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나일본부설에 대해서-근거,연구동향,기존 연구의 문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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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임나일본부설에 대해서-근거,연구동향,기존 연구의 문제점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서론

본론
1. 임나일본부설의 근거
1) 일본서기(니혼쇼키)
2) 광개토대왕비
3) 송서의 기록
4) 칠지도
2. 임나일본부설의 연구동향
1) 출선기관설(出先機關說)
2) 가야(伽倻)의 왜설(倭說)
3) 분국설(分國說)
4) 백제군사령부설(百濟軍司令部設)
5) 외교사절설(外交使節說)
3. 기존 연구의 문제점
4. 근래 임나관계의 변화

결론

본문내용

에서 확인되는 있으나 그 수량이 매우 적으며, 출토 상황을 볼 때 전체적인 가야계통의 유물 속에서 극히 일부로서 확인될 뿐이다. 또한 해당 유물이 출토되는 유구-고분 역시 가야의 전통적인 묘제를 채용하고 있음이 확인될 뿐이다. 왜인의 집단적인 거주를 증명할 만한 것이 거의 없다.
‘ 분국론’에는 일본서기의 임나일본부에 관련되는 임나 자체를 한반도가 아닌 일본열도로 비정하였던 점이 치명적인 약점이다. ‘임나’라는 용어가 일본서기에 주로 보이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서기가 조작한 용어는 아니다. 우리 나라와 중국의 사료에서도 임나의 용례는 확인되기 때문이다.
《한원(翰苑)》에 인용된 중국의 인문지리지에 의하면 한반도 남부의 가야 지역을 총괄하여 ‘임나’라고 하고, ‘가라임나’의 국명을 언급하고 있다. 광개토대왕비문에 의하면 400년에 고구려군이 정벌하였던 지역명으로서 ‘임나가라(任那加羅)‘가 보이는데, 연구자에 따라 고령 혹은 김해로 보는 차이는 있을지언정 가야 지역을 가리키는 것에는 일치된 견해를 보이고 있다. 삼국사기 열전에 의하면 7세기 중반의 신라인 강수는 ’임나가량(任那加良)‘의 출신이라고 한다. 이와 함께 강수의 거주자기 충주로 되어있음을 상기한다면 그가 일본열도의 출신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고, 고령 가야국의 후예로서 그의 조상 대에 신라에 의하여 충주로 사민되었던 인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창원의 봉림사에 있었던 진경대사탑비문(923)에도 신라 사람인 진경대사가 ’임나왕족‘의 후예였음을 밝히는 구절이 된다. 이 역시 이 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임나는 한반도의 가야 지역을 가리키고 것이 분명하며 일본열도의 어디를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알 게 될 것이다. 《일본서기》에 기록된 ‘임나일본부’의 관련사료는 가야 지역에서 전개되었던 역사적 사실이 반영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4. 근래 임나관계의 변화
근래의 일본인 학자들에 의한 임나관계 연구경향은 종래의 임나일본부설에 비하여 상당한 차이가 나타난다.
1) 일본서기의 5세기 이전의 사료의 신빙성을 부인함으로써 임나일본부의 성립 시기를 4세기 중엽으로 설정하는 고정적 관점에서 후퇴하고 있으며, 대체로 그 문제를 6세기 전반으로 제한하여 보고 있다.
2) 임나일본부의 성격을 왜왕권이 임나를 군사통치하기 위하여 설치한 지배기관이라기 보다는, 왜왕권이 한반도의 선진문물을 독점적으로 수용하기 위하여 임나에 파견한 사신 또는 관인집단으로 보고 있다.
3) 임나일본부의 존립이유를 왜의 군사적 압제에서 구한다기보다 백제 신라의 압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가야제국의 자주적 의지에서 구하고 있다.
이러한 시각의 변화는 종래의 임나일본부설에서 일단 진일보한 것이라고 인정된다. 그러나 임나일본부와 야마토왕조와의 관계를 부인하는 견해도 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6세기 이전의 일본고대사가 아직 정립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점이라고 하겠다. 일본 열도내의 기본적인 세력판도가 어떻게 설정되었는가를 모르는 상태에서, 가능한 한 모든 대외관계의 주체를 기나이의 왕가로 돌려서 보려는 고정관념이 얼마나 타당할까하는 것이다. 거기에다가 가야제재세력의 자립성을 어느 정도 반영하였다고는 해도 근본적으로 주된 관심을 일본부에 두고있어서, 가야 지역에 살던 가야인의 대응 방식을 소홀히 한 채 일본서기를 찬술한 이래 일본의 일방적인 관점이 강조되어 여전히 실태파악의 균형을 잃고 있다고 보인다.
결론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임나일본부설은 그 뒤의 많은 연구자들에 의하여 비판되고 수정되어 이제는 학설로서의 생명을 거의 잃었다고 할 수 있다. 1970년대 이후로 본격화된 임나관계의 연구들은 서로 근접된 인식들을 보여주고 있다. 즉, 임나일본부의 문제를 일본서기의 신빙성을 고려하여 6세기 전반에 한정하여 취급한다든가, 임나일본부의 성격을 임나에 대한 지배가 아닌 문화, 문물 교류 등의 외교의 측면에서 이해한다든가, 임나문제에 대하여 가야를 영향권 안에 둔 백제의 역할을 중시한다든가 하는 점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6세기 이전의 가야사 및 일본 고대사 자체에 대한 연구가 아직 미진한 탓으로 인하여, 그들 사이의 대외관계사로서의 성격을 지니는 임나관계 연구는 더 이상의 규명이 어려운 단계에 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6세기 중엽 당시 임나일본부의 실체에 대해서는 가야사 및 일본 고대사의 체계적 연구 이후에 재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임나일본부설이 일제 치하기의 식민사관 때의 설로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시대에는 일본이 우리를 지배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했던 설이기 때문에 일본 쪽에서는 더 유익하도록 하였고 식민지배를 받아야 하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더 불리하도록 증거자료도 제대로 있지 않은 설을 과장되게 그렸고 허구를 악용했으며 증거자료들의 고의적인 변조가 있었다. 그러나 60년대 70년대를 거치면서 여러 가지 보안과 수정을 거치면서 한일 어떠한 방향에서 보아도 비교적 객관적인 모습을 띄게 되었다. 이렇게 많은 발전을 거듭하고 수정하여 근접된 인식을 보여준다는 것은 결국에는 결론에 가까워졌다고 봐도 될 것이다.
일본의 역사 교과서는 군사적 정복에 의한 지배기구로서의 ‘임나일본부설’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성격의임나일본부설은 역사적 사실에 어긋남이 한일 역사학계에서 공통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교과서에서는 이 설이 한일관계사 서술에서 침략을 합리화하는 잘못된 인식의 틀로 작용되고 있다. 비단 역사 교과서만의 상황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미래의 주역들이 평생 가지고 가게될 민족성을 기르는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교사가 될 사람들로서 일제 식민사관에 의해 만들어진 잘못된 지식을 올바르게 고쳐주어야 할 것이다.
◎ 참고문헌 ◎
日本歷史와 韓日關係, 1994, 류상종, 학문사
古代伽倻族이 세운 九州王朝, 1987, 이종항, 대왕사
廣開土王陵碑의 探求, 1987, 이진회, 일조각
시민을 위한 가야사, 1996, 부산경남역사연구소 고대사연구부, 집문당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7
두산세계대백과사전,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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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2.05
  • 저작시기2007.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92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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