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동양적 종교에 대한 새로운 관심
1. 문제 제기
2. 서양 인식론의 종착점 - 주체의 소멸
3. 신학적 사유로의 개방성
4. 현대 물리학과 동양 사상의 만남
5. 맺음말 - 동양과 서양의 절대자에 대한 이해의 차이성와 유사성
1. 문제 제기
2. 서양 인식론의 종착점 - 주체의 소멸
3. 신학적 사유로의 개방성
4. 현대 물리학과 동양 사상의 만남
5. 맺음말 - 동양과 서양의 절대자에 대한 이해의 차이성와 유사성
본문내용
logy)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인격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부인하고자 함이 아니고 하나님은 우리가 형성할 수 있는 모든 개념을 넘어서는 존재라는 사실, 즉 하나님은 인격이라는 개념까지도 '넘어선' 존재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교 역사 속에는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았던 아레오파기트의 디오니시우스(Dionysius the Areopagite)가 그와같은 하나님 개념에 도달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그는 하느님을 '넘어선 존재'(beyond Being)라고 불렀다. 그러나 기독교계 일반에서는 하나님은 여전히 인격적인 존재로만 여겨져왔고, 이러한 하나님 개념이 가지고 있는 한계는 거의 인식되지 않았다. 그래서 몇몇 신학자들이 '궁극적인 실재'라든지 '궁극적인 진리'라든지 또는 폴 틸리히(Paul Tillich)처럼 '궁극적인 관심'이라는 용어로 하나님의 인격적인 측면과는 구별되는 神性 자체를 표현해 보려고 애쓰고 있는 것도 필요한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神을 인격적인 용어로 지칭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 '브라흐만', '아트만',·'道',또는 불교의 극단적인 부정 개념인 '니르바나'(溫繫)와 '空'등의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인격 개념을 초극하고 있다. 神 내지는 神性을 지칭하는 이러한 용어들은 인간의 머리로는 인지할 수 없고, 따라서 인간이 형성한 그 어떤 개념도 '넘어서는', 이름 붙일 수 없는 실재를 가리키는 손가락 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 한 가지는 동양의 종교들은 神性을 지칭하는 이러한 명칭들을 가지고 어떠한 이론 체계나 교리를 형성하고자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동양 종교들에도 교리가 있다. 그러나 그 교리들은 神性 또는 궁극적인 실재의 체험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힌두교의 브라흐만은 만물이 거기로부터 나오고 있는 '근원', 그리고 만물이 거기에 의지해서 존재하고 있는 '토대', 그리고 만물이 지향하고 있는 '목표'로서의 실재를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가 그러한 브라흐만을 유일한 자라고 부르든지, 아니면 영원한 자 또는 초월자나 무한한 자라고 부르든지, 아니면 기타 무엇이라고 부르든지 간에 그 존재는 인격을 넘어서는 존재인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성스러움과의 만남이라고 부르는 인간과 궁극적 실재의 만남은 본질상 다른 만남들과 나란히 있는 하나의 만남이 아니다. 그것은 절대, 다시 말해서 절대성자체의 경험이다. 종교를 종교이게 하면서 동시에 종교를 무한히 초월하게 하는 것은절대 자체와의 만남인 것이다.
이것은 "성스러움의 의미"(the idea of the holy)에 대한 루돌프 오토(Rudolph Otto)의 생각과 일치한다. "성스러움의 의미" 라는 구절을 사용할 때면, 나는 20년대 중반쯤 독일 마르부르크에서의 아름답던 시간들을 기억하게 된다. 그때, 루돌프 오토와 나는 언덕과 숲속을 함께 거닐면서 그리스도교와 아시아종교들
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그는 이 분야의 뛰어난 학자였고, 거듭하여 이 문제에 몰두했다). "성스러움"이라는 말의 의미를 분석하면서 그가 말한 첫째는, "성스러움"은 "신비"이고, 인간이 실재와 만나는 다양한 영역에서 발견한 모든 절대적인 것들의 근저, 즉 절대 자체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유한한 경험에서는 도출될 수 없고, 본질상 유한한 정신으로는 도무지 포착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에게 그리고 모든 인간에게 하나의 신비인, 보편적 존재 안에 있는 인간 존재의 신비와 연결될 수 있고, 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신비를 경험하면 인간은 이런 질문을 하게 한다: "왜 무언가는 있고 무(無, nothing)는 없을까 ?"
오토는 우리의 정신이 궁극 및 궁극의 신비와 맺는 관계를 두개의 용어로 표현한다. 곧, "트레멘둠"(tremendum)-떨리고 두렵고 경외하게 하는 것-과 "파스치노숨"(fascinosum)-매혹하고 끌어당기고 갈망하게 하는 것-: 성스러움에 대한 인간의 무조건적 두려움과 무조건적 끌림이 두 용어를 통해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들이다. 그러면서 그것들은 인간의 실현 가능성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위협을 내포한다. 실현할 수 없으리라는 우려, 그것이 두려움이고, 실현하려는 욕망, 그것이 끌림인 것이다.
오토는 모든 종교로부터 예를 들면서, 이 예들은 모두 한가지를 가리키고 있음을 보여 준다. 즉, 이런 경험을 통해 사람들은 다양한 영역에서 파생된 모든 절대 적 인 것들을 넘어서는 절대적인 것으로서의 절대를 만났다는 것이다.
성스러움과의 만남이라고 부르는 인간과 궁극적 실재의 만남은 본질상 다른 만남들과 나란히 있는 하나의 만남이 아니다. 그것은 절대, 다시 말해서 절대성자체의 경험이다. 종교를 종교이게 하면서 동시에 종교를 무한히 초월하게 하는 것은절대 자체와의 만남인 것이다.
이것은 "성스러움의 의미"(the idea of the holy)에 대한 루돌프 오토(Rudolph Otto)의 생각과 일치한다. "성스러움의 의미" 라는 구절을 사용할 때면, 나는 20년대 중반쯤 독일 마르부르크에서의 아름답던 시간들을 기억하게 된다. 그때, 루돌프 오토와 나는 언덕과 숲속을 함께 거닐면서 그리스도교와 아시아종교들
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그는 이 분야의 뛰어난 학자였고, 거듭하여 이 문제에 몰두했다). "성스러움"이라는 말의 의미를 분석하면서 그가 말한 첫째는, "성스러움"은 "신비"이고, 인간이 실재와 만나는 다양한 영역에서 발견한 모든 절대적인 것들의 근저, 즉 절대 자체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유한한 경험에서는 도출될 수 없고, 본질상 유한한 정신으로는 도무지 포착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에게 그리고 모든 인간에게 하나의 신비인, 보편적 존재 안에 있는 인간 존재의 신비와 연결될 수 있고, 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신비를 경험하면 인간은 이런 질문을 하게 한다: "왜 무언가는 있고 무(無, nothing)는 없을까 ?"
오토는 우리의 정신이 궁극 및 궁극의 신비와 맺는 관계를 두개의 용어로 표현한다. 곧, "트레멘둠"(tremendum)-떨리고 두렵고 경외하게 하는 것-과 "파스치노숨"(fascinosum)-매혹하고 끌어당기고 갈망하게 하는 것-: 성스러움에 대한 인간의 무조건적 두려움과 무조건적 끌림이 두 용어를 통해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들이다. 그러면서 그것들은 인간의 실현 가능성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위협을 내포한다. 실현할 수 없으리라는 우려, 그것이 두려움이고, 실현하려는 욕망, 그것이 끌림인 것이다.
오토는 모든 종교로부터 예를 들면서, 이 예들은 모두 한가지를 가리키고 있음을 보여 준다. 즉, 이런 경험을 통해 사람들은 다양한 영역에서 파생된 모든 절대 적 인 것들을 넘어서는 절대적인 것으로서의 절대를 만났다는 것이다.
추천자료
종교재판과 마녀사냥
(요약)종교사회학이해-종교문화의 다양성
종교개혁사상 입문
종교의 자유
종교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
`여왕 마고`와 `돈 카를로`를 통해 분석한 종교개혁과 종교전쟁
[북한][북한의 문화][북한 미술][북한 종교][북한 체육][북한 의료제도][북한 온천과 약수터]...
[종교] 한국의 다종교 사회 속의 기독교
[종교] 『탈근대시대의 종교의 과제』에 대하여
[유교][유교 내용][유교 위상][유교 연구][협조주의][종교대화][유교 위기]유교의 개념, 유교...
북한의종교
[이문열 소설][사람의 아들][종교관][신관]이문열 소설 사람의 아들 이데올로기, 이문열 소설...
현대 사회에서의 종교의 새로운 의미를 정립하고, 바람직한 종교생활에 대해 논하시오.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