가지가 서로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바가반 크리슈나께서 말씀하시기를 :
어진 사람은 욕망에 의해서 일어난 모든 행동을 모두 내버림으로 아느니라. 그리고 집착 하지 않음이란 행동의 결과에 대하 내버림이니라. 어떤 사람은 행위는 악이기 때문에 그 만두어야 한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예배의 의식행위와 보시를 행함과 고행과 같은 행 위는 내버려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예배의 행위와 보시행위와 고행과 같은 행동을 포기 해서는 안 되느니라. 왜냐하면, 예배의 행위와 보시행위와 고행스러운 수행은 자기 정화되 는 닦음이기 때문이니라. 그러나 이 모든 행위를 한다 할지라도, 결과에 대한 욕망과 애착 함은 내버려야 하느니라. 어진 사람은 아트만에 대한 지식으로 참된 분별을 하나니, 그의 모든 의혹은 사라져 버리고 그 어느 행위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행위의 결과를 내버린 사 람이어야 정말 내버림의 사람이니라. 참된 내버림의 사람은 이 세상에서도 저 세상에서도 아무런 과보를 받지 않느니라. 그것은 행위가 이루어지는 자리인 이 몸과, 이 몸을 움직이 는 사람과, 이 사람 속에 있는 여러 가지 기관과 생명에 대한 의지적 에너지와, 과거에 자 기가 지어 놓은 업의 힘이니라. 그러나 자기라는 의식을 넘어서서, 애착을 초월해 버린 사 람의 지경은 그 어떤 무엇으로도 더립힐 수가 없느니라. 그것은 지식과 지식의 대상과 알 려진 바 그것이니라. 또 행위는 방편과 목적과 행위자라는 세 가지로 이루어지느니라. 이 모든 존재 안에서 흩어져 있으면서도 또 하나인 이 불멸의 실재를 아는 지식은 곧 사트바 적인 지식이니라. 그리고 모든 존재 안에서 부분적인 것만 알아서 존재의 다양성과 그 분 별만을 아는 지식은 라자스적인 지식이니라. 형상적인 것이 곧 실재인 줄로 착각하고 단 정 짓는 것은 라마스적인 지식이니라. 사람이 우주의 원천이며 모든 곳에 편재해 계시는 그이를 믿음으로써 그의 의무를 다 실행한다면, 그는 완전한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다. 자 기 바탈에 의해 정해져 있는 의무를 따라서 행위하는 사람은 죄를 범함이 없을 것이다. 내버림에 의해서 모든 욕망으로부터 해방되고 집착하지 않음과 자기 다스림의 힘을 얻었 을 때, 그 사람은 모든 행위로부터 초월해 계시는 실재자 브라흐만과 하나 되느니라.
아르쥬나 말하기를 :
이제 제 마음은 의심 없이 굳게 서 있습니다. 저는 이제 당신의 말씀에 따라 행동을 할 것입니다.
산자야 말하기를 :
이렇게 나는 바가반 크리슈나와 프리타 부인의 아들인 아르쥬나 사이의 이 놀라운 대화를 들었습니다. 이 지극히 거룩한 비밀의 말씀을 나는 알아 들었습니다. 요가의 대주재자이신 크리슈나와, 활 쏘는 장군이며 프리타 부인의 아들인 아르쥬나가 있는 곳에, 언제나 축복 이 있고, 평화가 있고, 영광이 있음을 나는 굳게 믿습니다.
▷자료 출처 :
바가바드기타 석진오 저 1991년 고려원
바가바드기타 임승택 저 1998년 강서원
제 17장 세 가지 종류의 신앙
아르쥬나 묻기를 :
경전의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서도 믿음을 가지고 희생을 바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어떤 바탈의 상태에 있는 것입니까? 사라트입니까? 라자스입니까? 타마스입니 까?
바가반 크리슈나께서 말씀하시기를 :
사람의 믿음이란 그 바탈에 따라 세 가지로 나누니 그것을 사트바와 라자스와 타마스다. 각 사람의 믿음의 형태란 그 성질에 따라 이루어지느니라. 사람은 그 믿음으로 되느니, 무 엇을 믿었든지 간에 그 믿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곧 그 사람이니라. 위선과 교만에 쏠 려, 경전에서 지시하지도 않은 고행을 맹렬히 행하는 사람은 애욕과 집착의 힘에 몰려, 어 리석게도 자기 몸의 구성 요소 체를 학대하고 또 그 몸 안에 있는 나까지도 괴롭히니, 그 런 사람은 귀신에게 혹한 사람이니라. 경전의 지시에 따라 희생의 의식을 행하고, 자기 자 신을 위해서는 어떤 이익도 바라지 않을 때, 그 사람의 희생의 의식은 사트바적이다. 그러 나 겉으로 남에게 보이기 위하여 희생의 의식을 하고, 그 대가로서 어떤 보상을 바라는 사람, 그 사람의 의식은 라자스적이다. 그리고 경전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의식의 행함에 아무런 공양물도 바치지 않고, 조그만 신앙도 없이 찬가도 부르지도 않고, 모든 것을 생략 하는 사람, 이런 사람은 타마스적이다. 또 확고부동한 마음, 온유함, 명상함, 스스로 자기 를 제어함, 바탈 맑음의 마음의 고행이라고 하느니라. 이 세 가지 고행을 보상받을 욕심 없이 그저 깨달음으로 행한다면 이것을 가리켜 나는 사트바라고 하느니라. 그리고 모든 수행을 이기적인 자부심에서, 명성과 명예를 얻기 위해서 시작한다면, 이것을 가리켜 나는 라자스라고 하느니라. 또 어떤 자극을 얻기 위해 자기 자신을 학대하며, 다른 사람에게도 피해를 주는 고집 많은 고행은 어리석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가리켜 타마스라고 하느니 라. 옴, 타트, 사트 정말 있는 것, 참인 것
이 세 가지 말은 브라흐만의 상징으로서 옴은 어떤 희생의 의식을 행하기 전에, 보시를 행하기 전에, 고행을 시작하기 전에, 브라흐만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항상 외우는 말이다. 타트는 희생의 의식이나 보시나 어떤 고행을 행할 때, 그 구원을 바 라는 이들이 외우는 말이다. 사트는 거룩한 말로서 참된 있음이니라. 그러나 믿음에 대한 확신과 진리에 대한 사랑이 없이, 어떤 의식을 행하고 보시를 행하고 고행을 한다면, 그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니니라. 비실재는 이 세상에서도 저 세상에서도 오직 허망할 뿐이 니라.
제 18장. 내버림으로써 해탈에 이르는 길
아르쥬나 말하기를 :
내버림과 집착하지 않음의 참된 성격에 대하여 알고 싶습니다. 내버림과 집착하지 않음은 무엇입니까? 또 이 두 가지가 서로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바가반 크리슈나께서 말씀하시기를 :
어진 사람은 욕망에 의해서 일어난 모든 행동을 모두 내버림으로 아느니라. 그리고 집착 하지 않음이란 행동의 결과에 대하 내버림이니라. 어떤 사람은 행위는 악이기 때문에 그 만두어야 한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예배의 의식행위와 보시를 행함과 고행과 같은 행 위는 내버려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예배의 행위와 보시행위와 고행과 같은 행동을 포기 해서는 안 되느니라. 왜냐하면, 예배의 행위와 보시행위와 고행스러운 수행은 자기 정화되 는 닦음이기 때문이니라. 그러나 이 모든 행위를 한다 할지라도, 결과에 대한 욕망과 애착 함은 내버려야 하느니라. 어진 사람은 아트만에 대한 지식으로 참된 분별을 하나니, 그의 모든 의혹은 사라져 버리고 그 어느 행위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행위의 결과를 내버린 사 람이어야 정말 내버림의 사람이니라. 참된 내버림의 사람은 이 세상에서도 저 세상에서도 아무런 과보를 받지 않느니라. 그것은 행위가 이루어지는 자리인 이 몸과, 이 몸을 움직이 는 사람과, 이 사람 속에 있는 여러 가지 기관과 생명에 대한 의지적 에너지와, 과거에 자 기가 지어 놓은 업의 힘이니라. 그러나 자기라는 의식을 넘어서서, 애착을 초월해 버린 사 람의 지경은 그 어떤 무엇으로도 더립힐 수가 없느니라. 그것은 지식과 지식의 대상과 알 려진 바 그것이니라. 또 행위는 방편과 목적과 행위자라는 세 가지로 이루어지느니라. 이 모든 존재 안에서 흩어져 있으면서도 또 하나인 이 불멸의 실재를 아는 지식은 곧 사트바 적인 지식이니라. 그리고 모든 존재 안에서 부분적인 것만 알아서 존재의 다양성과 그 분 별만을 아는 지식은 라자스적인 지식이니라. 형상적인 것이 곧 실재인 줄로 착각하고 단 정 짓는 것은 라마스적인 지식이니라. 사람이 우주의 원천이며 모든 곳에 편재해 계시는 그이를 믿음으로써 그의 의무를 다 실행한다면, 그는 완전한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다. 자 기 바탈에 의해 정해져 있는 의무를 따라서 행위하는 사람은 죄를 범함이 없을 것이다. 내버림에 의해서 모든 욕망으로부터 해방되고 집착하지 않음과 자기 다스림의 힘을 얻었 을 때, 그 사람은 모든 행위로부터 초월해 계시는 실재자 브라흐만과 하나 되느니라.
아르쥬나 말하기를 :
이제 제 마음은 의심 없이 굳게 서 있습니다. 저는 이제 당신의 말씀에 따라 행동을 할 것입니다.
산자야 말하기를 :
이렇게 나는 바가반 크리슈나와 프리타 부인의 아들인 아르쥬나 사이의 이 놀라운 대화를 들었습니다. 이 지극히 거룩한 비밀의 말씀을 나는 알아 들었습니다. 요가의 대주재자이신 크리슈나와, 활 쏘는 장군이며 프리타 부인의 아들인 아르쥬나가 있는 곳에, 언제나 축복 이 있고, 평화가 있고, 영광이 있음을 나는 굳게 믿습니다.
▷자료 출처 :
바가바드기타 석진오 저 1991년 고려원
바가바드기타 임승택 저 1998년 강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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