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하이데거의 예술작품의 근원
1. 사물
2. 도구
Ⅱ. 하이데거의 논리 전개
1. 전통적 진리관
2. 하이데거의 진리관
Ⅲ. 하이데거의 예술 철학
Ⅳ. 하이데거의 예술론과 미학비판
1. 하이데거의 예술론
2. 하이데거의 미학비판
1. 사물
2. 도구
Ⅱ. 하이데거의 논리 전개
1. 전통적 진리관
2. 하이데거의 진리관
Ⅲ. 하이데거의 예술 철학
Ⅳ. 하이데거의 예술론과 미학비판
1. 하이데거의 예술론
2. 하이데거의 미학비판
본문내용
어렵다는 것은 상당히 엘리트주의적인 사고라고 느껴지며 하이데거는 고호의 그림을 바라보자고 우리의 손을 이끌 때처럼, 진리의 일어남을 창작과 보존의 과정에서도 조금 더 확장시킬 필요가 있지 않을까?
Ⅳ. 하이데거의 예술론과 미학비판
1. 하이데거의 예술론
하이데거의 사상은 본질적으로 미론이나 예술론이라기 보다는 존재론이다. 그리고 그는 예술가와 예술작품 사이의 '순환의 길'을 끊임없이 수행해 나감으로써 존재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사유해낼 수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작품을 진리가 일어나는 하나의 가능성으로 파악한 그의 사상은 독창적인 동시에 유효적절하고 탁월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예술을 그 자신의 존재론을 위한 도구의 성격으로 삼은 감이 없지 않다. 즉 예술과 철학이라는 어찌보면 상반되기까지 한 두 학문을 연관지어 존재에 대한 질문을 자꾸 묻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개개 분야에 내재된 의문으로 인해 한계를 만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위에서 필자는 주로 전통 미학의 관점에서 하이데거의 예술철학을 비판해보았지만, 필자의 생각에 하이데거는 우리에게 미학 이론을 가르치려 한 것이 아니다. 그는 오로지 작품이라는 '진리의 한 가능성'을 통해 존재의 심연을 좀더 깊고도 쉽게 사유하려 했을 뿐이다. 그의 업적도 바로 이러한 심오함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며, 바로 이 점이 근본적으로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그의 사상을 현대에 있어서도 위대한 것으로 만들어 주고 있는 가장 큰 요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 하이데거의 미학비판
하이데거의 미학 비판(Kritik der Asthetik)은 동시에 근대의 미적(asthetische) 예술문화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정말 그렇게 작품들이 미술관과 전시관에 세워져 있고 내걸려 있다 (...) 공공기관은 작품들을 관리하고 보호하는 일을 맡는다. 미술전문가와 미술 비평가는 작품들을 놓고 분주히 씨름한다. 미술품 거래상은 시세를 따진다. 미술사 연구는 작품들을 한 학문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러한 다중적인 분주함 속에서 작품들 그 자체와 만나고 있는가? 근원 S.581모던의 예술문화는 미술관과 박물관을 통한 수집과 진열의 문화다. 여기서 작품들은 그것이 가졌던 진리를 잃어버리고 한갓 미적관조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이것을 하이데거는 세계의 박탈, 세계의 붕괴라 부른다.
뮌헨 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에기나 사원의 입상들, 가장 훌륭한 교정본에 수록돼 있는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는 작품으로 존재하는 작품들로서 그것들이 원래 속해 있던 본래의 공간에서부터 벗어 나와 있는 것들이다. 설령 그것들이 지닌 품격과 그것들이 불러일으키는 감명이 여전히 매우 위대하며 그것들의 보존상태가 여전히 매우 훌륭하고 그것들에 대한 해석이 여전히 아주 믿을 만하다 할지라도, 그렇게 박물관으로 옮겨 놓는 일은 작품들을 그것들의 세계로부터 빼앗아 간 셈이 된다. 근원 S.581-2 이것은 단지 그 작품들이 그것이 원래 속하던 콘텍스트에서 공간적으로 분리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더 큰 문제는 작품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과거와 달라졌다는 데에 있다. 그리하여 설령 우리가 예컨대 파에스툼 신전을 찾기 위해 그 신전이 세워져 있는 장소를 방문한다거나, 밤베르크 성당을 찾기 위해 그 성당이 있는 광장을 방문함으로써 작품들의 이식을 지양 또는 삼가려고 애쓴다고 할지라도, 지금 앞에 놓인 작품들이 원래 속해 있던 세계는 붕괴되어 있는 것이다. 근원 S.582
<근원>을 쓴 하이데거의 최종 목표는 예술을 대하는 현존재의 근본태도의 변화를 준비하는 데에 있었다. 그 변화된 태도의 요체는 작품에 세계를 돌려주는 것, 즉 예술을 한갓 미적 대상이 아니라 진리가 발생하는 방식으로 대하는 데에 있다. 작품을 작품이게 하고, 진리를 진리이게 하는 이런 태도를 하이데거는 앞에서 보존이라 불렀다. 창작됨 없이 도대체 하나의 작품이 존재할 수 없고 그래서 본질적으로 작품은 창작하는 자를 필요로 하듯이 보존하는 자 없이는 창작된 것 자체 또한 존재적이 될 수 없다. 근원 S.613
하나의 작품은 박물관 안으로 옮겨져 보관되거나 전시장 안에 배치된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흔히 작품이 진열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진열(Aufstellen)은 하나의 건축작품을 세워낸다든가, 하나의 입상을 건조한다든가, 축제 때 비극을 무대에 올린다고 하는 의미에서의 건립(Aufstellung)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된다.
건립은 봉헌하고 찬송한다는 의미에서의 건립이다. 봉헌한다 함이란, 작품적으로 세워내는 가운데 성스러움이 성스러움으로서 열려 보여지고 신이 그의 현전성의 열린 장 안으로 불리워 들여진다고 하는 의미에서의 성스럽게 함을 뜻한다. 근원 S.585
여기서 작품은 거의 종교적 숭고의 아우라를 뒤집어쓰게 된다. 작품으로부터 세계를 박탈하여 그것을 미적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현대의 예술문화에 대한 하이데거의 반감은 정확히 벤야민의 태도와 대립된다. 벤야민 역시 현대인의 지각이 아우라를 파괴하여 예술작품이 갖고 있던 제의적 가치를 전시적 가치로 바꾸어 놓고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하지만 벤야민은 하이데거와 달리 이를 한탄하지 않는다. 그는 이 변화를 필연적인 것으로 보아 굳이 되돌리려 하지 않고 외려 거기서 긍정적인 현상을 본다. 여기에서 모던을 부정하는 하이데거의 보수주의 그것을 긍정하는 벤야민의 진보적 태도는 극적으로 충돌한다.
참고문헌
신승환, 진리 이해의 지평으로서의 예술, 하이데거의 예술철학, 철학과 현실사 2002.
신승환, 존재의 역동적 움직임으로서의 예술의 진리―진리개념에 대한 탈형이상학적 이해시도, 하이데거의 철학세계, 철학과 현실사 1997.
이선일, 다시 써보는 예술작품의 근원, 하이데거의 예술철학, 철학과 현실사 2002.
이수정, 하이데거의 예술론, 하이데거의 예술철학, 철학과 현실사 2002.
진중권, 현대미학 강의, 아트북스, 2003, pp. 5~143
진중권, 미학 오디세이 1, 새길, 2001, pp. 76~89, 97~127, 227~239
진중권, 미학 오디세이 2, 휴머니스트, 2003, pp. 79~87, 105~117, 161~171
Ⅳ. 하이데거의 예술론과 미학비판
1. 하이데거의 예술론
하이데거의 사상은 본질적으로 미론이나 예술론이라기 보다는 존재론이다. 그리고 그는 예술가와 예술작품 사이의 '순환의 길'을 끊임없이 수행해 나감으로써 존재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사유해낼 수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작품을 진리가 일어나는 하나의 가능성으로 파악한 그의 사상은 독창적인 동시에 유효적절하고 탁월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예술을 그 자신의 존재론을 위한 도구의 성격으로 삼은 감이 없지 않다. 즉 예술과 철학이라는 어찌보면 상반되기까지 한 두 학문을 연관지어 존재에 대한 질문을 자꾸 묻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개개 분야에 내재된 의문으로 인해 한계를 만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위에서 필자는 주로 전통 미학의 관점에서 하이데거의 예술철학을 비판해보았지만, 필자의 생각에 하이데거는 우리에게 미학 이론을 가르치려 한 것이 아니다. 그는 오로지 작품이라는 '진리의 한 가능성'을 통해 존재의 심연을 좀더 깊고도 쉽게 사유하려 했을 뿐이다. 그의 업적도 바로 이러한 심오함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며, 바로 이 점이 근본적으로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그의 사상을 현대에 있어서도 위대한 것으로 만들어 주고 있는 가장 큰 요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 하이데거의 미학비판
하이데거의 미학 비판(Kritik der Asthetik)은 동시에 근대의 미적(asthetische) 예술문화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정말 그렇게 작품들이 미술관과 전시관에 세워져 있고 내걸려 있다 (...) 공공기관은 작품들을 관리하고 보호하는 일을 맡는다. 미술전문가와 미술 비평가는 작품들을 놓고 분주히 씨름한다. 미술품 거래상은 시세를 따진다. 미술사 연구는 작품들을 한 학문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러한 다중적인 분주함 속에서 작품들 그 자체와 만나고 있는가? 근원 S.581모던의 예술문화는 미술관과 박물관을 통한 수집과 진열의 문화다. 여기서 작품들은 그것이 가졌던 진리를 잃어버리고 한갓 미적관조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이것을 하이데거는 세계의 박탈, 세계의 붕괴라 부른다.
뮌헨 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에기나 사원의 입상들, 가장 훌륭한 교정본에 수록돼 있는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는 작품으로 존재하는 작품들로서 그것들이 원래 속해 있던 본래의 공간에서부터 벗어 나와 있는 것들이다. 설령 그것들이 지닌 품격과 그것들이 불러일으키는 감명이 여전히 매우 위대하며 그것들의 보존상태가 여전히 매우 훌륭하고 그것들에 대한 해석이 여전히 아주 믿을 만하다 할지라도, 그렇게 박물관으로 옮겨 놓는 일은 작품들을 그것들의 세계로부터 빼앗아 간 셈이 된다. 근원 S.581-2 이것은 단지 그 작품들이 그것이 원래 속하던 콘텍스트에서 공간적으로 분리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더 큰 문제는 작품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과거와 달라졌다는 데에 있다. 그리하여 설령 우리가 예컨대 파에스툼 신전을 찾기 위해 그 신전이 세워져 있는 장소를 방문한다거나, 밤베르크 성당을 찾기 위해 그 성당이 있는 광장을 방문함으로써 작품들의 이식을 지양 또는 삼가려고 애쓴다고 할지라도, 지금 앞에 놓인 작품들이 원래 속해 있던 세계는 붕괴되어 있는 것이다. 근원 S.582
<근원>을 쓴 하이데거의 최종 목표는 예술을 대하는 현존재의 근본태도의 변화를 준비하는 데에 있었다. 그 변화된 태도의 요체는 작품에 세계를 돌려주는 것, 즉 예술을 한갓 미적 대상이 아니라 진리가 발생하는 방식으로 대하는 데에 있다. 작품을 작품이게 하고, 진리를 진리이게 하는 이런 태도를 하이데거는 앞에서 보존이라 불렀다. 창작됨 없이 도대체 하나의 작품이 존재할 수 없고 그래서 본질적으로 작품은 창작하는 자를 필요로 하듯이 보존하는 자 없이는 창작된 것 자체 또한 존재적이 될 수 없다. 근원 S.613
하나의 작품은 박물관 안으로 옮겨져 보관되거나 전시장 안에 배치된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흔히 작품이 진열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진열(Aufstellen)은 하나의 건축작품을 세워낸다든가, 하나의 입상을 건조한다든가, 축제 때 비극을 무대에 올린다고 하는 의미에서의 건립(Aufstellung)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된다.
건립은 봉헌하고 찬송한다는 의미에서의 건립이다. 봉헌한다 함이란, 작품적으로 세워내는 가운데 성스러움이 성스러움으로서 열려 보여지고 신이 그의 현전성의 열린 장 안으로 불리워 들여진다고 하는 의미에서의 성스럽게 함을 뜻한다. 근원 S.585
여기서 작품은 거의 종교적 숭고의 아우라를 뒤집어쓰게 된다. 작품으로부터 세계를 박탈하여 그것을 미적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현대의 예술문화에 대한 하이데거의 반감은 정확히 벤야민의 태도와 대립된다. 벤야민 역시 현대인의 지각이 아우라를 파괴하여 예술작품이 갖고 있던 제의적 가치를 전시적 가치로 바꾸어 놓고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하지만 벤야민은 하이데거와 달리 이를 한탄하지 않는다. 그는 이 변화를 필연적인 것으로 보아 굳이 되돌리려 하지 않고 외려 거기서 긍정적인 현상을 본다. 여기에서 모던을 부정하는 하이데거의 보수주의 그것을 긍정하는 벤야민의 진보적 태도는 극적으로 충돌한다.
참고문헌
신승환, 진리 이해의 지평으로서의 예술, 하이데거의 예술철학, 철학과 현실사 2002.
신승환, 존재의 역동적 움직임으로서의 예술의 진리―진리개념에 대한 탈형이상학적 이해시도, 하이데거의 철학세계, 철학과 현실사 1997.
이선일, 다시 써보는 예술작품의 근원, 하이데거의 예술철학, 철학과 현실사 2002.
이수정, 하이데거의 예술론, 하이데거의 예술철학, 철학과 현실사 2002.
진중권, 현대미학 강의, 아트북스, 2003, pp. 5~143
진중권, 미학 오디세이 1, 새길, 2001, pp. 76~89, 97~127, 227~239
진중권, 미학 오디세이 2, 휴머니스트, 2003, pp. 79~87, 105~117, 161~171