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촌락문서에 보이는 촌의 입지와 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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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각 촌락의 특성과 입지

Ⅱ.촌의 입지와 그 기재양식

Ⅲ.掘加利何木杖谷地의 의미와 개간의 확대

본문내용

에서 볼 때 신라의 견직물 수공업은 견직물의 공납과 더불어 귀족층의 수요에 대비하여 상당히 발전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아울러 개간지에는 草地도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草地와 관련하여 관심을 끄는 것은 신라에 널리 분포하고 있었던 목마장이다. 신라에는 왕실, 궁 및 진골 귀족들이 목마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들 목마장은 산곡의 지형을 이용하여 설치된 것으로 利何木杖谷의 입지도 계류가 흐르는 山谷간에 위치했다고 본다면 방목장으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을 것이다. B촌은 A촌과 더불어 田의 비율이 높은 곳으로서 상대적으로 초지를 만들 수 있는 지리적 조건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掘加利何木杖谷은 입지상으로나 이름으로 보아 계류를 포함한 방목지로서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A촌과 B촌의 관계가 촌주가 있던 A촌을 중심으로 하던 당현 소속의 촌락이었음을 고려하면, B촌의 利何木杖谷의 땅은 A촌과 함께 공동방목장으로 활용되었을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당시 신라의 양모 생산과 가공기술은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고 특히 毛氈은 대일 교역에서 중요한 제품으로 인식되었으며, 진골 귀족층을 중심으로 대일 교역에서 일본의 제품을 구입하는 결제수단으로 활용되었음이 매우 주목된다. 신라촌락문서 상에는 우마를 제외한 다른 동물은 보이지 않지만 양모 생산의 가능성을 고려하면 다른 지역에서는 개간을 통한 양의 방목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토지 개간은 田畓의 확보 외에도 뽕나무와 같은 경제작물의 식수와 방목지의 조성을 위해서도 적극적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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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5페이지
  • 등록일2007.03.15
  • 저작시기2006.8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990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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