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들어가며
Ⅱ. 불국사
Ⅲ. 석굴암(石窟庵) - 석불사(石佛寺)
Ⅳ. 분황사
Ⅴ. 경주 첨성대 (국보 제31호)
Ⅵ. 안압지
Ⅶ. 성덕대왕신종
Ⅷ. 상사암
Ⅸ. 마치며
Ⅱ. 불국사
Ⅲ. 석굴암(石窟庵) - 석불사(石佛寺)
Ⅳ. 분황사
Ⅴ. 경주 첨성대 (국보 제31호)
Ⅵ. 안압지
Ⅶ. 성덕대왕신종
Ⅷ. 상사암
Ⅸ. 마치며
본문내용
올라가서 피리가 이사간 마을을 멀리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나무에 목을 메어 죽어버렸다. 할아버지의 혼은 그곳에 큰 바위가 되어 피리가 살고 있는 마을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 후부터 피리는 무서운 꿈을 꾸게 되었다. 눈만 감으면 큰 뱀이 몸을 칭칭 감고 갈라진 혀를 날름거리며 덤벼드는 것이었다. 그 무서운 꿈은 한번만 꾸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눈을 감으면 또 다시 되풀이되고 하니 피리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몸은 점점 쇠약해져서 볼품없이 되어 가는데 동리 사람들 사이에는 수군수군 이상한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피리를 생각하다가 죽었기 때문에 그리워하던 생각이 상사뱀이 되어서 피리를 찾아 오는 거라는 이야기였다. 오랫동안 밤잠을 자지 못하여 괴로움에 지쳐 있는 피리가 어느 날 몽롱하게 잠이 들었는데 몸을 감고 있던 뱀이 할아버지로 변하면서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잊혀지지 않아 죽어 버렸는데 죽어서도 또 잊혀지지 않아 피리 아가씨를 괴롭히고 있으니 용서해 주시오. 살았을 땐 죽을 길이라도 있더니 이제 죽었으니 죽을 길도 없구료.」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힘없이 국사곡으로 들어가 바위가 되어 자기를 바라보고 서 있는 꿈을 꾸었다. 피리는 자기를 생각하다가 죽은 할아버지가 죽어서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피리는 조용히 일어나서 할아버지가 힘없이 가던 길을 따라 국사곡으로 들어가서 정상에 서 있는 그 바위에 올라서서 바위에서 뛰어 내렸다. 피리의 영혼은 또 하나의 바위가 되어 큰 바위 옆에 나란히 섰으니 세상 사람들은 이 바위를 가리켜 상사바위라 한다. 지금 큰 바위부분에 붉게 보이는 반점이 있으니 그것을 피리의 피 자국이라 한다. 이상의 이야기가 서려있는 상사바위에 기도를 드리면 사랑이 이뤄진 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상선암 마애석가여래대불좌상>
상선암은 남산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있는 암자이다. 이 곳에 이르면 남산 불상 중 가장 크고 조각이 우수한 마애 석가여래대불좌상(지방유형문화재 제158호)을 볼 수 있다. 금오산 정상에 솟은 거대한 바위 봉우리를 냉곡암봉(冷谷岩峰)이라 부른다. 두개의 봉우리로 되어 있는데 남쪽 봉우리의 뒷면은 상사암이고 북쪽 봉우리는 봉생암(鳳生岩)이라 부른다. 바위에서 서쪽으로 보면 배리평야가 보일듯 말듯 멀고, 동으로 바라보면 천태만상을 이룬 상사암이 하늘에 떠 있는듯 장엄하게 솟아 있다. 이렇게 신령스러운 바위산 허리에 평평한 터(6m×4.3m)가 천연으로 마련되어 있다.
터의 북쪽 바위 면에는 높이 7미터 나비 5미터 되는 배광(背光)형으로 생긴 바위가 절벽을 이루고 있으니 이곳은 하늘이 정해주신 부처님 영지(靈地)라 할 수 있다.
이 배광형 바위에다가 큰 부처의 좌상을 새겨 놓았다.
나비 4.2m나 되는 큰 연꽃 위에 결가부좌하여 오른손은 가슴 앞에, 왼손은 배 앞에 들어 설법하시는 모습이다.
대좌의 꽃송이는 두겹으로 되었는데 꽃잎마다 보상화로 장식된 화려한 연꽃이다.
꽃 위에 앉은 불상의 높이는 5.21m이고 무릎 나비는 3.5m 이다.
머리는 배광면에서 66.6센티미터나 튀어나와 입체상에 가까울 정도로 사실적이며 몸체는 바위면을 이용하여 부피없는 선각으로 새겨놓았지만 불상의 몸체는 빈약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바위 자체가 갖고 있는 양감이 둥근 머리와 충분한 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사각에 가까운 머리는 풍만하며 가늘고 긴 눈이 정면을 내다보는데, 예리하게 다듬어진 코는 굳세며 굵은 눈썹은 단정하게 초생달을 그리고 있다.
입술은 굳게 다물었고, 군턱이 있고 살찐 두 뺨과 입 언저리에 조용한 미소가 감추어져 있다.
삭발한 머리에 육계가 나지막하고 큰 귀는 어깨까지 닿아 있다.
불상이 새겨진 바위 면 전체가 약간 뒤로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먼 하늘을 바라보면서 누리를 제도하고 계신듯 느껴진다.
머리만 인공으로 다듬었을 뿐 바위를 몸체로 삼아 주위 환경과 조화를 이루어 놓은 것이다.
몸체를 머리와 같은 수법으로 조각하지 아니하고 바위 모양을 이용하여 반자연, 반인공으로 표현한 것은 예배하는 사람의 마음을 배경인 바위산으로 끌어드리려 함이었다.
Ⅸ. 마치며
경주 지역의 실태만 보더라도 아무런 보상정책도 이루어지지 않은 채 무조건적인 문화재 보존을 강요한다는 것은 억지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개발과 문화재 보호 중 어디에 우선 순위를 두느냐를 놓고 팽팽히 대립했던 경주 고속철도 노선은 문화재 보호를 위해 경주 외곽으로 우회해 건천에 역사를 두는 건천~화천노선으로 확정되었다. 이 당시 “건천에 신도시를 짓고 경주의 도심 거주민에게 이곳으로의 우선이주권을 준 뒤, 왕경 지구를 중심으로 경주를 본래 상태로 복원하자”는 문체부안 이라고도 불리는 이 제안이 외곽이든 도심이든 고속철도가 경주를 경유하는 것 자체를 반대했던 사람들까지 흡인해 문화-종교-학계의 대세를 이루어 결국 경주 노선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라고 한다. 문화계나 경실련도 중앙정부가 일본의 고도 나라나 이탈리아의 로마처럼 신도시를 건설함으로써 신라 천년의 문화재와 시민들의 개발욕구를 모두 충족 시킬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현재 우리에게는 개발과 관계된 긴급발굴이나 대형발굴을 체계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인력과 기관이 턱없이 모자라는 형편이다. 대부분의 개발과 관련된 문화재 조사는 대학으로 집중되어 있으며 그 결과 전국 모든 대학의 문화재 조사인력은 항상 과포화 상태에 놓여 있다. 따라서 시급한 것은 문화재 조사를 전담할 수 있는 기구를 갖추는 일이지만, 우리의 법체계 아래에서 이것은 매우 어렵고도 복잡한 문제를 수반하고 있다. 우리 제도가 안고 있는 이런 문제를 생각한다면, 문화재 관리의 효율성과 문화재 행정의 체계성을 확립하는 방향으로 이루어 져야 한다. 현재의 제도에서는 중요한 발견이나 심각한 문화재 파괴의 위협이 발생해도 모든 조치가 늦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중앙과 지방의 행정이 따로 돌아가고 있어 부족한 인력과 물적 자원을 낭비시키고 있다. 아울러 정부의 실질적인 예산이 뒷받침된 가운데 고도에 사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시민의식이 뒤따른다면 문화재 보존의 앞날은 한결 밝아질 것이다.
<상선암 마애석가여래대불좌상>
상선암은 남산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있는 암자이다. 이 곳에 이르면 남산 불상 중 가장 크고 조각이 우수한 마애 석가여래대불좌상(지방유형문화재 제158호)을 볼 수 있다. 금오산 정상에 솟은 거대한 바위 봉우리를 냉곡암봉(冷谷岩峰)이라 부른다. 두개의 봉우리로 되어 있는데 남쪽 봉우리의 뒷면은 상사암이고 북쪽 봉우리는 봉생암(鳳生岩)이라 부른다. 바위에서 서쪽으로 보면 배리평야가 보일듯 말듯 멀고, 동으로 바라보면 천태만상을 이룬 상사암이 하늘에 떠 있는듯 장엄하게 솟아 있다. 이렇게 신령스러운 바위산 허리에 평평한 터(6m×4.3m)가 천연으로 마련되어 있다.
터의 북쪽 바위 면에는 높이 7미터 나비 5미터 되는 배광(背光)형으로 생긴 바위가 절벽을 이루고 있으니 이곳은 하늘이 정해주신 부처님 영지(靈地)라 할 수 있다.
이 배광형 바위에다가 큰 부처의 좌상을 새겨 놓았다.
나비 4.2m나 되는 큰 연꽃 위에 결가부좌하여 오른손은 가슴 앞에, 왼손은 배 앞에 들어 설법하시는 모습이다.
대좌의 꽃송이는 두겹으로 되었는데 꽃잎마다 보상화로 장식된 화려한 연꽃이다.
꽃 위에 앉은 불상의 높이는 5.21m이고 무릎 나비는 3.5m 이다.
머리는 배광면에서 66.6센티미터나 튀어나와 입체상에 가까울 정도로 사실적이며 몸체는 바위면을 이용하여 부피없는 선각으로 새겨놓았지만 불상의 몸체는 빈약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바위 자체가 갖고 있는 양감이 둥근 머리와 충분한 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사각에 가까운 머리는 풍만하며 가늘고 긴 눈이 정면을 내다보는데, 예리하게 다듬어진 코는 굳세며 굵은 눈썹은 단정하게 초생달을 그리고 있다.
입술은 굳게 다물었고, 군턱이 있고 살찐 두 뺨과 입 언저리에 조용한 미소가 감추어져 있다.
삭발한 머리에 육계가 나지막하고 큰 귀는 어깨까지 닿아 있다.
불상이 새겨진 바위 면 전체가 약간 뒤로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먼 하늘을 바라보면서 누리를 제도하고 계신듯 느껴진다.
머리만 인공으로 다듬었을 뿐 바위를 몸체로 삼아 주위 환경과 조화를 이루어 놓은 것이다.
몸체를 머리와 같은 수법으로 조각하지 아니하고 바위 모양을 이용하여 반자연, 반인공으로 표현한 것은 예배하는 사람의 마음을 배경인 바위산으로 끌어드리려 함이었다.
Ⅸ. 마치며
경주 지역의 실태만 보더라도 아무런 보상정책도 이루어지지 않은 채 무조건적인 문화재 보존을 강요한다는 것은 억지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개발과 문화재 보호 중 어디에 우선 순위를 두느냐를 놓고 팽팽히 대립했던 경주 고속철도 노선은 문화재 보호를 위해 경주 외곽으로 우회해 건천에 역사를 두는 건천~화천노선으로 확정되었다. 이 당시 “건천에 신도시를 짓고 경주의 도심 거주민에게 이곳으로의 우선이주권을 준 뒤, 왕경 지구를 중심으로 경주를 본래 상태로 복원하자”는 문체부안 이라고도 불리는 이 제안이 외곽이든 도심이든 고속철도가 경주를 경유하는 것 자체를 반대했던 사람들까지 흡인해 문화-종교-학계의 대세를 이루어 결국 경주 노선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라고 한다. 문화계나 경실련도 중앙정부가 일본의 고도 나라나 이탈리아의 로마처럼 신도시를 건설함으로써 신라 천년의 문화재와 시민들의 개발욕구를 모두 충족 시킬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현재 우리에게는 개발과 관계된 긴급발굴이나 대형발굴을 체계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인력과 기관이 턱없이 모자라는 형편이다. 대부분의 개발과 관련된 문화재 조사는 대학으로 집중되어 있으며 그 결과 전국 모든 대학의 문화재 조사인력은 항상 과포화 상태에 놓여 있다. 따라서 시급한 것은 문화재 조사를 전담할 수 있는 기구를 갖추는 일이지만, 우리의 법체계 아래에서 이것은 매우 어렵고도 복잡한 문제를 수반하고 있다. 우리 제도가 안고 있는 이런 문제를 생각한다면, 문화재 관리의 효율성과 문화재 행정의 체계성을 확립하는 방향으로 이루어 져야 한다. 현재의 제도에서는 중요한 발견이나 심각한 문화재 파괴의 위협이 발생해도 모든 조치가 늦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중앙과 지방의 행정이 따로 돌아가고 있어 부족한 인력과 물적 자원을 낭비시키고 있다. 아울러 정부의 실질적인 예산이 뒷받침된 가운데 고도에 사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시민의식이 뒤따른다면 문화재 보존의 앞날은 한결 밝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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