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금산사 당간지주(金山寺幢竿支柱)
2.금산사 대장전(金山寺大藏殿)
3. 금산사 미륵전(金山寺彌勒殿)
4. 금산사 육각 다층석탑(金山寺六角多層石塔)
5. 금산사 석련대(金山寺石蓮臺)
6.금산사 노주(金山寺露柱)
7. 금산사 석등(金山寺石燈)
8. 금산사 석종(金山寺石鐘)
9.금산사 오층석탑(金山寺五層石塔)
<금강사 오층석탑>
10. 금산사 혜덕왕사 진응탑비
11. 진표율사
2.금산사 대장전(金山寺大藏殿)
3. 금산사 미륵전(金山寺彌勒殿)
4. 금산사 육각 다층석탑(金山寺六角多層石塔)
5. 금산사 석련대(金山寺石蓮臺)
6.금산사 노주(金山寺露柱)
7. 금산사 석등(金山寺石燈)
8. 금산사 석종(金山寺石鐘)
9.금산사 오층석탑(金山寺五層石塔)
<금강사 오층석탑>
10. 금산사 혜덕왕사 진응탑비
11. 진표율사
본문내용
았다고 한다. 11세 때 사냥을 나갔다가 밭둑에서 개구리를 잡아 버드나무 가지에 꿰어놓고, 사냥이 끝난 뒤에 가져가기 위하여 물 속에 담가두었다. 그러나 집으로 갈 때 가져가는 것을 잊고 다른 길로 돌아갔다. 이듬해 봄 다시 사냥을 갔다가 개구리 우는 소리를 듣고 그 물 속을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30여 마리의 개구리가 꿰미에 꿰인 채 그 때까지 살아서 울고 있었다. 지난해의 일을 생각해낸 그는 잘못을 뉘우치고 출가를 결심하였다. 12세에 출가하여 금산사(金山寺) 순제(順濟)에게 사미계법(沙彌戒法)을 받았다.
760년(경덕왕 19) 쌀 20말을 쪄서 말려 변산의 부사의방(不思議房)에 들어갔다. 미륵상 앞에서 부지런히 계법을 구하였으나 3년이 되도록 수기(授記)를 받지 못하자, 바위 아래로 몸을 던졌으나, 청의동자(靑衣童子)가 나타나 손으로 받들어 바위 위에 올려놓았다. 이에 다시 뜻을 발하여 37일을 기약하고 부지런히 참회하였다. 3일째가 되자 손과 발이 부러져 떨어졌고, 7일째 밤에 지장보살이 금장(金杖)을 흔들며 와서 손과 발을 고쳐주고, 가사(袈裟)와 바루(鉢盂)를 주었으므로 더욱 수도에 정진하였다. 37 일을 채우자 천안(天眼)을 얻어 도솔천중(兜率天衆)이 내려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이에 지장보살은 계본(戒本)을 주고 미륵보살은 제9간자(簡子)와 제8간자라고 쓰여 있는 목간(木簡)을 주었다. 미륵보살은 “이 두 간자는 내 손가락뼈로서 시각(始覺)과 본각(本覺)의 두 각을 비유한 것이다. 또, 제9간자는 법이(法爾)이고 제8간자는 신훈성불종자(新熏成佛種子)이니, 이것으로써 과보(果報)를 알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때가 762년 4월 27일이다. 지장과 미륵 두 보살로부터 교법(敎法)을 전하여 받고 산에서 내려와, 대연진(大淵津)에서 용왕으로부터 옥과 가사를 받았고 그 용왕의 권속들의 도움으로 금산사를 중창하였다. 이때부터 금산사에 머물면서 해마다 개단(開壇)하고 교화를 폈다. 그 뒤 금산사를 떠나 속리산을 거쳐 강릉으로, 다시 금강산으로 옮기면서 중생을 교화하였다. 금강산에 들어가 발연사(鉢淵寺)를 창건하고 7년 간 머무르면서 점찰법회(占察法會)를 열었으며, 흉년으로 굶주리는 많은 사람들을 구제하였다.
말년에 아버지를 모시고 발연사에서 함께 도를 닦았으며, 절의 동쪽 큰 바위 위에 앉아 입적하였다. 제자들은 시체를 옮기지 않은 채 공양하다가 해골이 흩어져 떨어지자 흙을 덮어 무덤으로 삼았다.
760년(경덕왕 19) 쌀 20말을 쪄서 말려 변산의 부사의방(不思議房)에 들어갔다. 미륵상 앞에서 부지런히 계법을 구하였으나 3년이 되도록 수기(授記)를 받지 못하자, 바위 아래로 몸을 던졌으나, 청의동자(靑衣童子)가 나타나 손으로 받들어 바위 위에 올려놓았다. 이에 다시 뜻을 발하여 37일을 기약하고 부지런히 참회하였다. 3일째가 되자 손과 발이 부러져 떨어졌고, 7일째 밤에 지장보살이 금장(金杖)을 흔들며 와서 손과 발을 고쳐주고, 가사(袈裟)와 바루(鉢盂)를 주었으므로 더욱 수도에 정진하였다. 37 일을 채우자 천안(天眼)을 얻어 도솔천중(兜率天衆)이 내려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이에 지장보살은 계본(戒本)을 주고 미륵보살은 제9간자(簡子)와 제8간자라고 쓰여 있는 목간(木簡)을 주었다. 미륵보살은 “이 두 간자는 내 손가락뼈로서 시각(始覺)과 본각(本覺)의 두 각을 비유한 것이다. 또, 제9간자는 법이(法爾)이고 제8간자는 신훈성불종자(新熏成佛種子)이니, 이것으로써 과보(果報)를 알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때가 762년 4월 27일이다. 지장과 미륵 두 보살로부터 교법(敎法)을 전하여 받고 산에서 내려와, 대연진(大淵津)에서 용왕으로부터 옥과 가사를 받았고 그 용왕의 권속들의 도움으로 금산사를 중창하였다. 이때부터 금산사에 머물면서 해마다 개단(開壇)하고 교화를 폈다. 그 뒤 금산사를 떠나 속리산을 거쳐 강릉으로, 다시 금강산으로 옮기면서 중생을 교화하였다. 금강산에 들어가 발연사(鉢淵寺)를 창건하고 7년 간 머무르면서 점찰법회(占察法會)를 열었으며, 흉년으로 굶주리는 많은 사람들을 구제하였다.
말년에 아버지를 모시고 발연사에서 함께 도를 닦았으며, 절의 동쪽 큰 바위 위에 앉아 입적하였다. 제자들은 시체를 옮기지 않은 채 공양하다가 해골이 흩어져 떨어지자 흙을 덮어 무덤으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