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 존경을 도덕적인 감정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칸트도 도덕법칙 자체가 우리의 영혼 속에 존경의 감정이 생겨나게 한다고 말한다. 만일 우리의 본성이 이러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면, 이는 칸트의 엄숙주의가 전제로 한 것과는 달리 우리의 본성이 도덕적 가치와 근본적으로 단절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런 차원에서 보자면, 법칙이나 엄중한 의미의 도덕적인 냉엄성은 사랑의 도덕 앞에서 소멸되어 버린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행복은 무엇일까? 재산, 권력, 물질적 또는 정신적 쾌락, 명예, 건강, 사랑, 덕, 인간성 등에 이르기까지 그 답은 실로 다양할 것이다. 이러한 다양성 때문에 칸트는 행복을 “모든 것이 소망과 의지대로 되는 상태”라고 순수 형식적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파라다이스와 황금시대에 관한 신화들은 이런 행복의 상태를 고전적 유토피아와 같은 낙원의 동화처럼 묘사한다. 그러나 사실 그런 행복은 상상 속에나 있을 수 있지 실현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의 서로 다른 행복에의 요구와 기대를 조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고, 따라서 우리는 타인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행복을 희생시켜야 하는 도덕적 의무를 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결론을 내려보자.
*행복의 추구는 모든 인간행위의 불가결한 계기이다.
*행복은 그 자체 목적으로 추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만족이나 기쁨을 줄 것으로 기대되는 구체적 목표에 의해 매개될 뿐이다.
*행복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의미 충만한 삶에 기여하는 실천의 성실한 수행을 통해서만 성취된다.
*행복은 도덕적으로 명령될 수 없다. 단지 이웃과 공동의 의미지평에 대해 합의하고, 그때그때 주어진 조건과 상황에 따라 의미 있는 것으로 인정된 목표를 실제로 달성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라고 명령될 수 있을 뿐이다.
*행복은 규범윤리학의 개념이 아니라 기술 윤리학의 개념이다. 인간은 이미 자연적으로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당위적으로 행복을 추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언제 어디서나 최선을 다해 선하게 행위 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여기에 궁극적으로 도덕적 관점 하에 놓여있는 인간의 행복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행복은 덕의 대가가 아니라 덕 그 자체” (스피노자, 『에티카』)이기 때문이다.
재산이나 건강, 명예나 권력 등의 외면적인 선은 사실 행위의 수단으로서 혹은 덕을 추구하기 위해서 반드시 소유해야 할 최소한의 행복의 조건으로 필수적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외적인 선에 대한 추구는 도덕의 진정한 목적에 이를 수 없다. 그러한 선을 획득한다는 것은 실제로는 행동의 모든 우연적인 것들에 종속되는 것이며, 이는 우리 인생의 가장 중요한 행복을 우연에 맡기는 어리석음이 될 것이다. 그러나 행복은 언제나 어떤 양의 욕구를 만족시켜야 하기 때문에 행복 자체는 상당히 우연적인 것 같다. 그러므로 진정한 도덕적 법칙은 행복의 추구에서 이끌어내질 수 없다. 그러나 이 말은 도덕적 의식이 행복을 배제한다는 뜻이 아니다. 칸트가 말했다시피, 도덕적 의식이 행복 가운데서는 진정한 의무의 법칙을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쾌락주의자들의 정의에 따르면 결국 행복이란 단순한 여러 가지 만족들의 총합이다. 그러나 단순한 만족이나 순수한 쾌감으로서의 행복은 행운의 선물에 불과하고 단지 한 순간의 향유이며, 도덕적 양심은 그것을 즐길 수는 있으나 그것의 진정한 근원은 아니다. 진정한 행복은 우연적인 것이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행복은 수동적으로 체험되는 것이어서는 안 되며, 진정한 능동성과 연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오직 인간의 자유로운 행위와 그의 내면적인 양심의 존엄성에 의존하는 행복만이 일시적이고 덧없는 행운의 영고성쇠를 넘어선다. “크고 많은 불행한 일들을 무관심에 의해서가 아니라, 영혼의 관용과 위대함으로서 굳건하게 견디는 데서 성립하는 아름다운 행위는 역경과 고통 가운데서도 빛난다. 우리가 말했듯이 인생에서 결정적인 것이 행위라면,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은 어느 누구도 불행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결코 비참하거나 천한 행위를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스토아 철학이 고통에 대해서 그것이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말했던 것은 이런 의미에서였다. 훌륭한 장군이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상황이 그의 능력 안에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인간도 그의 전 생애에서 고난이나 노쇠, 병, 죽음과 같은 재난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 그러나 사람들이 죽는 것이 진실이라 해도, 그것 때문에 그들이 행복하지 못하다는 것은 그만큼 진실이 아니다. 진정한 덕자는 불행할 수 없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내면적 행복의 근원을 손상시키지 않고 보존하고 있으며, 행운에 대한 어떤 장애도 그로 하여금 천한 행위나 그답지 않은 행위를 하게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것은 결코 직접적으로 의무가 될 수 없고 의무의 원리일 수도 없다. 칸트의 의무의 도덕은 고대 희랍의 윤리학이 했던 것보다 훨씬 분명하게 모든 도덕의 원리를 선언했다. 그러나 의무에 대한 선언에 있어서의 이러한 지나친 명료함은 그 반대급부로서 의무와 행복의 절대적인 분리와 행복에 대한 순전히 감각주의적 정의를 가져왔으며, 이 정의는 실제로 도덕의 영역에서 행복을 배제하고 따라서 행복을 불가능한 것으로 표상하고 말았다. 이러한 점에서 도덕적 행위를 수행하는 것 자체에서 진정한 행복의 근원을 찾았던 희랍의 도덕이 보다 의미있고 현실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의미에서의 행복은 감각적인 즐거움과 순간의 만족에 결부되어 있는 직접적인 의미를 상실하며, 진정한 행복은 생에 대한 단순한 즐김에 불과한 동물적인 행복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한 마리의 제비가 왔다고 아직 봄이 온 것은 아니며, 행복은 한 순간의 은총이나 변덕에 결부된 것보다는 지속적인 확실성을 원한다. 이러한 행복은 오히려, 스스로를 환경보다도 우월한 것으로 자각하며, 행운이나 불운 속에서도 위엄있게 빛나는 많은 반복된 체험적인 덕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행복은 무엇일까? 재산, 권력, 물질적 또는 정신적 쾌락, 명예, 건강, 사랑, 덕, 인간성 등에 이르기까지 그 답은 실로 다양할 것이다. 이러한 다양성 때문에 칸트는 행복을 “모든 것이 소망과 의지대로 되는 상태”라고 순수 형식적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파라다이스와 황금시대에 관한 신화들은 이런 행복의 상태를 고전적 유토피아와 같은 낙원의 동화처럼 묘사한다. 그러나 사실 그런 행복은 상상 속에나 있을 수 있지 실현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의 서로 다른 행복에의 요구와 기대를 조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고, 따라서 우리는 타인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행복을 희생시켜야 하는 도덕적 의무를 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결론을 내려보자.
*행복의 추구는 모든 인간행위의 불가결한 계기이다.
*행복은 그 자체 목적으로 추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만족이나 기쁨을 줄 것으로 기대되는 구체적 목표에 의해 매개될 뿐이다.
*행복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의미 충만한 삶에 기여하는 실천의 성실한 수행을 통해서만 성취된다.
*행복은 도덕적으로 명령될 수 없다. 단지 이웃과 공동의 의미지평에 대해 합의하고, 그때그때 주어진 조건과 상황에 따라 의미 있는 것으로 인정된 목표를 실제로 달성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라고 명령될 수 있을 뿐이다.
*행복은 규범윤리학의 개념이 아니라 기술 윤리학의 개념이다. 인간은 이미 자연적으로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당위적으로 행복을 추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언제 어디서나 최선을 다해 선하게 행위 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여기에 궁극적으로 도덕적 관점 하에 놓여있는 인간의 행복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행복은 덕의 대가가 아니라 덕 그 자체” (스피노자, 『에티카』)이기 때문이다.
재산이나 건강, 명예나 권력 등의 외면적인 선은 사실 행위의 수단으로서 혹은 덕을 추구하기 위해서 반드시 소유해야 할 최소한의 행복의 조건으로 필수적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외적인 선에 대한 추구는 도덕의 진정한 목적에 이를 수 없다. 그러한 선을 획득한다는 것은 실제로는 행동의 모든 우연적인 것들에 종속되는 것이며, 이는 우리 인생의 가장 중요한 행복을 우연에 맡기는 어리석음이 될 것이다. 그러나 행복은 언제나 어떤 양의 욕구를 만족시켜야 하기 때문에 행복 자체는 상당히 우연적인 것 같다. 그러므로 진정한 도덕적 법칙은 행복의 추구에서 이끌어내질 수 없다. 그러나 이 말은 도덕적 의식이 행복을 배제한다는 뜻이 아니다. 칸트가 말했다시피, 도덕적 의식이 행복 가운데서는 진정한 의무의 법칙을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쾌락주의자들의 정의에 따르면 결국 행복이란 단순한 여러 가지 만족들의 총합이다. 그러나 단순한 만족이나 순수한 쾌감으로서의 행복은 행운의 선물에 불과하고 단지 한 순간의 향유이며, 도덕적 양심은 그것을 즐길 수는 있으나 그것의 진정한 근원은 아니다. 진정한 행복은 우연적인 것이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행복은 수동적으로 체험되는 것이어서는 안 되며, 진정한 능동성과 연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오직 인간의 자유로운 행위와 그의 내면적인 양심의 존엄성에 의존하는 행복만이 일시적이고 덧없는 행운의 영고성쇠를 넘어선다. “크고 많은 불행한 일들을 무관심에 의해서가 아니라, 영혼의 관용과 위대함으로서 굳건하게 견디는 데서 성립하는 아름다운 행위는 역경과 고통 가운데서도 빛난다. 우리가 말했듯이 인생에서 결정적인 것이 행위라면,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은 어느 누구도 불행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결코 비참하거나 천한 행위를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스토아 철학이 고통에 대해서 그것이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말했던 것은 이런 의미에서였다. 훌륭한 장군이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상황이 그의 능력 안에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인간도 그의 전 생애에서 고난이나 노쇠, 병, 죽음과 같은 재난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 그러나 사람들이 죽는 것이 진실이라 해도, 그것 때문에 그들이 행복하지 못하다는 것은 그만큼 진실이 아니다. 진정한 덕자는 불행할 수 없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내면적 행복의 근원을 손상시키지 않고 보존하고 있으며, 행운에 대한 어떤 장애도 그로 하여금 천한 행위나 그답지 않은 행위를 하게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것은 결코 직접적으로 의무가 될 수 없고 의무의 원리일 수도 없다. 칸트의 의무의 도덕은 고대 희랍의 윤리학이 했던 것보다 훨씬 분명하게 모든 도덕의 원리를 선언했다. 그러나 의무에 대한 선언에 있어서의 이러한 지나친 명료함은 그 반대급부로서 의무와 행복의 절대적인 분리와 행복에 대한 순전히 감각주의적 정의를 가져왔으며, 이 정의는 실제로 도덕의 영역에서 행복을 배제하고 따라서 행복을 불가능한 것으로 표상하고 말았다. 이러한 점에서 도덕적 행위를 수행하는 것 자체에서 진정한 행복의 근원을 찾았던 희랍의 도덕이 보다 의미있고 현실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의미에서의 행복은 감각적인 즐거움과 순간의 만족에 결부되어 있는 직접적인 의미를 상실하며, 진정한 행복은 생에 대한 단순한 즐김에 불과한 동물적인 행복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한 마리의 제비가 왔다고 아직 봄이 온 것은 아니며, 행복은 한 순간의 은총이나 변덕에 결부된 것보다는 지속적인 확실성을 원한다. 이러한 행복은 오히려, 스스로를 환경보다도 우월한 것으로 자각하며, 행운이나 불운 속에서도 위엄있게 빛나는 많은 반복된 체험적인 덕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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