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시대의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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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세종 시대의 외교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대 명 관계

2. 대 여진 관계와 북방 개척

3. 대마도 정벌과 대 일본 관계

본문내용

반발하지 않는 결과를 가져 왔다. 이러한 상황은 여진 침입을 물리치고 국경 경비를 강화하는 데 많은 국방력을 돌릴 수 있게 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세종대의 교린책은 여진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처음 회유책을 쓰다가 강경책으로, 일본에 대하여는 먼저 강경책을 썼다가 회유책으로 전환하면서 남 왜에 대한 우려가 줄어들었다고 보여 진다.
세종 4년에 태종이 사망하자 세종은 일본에 대하여 다시 회유책을 써서 대마도와의 통교를 허락하였다. 건국 초기에는 공적, 사적인 왜인들이 무질서하게 우리나라 남해안 일대에 무역선들이 도박함으로써 국방상, 사회상의 많은 문제가 발생하였기 때문에 태종 7년 부산포와 내이포를 한정하여 도박처로 정해주고 여기에서 무역 거래를 하게하고 접대도 여기서 행하도록 하였는데 세종 8년에는 다시 염포(울산)를 개항하니 이것이 삼포개항인 것이다. 이 삼포는 왜인의 왕래만 허락한 것으로 그들의 볼일이 끝나면 곧 돌아가야 했으니 왜인 가운데에는 돌아가지 않고 영주하는 항거왜인 수가 급증하고 이들의 횡포도 심하여 대마도주에게 항의해도 여의치 못하였다. 이에 세종은 다시 이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그의 25년 대마도와의 사이에 계해약조를 체결하여 진상 무역선인 대마도주의 세견선의 수를 제한하고 왜구 금압의 목적으로 주는 세사미두도 200석으로 제한하였다. 이와 같이 회유책을 쓰되 무질서한 왜인의 왕래를 제한했던 시기가 세종이 북방경략을 적극화하던 시기인데도 왜인들이 반발하지 않았다는 것은 바로 세종대에 있어서는 북방 경략 일변도의 방비가 아니라 왜에 대한 방비로 소홀히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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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5페이지
  • 등록일2007.02.09
  • 저작시기2007.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93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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