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서론
●본론
1. 너 자신을 알라
2. 한 이상주의자의 절망과 동경
3. 행복이란 무엇인가
4. 삶의 덧없음과 도덕의 숭고함
5. 참된 쾌락이란 무엇인가
6. 참된 종교와 참된 행복
7. 영원의 빛 아래서 본 인간
8. 동정심의 윤리학
9. 의무의 윤리학
10. 법칙 속에 있는 선
11. 도덕적 절망과 종교적 희망
●결론
그리고 남은 말들
●본론
1. 너 자신을 알라
2. 한 이상주의자의 절망과 동경
3. 행복이란 무엇인가
4. 삶의 덧없음과 도덕의 숭고함
5. 참된 쾌락이란 무엇인가
6. 참된 종교와 참된 행복
7. 영원의 빛 아래서 본 인간
8. 동정심의 윤리학
9. 의무의 윤리학
10. 법칙 속에 있는 선
11. 도덕적 절망과 종교적 희망
●결론
그리고 남은 말들
본문내용
과, 총체적 의미의 자연과 생명의 보존을 도덕의 궁극목적으로 삼는 것이 반드시 모순되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자기가 정립한 법칙에 자기 자신이 복종하는 것, 바로 이것이 칸트가 말하는 도덕적 인간의 자율이다. 목적들의 나라에서 모든 구성원이 동시에 주권자로서 자기 자신을 위하여 보편적 법칙을 수립하되, 그 모든 구성원의 모든 법칙들은 서로 충돌하지 않고 완벽한 조화 속에서 하나의 체계적 통일을 이룬다. 이것이 칸트의 주장이다.
11. 도덕적 절망과 종교적 희망 -칸트
도덕과 자유
왜 우리는 하고 싶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선을 행해야만 하는 것인가? 왜 우리는 때마다 자신의 욕망과 충동에 따라 살면 안 되는 것인가? 이미 전에 한 번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우리는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이 자연의 이치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경우라 해서 그와 달라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 것인가? 사자가 토끼를 잡아먹고 사는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런 일이듯이,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착취하는 일이나 권력자가 민중을 억압하는 것이 굳이 비난받아야 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어차피 무한한 우주의 역사 속에서 특별할 것도 없는 존재인 인간의 삶에서 어떤 필연성이 우리로 하여금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이라는 자연의 보편적 법칙을 거스르게 만드는 것인가? 한번쯤 생각해 볼만한 주제이다.
인간의 역사 속에는 자신을 희생해서 남을 구하는 사람이 있어 왔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해수욕장에서 물에 빠진 어린이를 구해내고 자기는 탈진해 숨져가는 고등학생이 있을 것이고 불이 난 집 안에 갇혀 있는 치매 걸린 늙은 시어머니를 구해내기 위해 화상을 무릅쓰고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가난한 초로의 아낙네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한 번의 영웅적 행위가 아니라 하더라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젊은이들이 있을 것이다. 아무런 까닭도 없이, 그들에게 왜라고 묻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선은 아무런 까닭도 없이 우리를 사로잡는다. 이런 의미에서 선한 의지는 자유로운 의지인 것이다.
우리사회에서 도덕은 언제나 자유로운 결단으로 이해되기보다는 외적 권위에 대한 순종과 예의로 이해되어왔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가정이나 학교에서 자유인의 긍지를 배우고 도덕적 법칙에 대한 거짓 없는 존경과 선에 대한 내멱적 동경을 키우기보다는, 타율적 권위 앞에서 순종하는 것이 생존을 위해 가장 영리한 선택이라는 처세술을 영악하게 터득할 뿐이다. 이런 사회 속에서 진정한 도덕이 뿌리내리는 것은 참 어렵다. 노예는 주인이 회초리를 들고 감시할 때에는 비굴하게 굽신거리며 법과 규범을 지키는 시늉을 하지만 감시의 눈이 없는 곳에서는 규범없는 무질서 상태에 빠져들게 된다. 그들에게 도덕적 규범이란 남의 눈이나 남의 강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하는 타율적인 강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타율적 강제가 없어지는 순간 그들은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도덕적 법칙을 외면하는 것이다.
도덕적 절망과 종교
세상에 대하여 맹목적인 기대에 사로잡히지도 않고, 또한 그 때문에 세상일에 대해 돌이킬 수 없이 절망할 필요도 없는 칸트주의자의 눈에는 사람들이 거짓 선지자들의 선전에 속아 내일 모레 당장 지상낙원이 이루어질 것처럼 열광하는 것도 딱한 일이지만, 그들의 헛된 기대가 실현되지 않았다 해서 정의와 선을 향한 동경과 열정 그 자체를 포기하는 것은 더욱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게 외적 조건에 따라 좌우되는 선한 의지라면, 그것은 참된 의미에서 선한 의지일 수 없다. 그러나 현실상황이 어떻든 오직 선 때문에 그리고 오로지 선을 위하여 흔들림 없이 선을 행할 수 있기 위해 우리는 처음부터 현실세계에 대해 절망하는 법을, 기대하지 않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런 비극적 세계관 속에서도 언제나 기뻐하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칸트적 입장에 따르면 오직 이것만이 참된 종교일 수 있다. 선을 추구하는 사람은 마지막에는 신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사는 자연적 세계와 그 속에 있는 모든 유한한 존재자들은 선에 대한 우리의 열망을 충족시켜주지 못한다. 그런 까닭에 선한 영혼은 유한한 세계를 뛰어넘어 존재의 절대적 완성을 추구하게에 이르는데, 이처럼 선에 대한 간절한 열망이 우리를 현실에 절망하게 할 때, 그 절망의 끝에서 우리가 만나는 신이야말로 참된 의미의 절대자일 수 있는 것이다.
결론
그리고 남은 말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자기 자신에 대한 긍지, 타인의 고통에 대한 동정과 연민 그리고 보편적 법칙에 대한 존경심을 고루 가질 때, 우리의 의지는 선한 의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하면 선한 사람이 되기는 매우 어렵다. 예수 같은 사람조차 어떤 사람이 그에게 찾아와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하고 물었을 때, “어찌하여 너는 나를 선하다 하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은 오직 하늘에 있는 하나님만이 참된 의미에서 선한 존재이며, 예수조차도 육체의 감옥에 갇혀 있는 한, 온전한 의미에서 선한 사람은 아니라는 말이었을 것입니다. 예수와 같은 성인조차 자기를 선한 사람이라 내세우지 않았다면, 우리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감히 스스로 선하다 자부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우리가 악덕에 빠지지 않기 위해 염려해야 할 마지막 일은 선을 추구하되, 내가 추구하는 선에 도취하여 나 자신의 악덕을 잊어버리지 말아야 한다. 내가 행한 크고 작은 악을 늘 기억하여 겸손과 부끄러움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리하여 선 때문에 도리어 악덕에 빠지지 않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한다. 본래 철학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많던 차라 책을 읽으면서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 많았다. 또 11가지의 챕터를 읽으면서 정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철학책을 많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과거의 철학자들의 사상을 보면서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제대로 인간답게 사는 것인가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한 삶을 사면서 보다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을 목표로 추구하는 이상 철학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있게 공부해야겠다.
11. 도덕적 절망과 종교적 희망 -칸트
도덕과 자유
왜 우리는 하고 싶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선을 행해야만 하는 것인가? 왜 우리는 때마다 자신의 욕망과 충동에 따라 살면 안 되는 것인가? 이미 전에 한 번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우리는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이 자연의 이치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경우라 해서 그와 달라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 것인가? 사자가 토끼를 잡아먹고 사는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런 일이듯이,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착취하는 일이나 권력자가 민중을 억압하는 것이 굳이 비난받아야 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어차피 무한한 우주의 역사 속에서 특별할 것도 없는 존재인 인간의 삶에서 어떤 필연성이 우리로 하여금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이라는 자연의 보편적 법칙을 거스르게 만드는 것인가? 한번쯤 생각해 볼만한 주제이다.
인간의 역사 속에는 자신을 희생해서 남을 구하는 사람이 있어 왔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해수욕장에서 물에 빠진 어린이를 구해내고 자기는 탈진해 숨져가는 고등학생이 있을 것이고 불이 난 집 안에 갇혀 있는 치매 걸린 늙은 시어머니를 구해내기 위해 화상을 무릅쓰고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가난한 초로의 아낙네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한 번의 영웅적 행위가 아니라 하더라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젊은이들이 있을 것이다. 아무런 까닭도 없이, 그들에게 왜라고 묻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선은 아무런 까닭도 없이 우리를 사로잡는다. 이런 의미에서 선한 의지는 자유로운 의지인 것이다.
우리사회에서 도덕은 언제나 자유로운 결단으로 이해되기보다는 외적 권위에 대한 순종과 예의로 이해되어왔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가정이나 학교에서 자유인의 긍지를 배우고 도덕적 법칙에 대한 거짓 없는 존경과 선에 대한 내멱적 동경을 키우기보다는, 타율적 권위 앞에서 순종하는 것이 생존을 위해 가장 영리한 선택이라는 처세술을 영악하게 터득할 뿐이다. 이런 사회 속에서 진정한 도덕이 뿌리내리는 것은 참 어렵다. 노예는 주인이 회초리를 들고 감시할 때에는 비굴하게 굽신거리며 법과 규범을 지키는 시늉을 하지만 감시의 눈이 없는 곳에서는 규범없는 무질서 상태에 빠져들게 된다. 그들에게 도덕적 규범이란 남의 눈이나 남의 강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하는 타율적인 강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타율적 강제가 없어지는 순간 그들은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도덕적 법칙을 외면하는 것이다.
도덕적 절망과 종교
세상에 대하여 맹목적인 기대에 사로잡히지도 않고, 또한 그 때문에 세상일에 대해 돌이킬 수 없이 절망할 필요도 없는 칸트주의자의 눈에는 사람들이 거짓 선지자들의 선전에 속아 내일 모레 당장 지상낙원이 이루어질 것처럼 열광하는 것도 딱한 일이지만, 그들의 헛된 기대가 실현되지 않았다 해서 정의와 선을 향한 동경과 열정 그 자체를 포기하는 것은 더욱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게 외적 조건에 따라 좌우되는 선한 의지라면, 그것은 참된 의미에서 선한 의지일 수 없다. 그러나 현실상황이 어떻든 오직 선 때문에 그리고 오로지 선을 위하여 흔들림 없이 선을 행할 수 있기 위해 우리는 처음부터 현실세계에 대해 절망하는 법을, 기대하지 않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런 비극적 세계관 속에서도 언제나 기뻐하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칸트적 입장에 따르면 오직 이것만이 참된 종교일 수 있다. 선을 추구하는 사람은 마지막에는 신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사는 자연적 세계와 그 속에 있는 모든 유한한 존재자들은 선에 대한 우리의 열망을 충족시켜주지 못한다. 그런 까닭에 선한 영혼은 유한한 세계를 뛰어넘어 존재의 절대적 완성을 추구하게에 이르는데, 이처럼 선에 대한 간절한 열망이 우리를 현실에 절망하게 할 때, 그 절망의 끝에서 우리가 만나는 신이야말로 참된 의미의 절대자일 수 있는 것이다.
결론
그리고 남은 말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자기 자신에 대한 긍지, 타인의 고통에 대한 동정과 연민 그리고 보편적 법칙에 대한 존경심을 고루 가질 때, 우리의 의지는 선한 의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하면 선한 사람이 되기는 매우 어렵다. 예수 같은 사람조차 어떤 사람이 그에게 찾아와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하고 물었을 때, “어찌하여 너는 나를 선하다 하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은 오직 하늘에 있는 하나님만이 참된 의미에서 선한 존재이며, 예수조차도 육체의 감옥에 갇혀 있는 한, 온전한 의미에서 선한 사람은 아니라는 말이었을 것입니다. 예수와 같은 성인조차 자기를 선한 사람이라 내세우지 않았다면, 우리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감히 스스로 선하다 자부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우리가 악덕에 빠지지 않기 위해 염려해야 할 마지막 일은 선을 추구하되, 내가 추구하는 선에 도취하여 나 자신의 악덕을 잊어버리지 말아야 한다. 내가 행한 크고 작은 악을 늘 기억하여 겸손과 부끄러움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리하여 선 때문에 도리어 악덕에 빠지지 않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한다. 본래 철학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많던 차라 책을 읽으면서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 많았다. 또 11가지의 챕터를 읽으면서 정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철학책을 많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과거의 철학자들의 사상을 보면서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제대로 인간답게 사는 것인가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한 삶을 사면서 보다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을 목표로 추구하는 이상 철학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있게 공부해야겠다.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